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13번째 글입니다. 지난해 대선 이전에 씌어진 글이나, 일부는 지금 현실에 맞게 고쳤습니다. 』 |
11. 인간의 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노무현은 1981년 부림사건 변론 이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고문을 당한 젊은이들의 참혹한 실상을 목도하고 분노한 끝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자서전에 쓰고는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판사도 해보았고, 변호사도 해보았고, 돈도 벌어보았다. 집안에 친구들에게 자랑도 할만큼 했다. 그러나 무언가가 허전하다. 출세한 노무현, 성공한 노무현을 인정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직접적으로는 1973년 큰형님 노영현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되겠다.
누구나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대상이 있다. 어떤 특정 인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그룹에 소속되므로서 인정받는 것일 수도 있다. 이문열이라면 조선일보 사주와 형님 동생 하는 정도가 인생의 목표가 아닐까 싶다. 이 사회의 이른바 파워엘리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되겠다.
김영삼이라면 아버지 홍조옹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지 싶다. 중학생 때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책상머리에 써 붙인 마음도 실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데서 오는 야망일지도 모른다.
한 인간의 야망은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 구체적인 동기부여의 대상이 있다. 정몽준씨라면 아버지로부터 늘 들어온 『몽준이 하는 일이 늘 그렇지』라는 평을 벗어 던지고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옛날의 그 몽준이 아니라니까요!”
김용옥을 인정해줄 사람이라면 그래도 ‘달라이 라마’급은 되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김우중사장과 형님동생 하는 정도의 야심이 김용옥 그 인간의 그릇 크기를 규율하고 있다. 그러나 김용옥이 그 웃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버릇을 못 버려서는 금강경을 만번 읽어도 깨달을 수 없다.
노무현은 그 인정받고 싶어하는 대상이 사라져 버렸다. 큰형님 노영현씨가 1973년 교통사고로 운명하셨기 때문이다. 그 이후 노무현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정받고 싶어 하는 동기 그 자체는 여전히 살아있다.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의 일부 조심성 없는 행동이 거기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무애행(無碍行)이라고도 할 만도 하다. 나쁘게 표현하면 ‘건방’이다.
인간이 성장함에 따라 그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은 국가나 민족이나 역사나 신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대체된다. 곧 인격적 성숙이다. 반면 나이를 먹어도 철이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인정투쟁의 대상이 추상화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황태자 코모두스의 거대한 야망은 실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억울함에서 그 동기부여가 주어진다. 코모두스의 철부지 짓은 그 인정투쟁의 대상을 추상화하지 못한데 따른 것이다.
그것은 울분이다. 울분은 세상이 나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억울함에서 시작된다. 가슴 밑바닥에서 에너지로 응축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인배들은 약간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등이라도 두들겨주면 인정받았다 싶어서 그만 헤헤거리게 된다. 순치된다. 길들여진다. 그 타성에 갇혀 버린다. 김용옥처럼, 이문열처럼, 김동길처럼.
인간 노무현! 너무 일찍 철들어버렸다. 친형 노영현씨의 부재 때문이다.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큰형님께 세속적인 성공이나 출세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인간 노무현의 야망은 성공이나 출세를 뛰어넘는 더 커다란 그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노무현의 언행에서는 그 인간을 한계지우는 울타리가 보이지 않는다.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이다. 야생마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고독하다. 결국 신으로부터, 역사로부터, 국민으로부터 세상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12. 재야운동가로 거듭난 노무현
노무현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변호사 업무를 팽개쳐놓고 87년 6월 항쟁을 이끄는 등 부산의 대표적인 재야운동가로 투신하게 된다. 운동권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사회에 대하여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취미였던 요트도 그만두고 비싼 술집에도 발길을 끊는다.
‘돌아온 탕자’ 노무현이 문득 개과천선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어떤 인간이 극에서 극으로 돌연 변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만약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뭔가 모자라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전과자가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을 받아 범죄를 끊는다든가 하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있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면 원래 좀 모자라는 사람이다. 예컨대 군대가서 비로소 철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면 그는 대단히 모자란 사람이다.
글 배운 사람이 문득 개과천선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예컨대 이념적으로도 극단적인 좌파가 문득 깨닫고 우파가 되었다거나, 혹은 그 반대로 우파였다가 문득 의식화교육을 받고 좌파가 되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뭔가 크게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만약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필자는 사상적 전향이라는 것을 본질적 의미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85년 대학가에 강철서신을 유포한 김영환 같은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극단적인 좌파였다가 돌연 김정일정권을 비난하면서 극우적인 행동을 보인다. 과연 이념이 바뀐 것일까? 천만에!
둘 중 하나다. 이념의 변화를 가장한 기회주의적 행동이거나 아니면 원초적으로 지능이 미달하거나이다. 미당 서정주가 친일하다가 애국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없다. 일본이 망할 줄 몰랐기 때문에 친일하였고, 일본이 망했기 때문에 애국하는 것이다. 이는 이념을 바꾼 것이 아니라 출세를 위하여 뒤에 가서 서는 줄을 바꾼 것에 불과하다. 기회주의적 처신이다.
물론 사상의 전향이라는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그러나 대개 뭔가 모자라는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이거나, 아니면 기회주의적 처신을 변명하기 위하여 전향을 했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에 불과하다.
흔히 말해지는 바 처음에는 뭔가를 몰랐는데 나중 그 실체를 깨닫고 치를 떨었다는 식의 주장들은 100프로 거짓말이다. 정치 철새들이 둘러대는 말에 불과하다. 진실을 말하면 적당한 기회를 보아 발을 뺐다고 해야 맞는 말이다.
현실 정치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인제씨, 김민석씨, 김원길씨를 필두로 정치적 입장을 바꾼 사람들이 무수히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은 전부 거짓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사상의 전향은 기회주의적인 태도 아니면 수준 이하의 사람이 대책없이 저지르는 망동일 뿐이다.
노무현이 운동에 투신하면서 개과천선한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세계, 다른 가치의 영역으로 자신의 세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취미생활로 탔다는 요트나, 최근에 배웠다는 골프나, 비싼 술집에의 출입이나 더 넓은 세계를 향한 모험적인 편력의 일부였을 뿐이다.
노무현이 요트를 끊은 것은 거기서 얻을 것을 이미 충분히 얻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비싼 술집을 끊은 것은 더 중요한 가치를 발견한 지금 그것이 시간낭비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백지동맹을 주도하면서 투사 노무현은 이미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노무현은 일생을 거쳐 그 어떤 것에도 깊이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한번씩 거쳐가는 것이며 필요한 만큼 취하는 것이다. 곧 노무현의 실용주의적 태도이다. 개과천선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실용적이지 못하므로 그만 용도폐기 한 것이다.
덧글.. 노무현이 대통령 당선 후에 안보현실을 깨닫고 반미주의를 버렸다거나 하는 식의 회자되는 말들은 터무니없다. 노무현은 눈꼽만큼도 변하지 않았다. 단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적당히 늦추고 조이며 그 시점에 맞는 전술을 구사할 뿐이다.
-하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