read 6088 vote 0 2004.09.07 (22:40:11)

12. 교육자 김구의 진면목

이웃 마을 강진사 집을 찾아갔다. 예전과 같은 상놈의 신분으로 절할 자에게 절하였다. 그같이 교만하던 양반들이 나의 공경한 태도를 감당하기 어려워 어쩔 줄 몰라한다. 나라가 죽게 되니까 온갖 못된 위세를 부리던 양반들부터 저 꼴이 된 것이 아닌가. [백범일지]

이 시기 김구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교를 열고 교육활동과 기독교활동에 종사하면서 신천에 사는 교우 최준례여사와 약혼하는 등 잠깐의 안정된 생활을 보낸다. 곧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사방에서 의병이 벌떼처럼 일어나매 한동안 서울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황해도로 돌아와 장련, 안악 등지에서 신교육사업에 종사한다

신학문을 전파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는 이 시기의 김구에게서 고집 센 원칙가의 면모를 찾아볼 수는 없다. 조선의 의기남아로서 국모보수를 위하여 치하포에서 왜놈 간첩을 때려죽인 사건은 유학을 배운 사람의 의리론을 따른 것으로 결코 극단적인 성격의 발로가 아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부지수 불여공대천(父之讐 弗與共戴天) 형제지수 불반병(兄弟之讐  不反兵) 교유지수 부동국(交遊之讐 不同國)이라는 대목이 있다. 부모의 원수와는 하늘을 같이하지 않고, 형제의 원수는 보이는 대로 처치하고, 친구의 원수는 나라끝까지 쫓아가서 갚아야 한다는 뜻이다. 백범의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명분은 부모의 원수와 하늘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예법이 따른 것으로 유교철학의 의리론으로 따지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된다.

김구나 노무현이 때로 강고한 원칙주의자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서민출신 지도자로서의 정체성을 활용하기 위한 실용주의적 태도일 수 있다. 김구와 노무현은 타협하여야 할 시점에는 어김없이 타협하였고, 중재가 필요한 시점에는 반드시 중재자로 나서곤 하였다. 단 서민 출신지도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그러하였다.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하고 절규한 것은 고향에 돌아갈 때 환등기구를 구해가지고 가서 인근 마을의 양반 상놈을 다 모아놓고 환등회 석상에서 한 말이다. [백범일지]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하고 외친 대목에서 김구선생이 뛰어난 웅변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웅변의 역사는 1896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 박사가 이상재, 이승만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협회를 조직함으로써 시작된다. 1896년 종로네거리에서 독립협회 주도로 시민 수 천명이 모여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

이때 이승만, 홍정우 선생 등이 열변을 토한 것이 최초로 대중 앞에서의 웅변이다. 이어서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백범 김구, 설산 장덕수, 몽양 여운형 선생 등이 명 웅변가의 계보를 이으며 웅변의 전성시대를 열어간다. 이 시기 김구선생은 해서 일대의 각 면을 순회하면서 환등기로 수백명의 학생을 불러모으고 군수와 시골의 유지들은 물론 읍내 일본 관리들까지 지켜보는 앞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한다.

1903년 인천에서 최초로 활동 사진이 소개되었고 첫번째 한국영화인 '의리적 구투‘는 1919년에 나왔다. 아직 영화가 널리 보급되기 전인 한일합방 직전 시기는 환등기구야 말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신문물이라 할 수 있다.  

김구의 웅변은 아직도 양반의 세력이 건재한 시골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종로네거리에서 행해진 이상재 이승만 등의 웅변과는 그 질이 다르다. 또 당시로서는 최고의 신문물인 환등기를 들고 각 면을 순회하며 대중 앞에서 목청 높여 웅변을 하는 일은 점잔을 빼고 격식을 따지는 양반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구선생이 안창호 이승훈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웅변가가 될 수 있었던 데는 체면과 격식을 따지지 않는 상놈 출신의 서민적 정체성이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은 국회의원들 가운데서 최초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해 본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김구가 환등기구를 도입한 것이나 노무현이 컴퓨터를 만진 것이나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서민 출신의 지도자가 가지는 특유의 실용주의적 사고가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김구가 대중 앞에서 웅변을 한 것과 노무현이 인터넷 등 미디어를 활용하는데 주력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체면을 따지는 양반출신이나 학자타입의 인물은 결코 해내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대중적 인기를 획득하기 위한 쇼맨십이요 다른 면에서 보면 위신과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서민 지도자의 장점이다.

필자는 교육자로 활동하던 시절의 김구의 모습이야말로 인간 김구의 진면목이라 생각한다. 치하포에서 왜놈 간첩을 때려죽인 일이나 상해에서 윤봉길의사를 시켜 폭탄을 던지게 하는 사건들로 하여 우리는 김구를 과격한 사람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물인 환등기구를 들고 시골을 순회하며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시골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모습에서 인간 김구의 진짜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이 과격한 사람으로 오해된 부분은 실은 그만큼 정치의 때가 덜 묻었기 때문이다. 과격이라는 이름으로 붙은 딱지는 순수라는 이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1900~ 1908년]

26세, 고향으로 돌아와 교육활동에 종사한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삼촌 김준영을 도와 농사를 짓기도 한다.

28세, 기독교에 입교한다. 장연읍에 봉양(鳳陽)학교를 설립한다. 환등기를 들고 각 면을 순회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웅변을 한다. 신여성이라 할 도산 안창호의 누이 안신호와 약간의 인연을 맺는다. 이듬해 최준례(崔遵禮)여사와 결혼한다.  

30세,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서울로 상경하여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의 철회를 상소한다. 도산 안창호 등이 주도한 신민회에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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