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11번째 글입니다. 지난해 대선 이전에 씌어진 글이나, 일부는 지금 현실에 맞게 고쳤습니다. 』 |
노무현은 일부러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어 상대방이 오판하고 실수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다. 개구리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은 하수가 고수의 수읽기를 당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노무현 역시 9단이었다.
7. 초등학교 6학년 대형사고를 치다
6학년이 되어서는 대형사고를 친다. 붓글씨 대회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2등상의 수상을 거부한 것이다. 실수로 글씨를 잘못 써도 새 종이로 바꿔주지 않게 되어 있는데 다른 반 담임선생님을 아버지로 둔 아이가 규정을 어기고 새 종이로 바꿔써서 제출한 끝에 1등을 차지한 것이다.
노무현소년은 담임선생님께 크게 꾸지람을 듣고 너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저지른 실수라며 반성하고 있다. 급우들 앞에서 잘난 척 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필자는 어린 시절 국가와 조직, 제도 따위가 어떤 원리에 의해 돌아가는지가 항상 궁금했다. 전교생이 줄을 잘 맞추어 선 운동장 조회날에 나 혼자 슬그머니 줄 바깥으로 나와서 털썩 주저앉아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때 교장선생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일 뿐 한 번도 시도해 보지는 못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배가 아프다고 말하고 조퇴를 해 본 경험이 소년시절 필자의 유일한 도발이었다. 규칙을 위반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규칙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가 그 시절엔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사실 어린이들은 사회의 규범에 대해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사리에 맞지 않는 규칙이라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한 친구가 급우들에게 10원을 빌려주고 하루에 10원씩 이자를 받기로 약속한다. 돈을 빌린 급우는 곧 원금을 갚았지만 이자를 갚지 못한 채 한 달이 지나자 원금의 30배인 300원 가량의 채무가 발생한다.
돈을 빌려준 친구는 약속은 신성한 것이므로 이자 300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채권을 행사하려 했다가 선생님께 혼줄이 나는 식이다. 어린이다운 치기다.
잘못된 계약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배워야 한다. 노무현소년은 기회를 잡아 세상의 조직, 규칙, 제도 따위가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지를 실험해 본 것이다. 감히 규칙과 제도의 권위에 도전해 보므로서 어떤 규정도 합리성에 반하면 인정될 수 없다는 원리를 터득한 것이다.
법률제도의 기본은 절대주의가 아니라 상대주의다. 법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다. 그 어떤 것이든 합리성에 기초하지 않으면 본질에서 의미가 없다. 필자는 이 붓글씨소동이야말로 노무현소년이 법과 정의에 눈뜬 최초의 사건이 아닌가 생각한다.
종이를 바꿔주지 않겠다는 규칙은 글씨를 정성들여 쓰라는 선생님의 권고였을 뿐이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규칙은 아니었다. 세상의 어떤 규칙도 합리성에 반하면 의심되어야 한다. 악법은 지킬 것이 아니라 고쳐야 한다. 노무현소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배웠다.
8. 중학교 1학년 입학금 소동을 벌이다
보통 대화를 처음 시작할 때 꺼내는 말버릇이 있다. 아기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의 말씀 중에 틀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어린이들은 보통은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
“야야! 울엄마가 그러던데 말야!”
머리가 굵어지고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최고의 권위가 된다. 무슨 말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들어봐!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말야!”
이때 만약 친구가 『아냐! 울엄마가 그러던데..』하고 반박을 하다가는 여지없이 깨지게 된다. 엄마의 권위가 감히 선생님의 권위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중학생 쯤 되면 선생님 말씀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이 시기에 최고의 권위는 책이나 방송이다. 또한 대화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오늘 책에서 봤는데 말야.”
“무슨 소리야!
난 어젯밤에 텔레비젼에서 봤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더라구!”
고등학생 쯤 되면 신문이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는다. 논쟁에서 이기려면 방송이나 책보다는 권위 있는 신문을 내세워야 한다.(요즈음은 인터넷으로 바뀌었겠지만.)
“어제 한겨레신문에 난 그 기사 봤어? 못 봤지? 그럼 넌 찌그러져!”
그러다가 마침내 어른이 되면 도로 이렇게 반문하게 된다.
“세상에 믿을 게 어딨어?”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 책도 방송도 신문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다른 어떤 권위에 의지하려 하다가는 오히려 망신을 당하게 된다.
“얌마! 너 그 이야기 도대체 어디서 들었니?”
이렇게 말대꾸하는 사람이 논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일체의 권위가 전복된 불신의 시대이다. 타인의 권위를 빌리기 보다는 차라리 당당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좋다.
소년시절 필자에게 최고의 권위는 만물박사였던 큰형님이었다. 『우리 큰형이 그러던데 말야!』 하고 친구들 앞에서 말을 꺼내곤 했다. 노무현소년에게 최고의 권위는 법대를 졸업한 노영현형님이었다. 노무현에게 형님은 교장선생님보다도 높은 분이다. 큰형님 믿고 기어이 사고를 친다.
중학교에 입학할 돈이 없자 어머님이 학교를 방문하여 교감선생님께 애원한다. 여름에 복숭아를 수확하면 갚기로 하고 학비를 외상으로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교감선생님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화가 난 노무현소년은 겁도 없이 교감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입학원서를 박박 찢어버린다.
큰형님이 해결사로 나서서 겨우 입학을 허락받게 된다. 노무현의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났을까? 교감선생님이라면 감히 정면으로 쳐다보기도 어려운 높으신 분이다. 노무현은 농사일이나 하라는 교감선생님께 『그럼 교감선생님은 아들 공부 왜 시킵니까?』하고 따질 수 있는 당돌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질은 1학년 2학기 작문 수업때의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작문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으로 이어진다. 급우들을 선동하여 백지를 그대로 내기로 하고 제목만 써서 제출했는데 제목이라고 쓴 것이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택도 없다』는 말이다. 이 일로 1주일간 정학을 당한다.
운동권 출신 중에는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만 아는 모범생이었는데 대학생이 되어 선배들 손에 이끌려 의식화가 되어 처음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이런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이 경우 반드시 변절한다.
노무현소년은 중학교 1학년 때 이승만정권을 독재정권으로 규정할 정도의 식견이 있었다. 한 인간의 격은 열다섯살을 전후로 하여 완성되는 법이다. 어려서 없는 식견이 나중에 생긴다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다.
15살이 되어서도 철이 들지 못하면 영원히 철 들 수 없다. 한 인간의 정신은 15살 무렵에 완성되는 것이며 그 후의 모든 성과는 열다섯살에 얻은 것을 반복적으로 표절하는 것에 불과하다. 필자는 15살 이후 사상과 이념과 세계관을 바꾼 적이 없다.
대부분의 소설가는 15세 때 쓴 자기의 글을 평생동안 표절한다. 대부분의 시인은 15세 때 습작으로 쓴 시를 일생동안 반복하여 복제한다. 인생은 부단한 자기복제, 자기표절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 모든 것은 15세를 전후로 완성되어야 한다.
젊었을 때 박정희를 추종하다가 뒤늦게 철들었다는 박찬종, 한때 민정당에서 활동하다가 뒤늦게 바른 길로 돌아왔다는 김원웅, 재벌로 잘 살다가 갑자기 진보주의에 관심이 생겨 한국의 케네디가 되겠다는 정몽준, 이런 류의 인간은 결코 믿을 수 없다.
15살에 철들지 못하면 영원히 철들지 못한다. 대학생이 되어서 뒤늦게 세상에 눈떴다고 말하는 운동권 출신들은 대개 변절한다. 만약 변절자가 아닌데도 15살 이후에 뒤늦게 철들었다는 사람이 있다면 자기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미화하기 위하여 꾸며낸 경우다. 이거 알아야 한다.
덧글..
자서전에 묘사된 노무현의 여러 일화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참으로 순진한 경우다. 첨에는 몰랐는데 변호사 하면서 운동권 애들과 어울리며 비로소
세상에 눈떴다는 식의 포장된 전설에 속아넘어간다면 닭쫓던 정몽준 되고 개털된
이회창 꼴 난다. (하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