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중학생 때 까지는 Ung-Jin Kim 과 같은 소리를 했소.
아직도 조금 남아있소.
한번씩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모든 것을 해체한 다음 재구축해야 하오.
초딩 때 필요한 거 = 철저한 의심, 철저한 부정,
중딩 때 필요한 거 = 의심에 대한 의심, 부정에 대한 부정.
감사합니다. 뭔가 좀 뻥 뚫리네요 ^^
아기 때는 누구나 다 제왕입니다.
천동설의 세계.. 우주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내가 1을 내놓으면 나머지 99를 맞춰와서 100을 완성시키는 세계.
'그것까지 일일이 내가 신경써야 되겠어요?' 하고 톡 쏘아붙이면 다 되는 그네의 세계.
하품만 해도 죄다 자지러지고 옹알이만 해도 박수를 받는 세계.
그림이라고 그려놓으면 미래의 피카소가 되는 세계.
건반에 손가락만 올려도 박수갈채 나와주시고.
그러나 대반전.
천동설은 무참히 깨지고
나는 변방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99를 준비해도 단 1이 부족하다고 퇴짜를 맞습니다.
상처를 입는 거죠.
어른이 되면 또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다시 주관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아기 때의 그 주관은 아닙니다.
자기가 창의한 작품 안에서는 자신이 우주의 주인입니다.
소통이라는 관점이 열리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엇인가?
아기는 식물과 같습니다.
내가 갈 수 없으므로 상대방이 내게로 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겁니다.
항상 '네가 내게로 와라'고 요구하는 거.
백혈병 걸린 소녀.. 침대에 누워서 꼼짝 안함.
누구라도 한 번쯤은 꿈꾸어 본다는 백혈병 걸린 소녀가 되는 판타지.
이를 위해 일부러 자기 다리를 분질러 버리는 사람 참 많죠.
그러나 한번 대문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집은 주관적인 세계이나 길은 객관적인 세계입니다.
공유된다는 거죠.
담은 집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게 아니고 동시에 길을 보호하기 위해 있습니다.
공유되는 것만이 진실하다는 거죠.
주관이든 객관이든 중학생까지.
주관과 객관은 공간을 보는 관점입니다.
시간을 보는 관점을 획득하면 완전히 다르게 되죠.
주관의 집은 독점되고 객관의 길은 공유됩니다.
사건은 독점되는 것도 공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김연아의 연기는 독점되는 것도 아니고 공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각자 아는 만큼 가져가는 거죠.
개가 김연아의 연기를 보았다.
무엇을 얻었을까요?
일베충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김연아의 연기를 보고 거기서 무엇을 얻어가는 가는 각자의 주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관은 아기의 그 주관과는 다릅니다.
아기의 주관과 다른 그 주관이 바로 관계의 세계인거죠.
부처의 씨앗이 내 안에 있다고 하면 소승이고, 시간 속에서 하늘의 태양과 땅의 거름과 그 사이의 비를 만나 싹을 티워 꽃을 피우는 것이라고 하면 대승인거고.
그렇게 관계 속에서 만나는 만큼 우리는 완전성의 세계를 누리는 겁니다.
참으로 열린, 장엄한 세계상이죠.
주관은 자기 안에 에너지가 있습니다.
아기 때는 다들 자기한테 복종하니까 내 안에 뭔가 센게 있는 거죠.
객관은 자기 안에 에너지가 없습니다.
물과 햇볕을 받아야만 자랄 수 있는 식물처럼
자신이 다른 것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일단 아빠가 돈을 벌어와야 가정이 유지되는 거고.
주관이든 객관이든 공간의 사정입니다.
시간으로 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열립니다.
호스 끝을 잡고 있으면 안에서 수압이 높아집니다.
끝을 놓는 순간 쾅 하고 터져나오는 거죠.
에너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태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군주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호스 끝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것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예술이라는 거죠.
코페르니쿠스의 원리 라는 재미있는 원리가 있습디다.
현존하는 어떤 것이 지금 상태로 계속 존재할 확률을 95 % 신뢰도로 예측한다면, 그것이 지금까지 존속해 온 시간의 1/3 에서 3 배 사이의 어떤 싯점(물론 미래에) 까지이다 라는 것인데요....
최근 마음 아픈 사람을 앞에 두고 그 정신을 분해하려는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따뜻한 한 마디 위로면 충분했을 텐데.
물론 저는 객석을 벗어났고, 그들은 여전히 무대에 남아 떠들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