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러분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릇'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금 여러분의 눈 앞에는 커피잔이 하나 놓여 있다. 커피잔은 하나의 그릇이다. 그릇에는 내용물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한 잔의 커피다.

잘 살펴보라!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 또한 하나의 그릇이다. 여러분의 몸뚱이는 그 '옷'이라는 이름의 그릇에 담겨져 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일종의 그릇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우선 가까이에서 책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책장'은 '책'을 담고 있는 하나의 그릇이다.

책장이라는 이름의 그릇 안에는, '책'이라는 이름의 내용물이 담겨져 있다. 그런데 그 책장의 내용물로 담겨있는 책 또한 알고보면 하나의 그릇이다. 그 책이라는 그릇에는 '페이지'라는 내용물이 들어있다.

그 '페이지'라는 그릇에는 '글자'라는 내용물이 담겨져 있다. 그 '글자'라는 그릇에는 '의미'라는 내용물이 담겨져 있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이 하나의 그릇이라면, 그 그릇에 담겨진 내용물은 여러분의 몸뚱이이다. 그 몸뚱이라는 이름의 그릇은 '정신'이라는 내용물을 담고 있다.

그 정신 또한 생각이란 내용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그 생각 또한 의식이라는 내용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겹겹이 포개어져 있다.

이렇듯 세상은 온통 그릇이다. 그릇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차원의 어떤 그릇에 담겨진 내용물이기도 하다. 그 내용물 또한 또 다른 뭔가를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이렇듯 세상은 우주라는 커다란 그릇 안에 은하계와 태양계와 지구라는 작은 그릇이 담겨져 있고, 그 지구라는 작은 그릇 안에 더 작은 그릇들이 무수하게 포개져 있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더 작은 어떤 것을 담고 있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더 큰 어떤 그릇에 담겨져 있는 내용물이라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알지 못했다면 퍼뜩 '깨달아'야 한다.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

왜 이러한 사실을 '알아라!' 혹은 이러한 내용을 '배워라!'라고 말하지 않고 '깨달으라'고 말하는가? 왜 앎과 깨달음이 구분되어야 하는가? 여러분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 세상은 그릇과 그 그릇에 든 내용물로 되어 있다. 그릇에 든 내용물은 동시에 다른 차원의 내용물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세상은 이렇게 겹겹이 포개어진 구조로 되어 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배우고 기억한다면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여러분은 위 내용에서 먼저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여야 한다. 하나의 닮은 꼴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패턴이 여러분의 두뇌구조 자체를 반영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여러분의 두뇌구조 또한 '그릇과 내용물의 겹겹이 포개어진 구조'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깨닫는다는 것은 여러분의 두뇌 속에서의 인식체계를 이러한 세상의 구조와 호환되는 상태로 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본질은 호환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는가이다.

깨닫지 못하고 그냥 안다는 것은 예의 밝혀진 패턴들에 기호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언어화하여, 두뇌의 어떤 그릇 안에 저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보는 저장된다. 그릇에 든 내용물로 저장된다. 깨달음은 저장되는 것이 아니다. 호환시키는 것이다. 연동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접속되는 것이다.

컴퓨터에 비유하자. '윈도'라는 OS를 가동하면 '폴더'라는 그릇이 나온다. 그 '폴더'라는 그릇 안에는 '파일'이라는 내용물이 들어있다. 그 파일 역시 하나의 폴더이다. 그 파일이라는 폴더 안에는 또 '정보'라는 내용물이 들어있다.

이상에서 여러분은 컴퓨터의 운영체계가 폴더라는 그릇과, 파일이라는 내용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파일이라는 내용물 또한 하위단계의 내용물을 저장하는 하나의 폴더가 된다는 점을 알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릇과 내용물이 겹겹이 포개어진 구조로 되어 있듯이, 컴퓨터 또한 폴더와 파일이 겹겹이 포개어진 구조로 되어있다. 여러분의 두뇌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공통되는 것은 '패턴'이다.

'패턴'의 어원을 알아보면 pattern에는 '아버지를 닮는다'는 뜻이 있다. 그릇은 아버지이며 그 그릇에 담겨진 내용물은 아들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닮았다.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두뇌라는 하드웨어와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 역시 이러한 '닮은 꼴' 구조로 되어 있다. 그 두뇌를 가동하는 인식체계라는 OS 역시 이러한 '닮은 꼴' 구조로 되어있어야 한다.

컴퓨터는 하드웨어라는 그릇에 담겨진 소프트웨어라는 내용물로 구성되어있다. 소프트웨어라는 내용물은 동시에 운영체계라는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의 두뇌도 하나의 컴퓨터이므로 인간 두뇌의 인식체계 역시 무수한 폴더와 파일들이 겹겹이 쌓인 구조로 되어있다.

인간이 사물을 지각하고 그 지각을 고도화 하여 인식을 이루어내는데 성공하는 것은 이들 상호간에 호환성이 있기 때문이다.

깨닫는다는 것은 이들 상호간의 호환성을 알아채고 이들을 서로 연동시킨다는 것이다. 이때 무엇이 필요한가? 접속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만약 이들의 상호간의 호환성을 활용하여 우주의 정신과 접속하는데 성공한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한 사람의 인간과 그 두뇌는 단지 하나의 고립된 컴퓨터에 불과하다. 컴퓨터들이 네트워크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있듯이 나의 의식과 정신 역시 세상과 네트워크를 이루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나는 깨달음을 주장한다. '깨달음'은 이 사회에 던지는 나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나의 주장이고 이념이고 사상이다. 우리 다 함께 '깨닫자'고 세상에 대고 외치어 알리는 것이다.

요는 내가 깨달은 바 어떤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사실'은 어떤 하나의 '특수'한 사실이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점은 그 '특수성'이다.

내가 주장하는 깨달음은 그 특수성에 맞서는 '보편성'이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어떤 보자기에 든 내용물이 아니라 그 내용물을 담는 보자기 그 자체이다.

보자기는 일정한 형태가 없다. 그 보자기에 어떤 내용물을 담는가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은 어떤 특수성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무규정성이 곧 보편성이다.

보편성이냐 특수성이냐는 간단히 그 보자기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그 보자기에 담긴 내용물을 의미하는가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면 그 사실은 시, 공간 안에서의 '특수성'이다. 그 '사실'을 담는 보자기가 바로 보편성으로서의 '깨달음' 그 자체이다.

어떤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그 자체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말해지는 그 문장에서 깨달음이 '주어'가 아니고 '술어'로 기능하는 한 깨닫지 못한 것이다.

여기까지에서 여러분은 '깨달음'이란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하나의 보자기임을 알게 되었다.

비유하자면 어떤 소프트웨어든지 구동할 수 있는 하나의 운영체제임을 알게 되었다. 특정한 미션이 주어진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구동하는 두뇌 안의 OS임을 알게 되었다.

조심해야 한다. 프로그램을 담는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보자기 자체를, 어떤 보자기에 든 하나의 내용물로 착각하는 것이다. 내용물은 특수성이며 보자기는 보편성이다. 보편성의 성립을 입증하는 것은 호환성이다.

진리는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이다. 얼마든지 속임수와 착각이 개입할 수 있다. 호환성의 여부를 판별하여 속임수와 착각을 걸러낼 수 있다. 호환된다면 보편적인 것이며 호환되지 않으면 특수적인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색은 그 그릇에 담겨진 내용물을 의미한다. 공은 그 색을 담는 그릇을 의미한다. 공은 보편성이며 색은 특수성이다. 그러나 그 색 역시 더 낮은 단계의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므로 결론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허나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 순환논리의 오류가 개입할 여지가 있다. 깨닫지 못하는 한 대부분은 사람들은 순환논리의 미로 속에 갇혀버린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더 작은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면서 더 큰 그릇에 담겨진 내용물이다. 그러나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는 없다. 결코 순환되지 않는다.

앞의 색과 뒤의 색은 구분된다. 앞의 공과 뒤의 공은 같으면서 다르다. 바퀴가 돈다면 바퀴축은 돌지 않는다. 바퀴축이 돈다면 차는 돌지 않는다. 차가 돈다면 길은 돌지 않는다. 순환되는 듯 순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회전이 아니라 패턴이다.

반복되는 것은 패턴이다. 패턴은 반복되지만 일(기능)은 반복되지 않는다. 정보는 언제나 폴더에서 파일로 일방통행이다. 정보전달의 순서는 운영체제에서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램에서 폴더로, 폴더에서 파일로 일방통행한다. 그 역은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금강경의 구절은 하나의 힌트일 뿐이다. 회전되어서 안되고 환원되어서 안되고 순환되어서 안된다. 그것은 바퀴처럼 보이지만 바퀴가 아니라 엔진이다. 엔진이므로 일을 한다.

금강경의 메시지는 진리에 관한 것일 뿐 진리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에 관한 것일 뿐 깨달음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두뇌의 운영체제를 가리키고 있지만, 그 운영체제의 작동원리대로 기능하고 있지 아니하다.



[왜 깨달아야 하는가?]

깨달음의 직접적인 효과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점이다. 생각을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깨닫는 것이 깨닫지 못하는 것 보다 낫다.

셈을 모르는 사람과 셈을 아는 사람은 명백히 차이가 있다. 구구단을 왼 사람과 외지 못하는 사람은 명백히 차이가 있다. 더 쉽게 생각을 풀어내고 더 쉽게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고 더 쉽게 정답을 알아챈다.

그것은 윈도의 작동원리를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의 차이와 같다. 윈도의 작동원리를 몰라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 마우스를 사용할 줄 몰라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윈도의 작동원리를 안다면 마우스의 사용법을 안다면 우리는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깨닫는다는 것은 고립된 컴퓨터가 인터넷을 통하여 연결되므로 하여 그 기능이 확장되는 것과 같다. 우물 속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나온 것과 같다.

고립된 개인의 정신이 우주의 정신과 교감하므로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여기서 '우주의 정신'이란 표현을 신비주의적으로 이해해서 안된다.

그것은 시대정신일 수도 있고 역사의 흐름일 수도 있고 문명의 본질일 수도 있다. 신일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일 수 있다.



[최종결론]

'나'라는 존재, '에고'라고 말해지는 것, '자아(自我)'라는 것이, 혹은 나의 '자의식'이 우주와, 세상과, 문명과, 역사와, 격리된 채 고립되지 않고, 우주라는 보자기 안에서의 나, 세상이라는 그릇 안에 든 하나의 내용물로의 나, 역사라는 폴더 안에서의 하나의 파일로서 기능하는 나, 신이라는 방송국과 연동된 하나의 라디오로서 울림과 떨림을 전달하는 나, 그러한 나의 주어진 바 소임과 그 위상관계를 알아채고 실천함에 있어서 그 실천적인 측면, 즉자적인 측면을 특별히 구분하여 깨달음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라디오는 라디오가 아니다. 실천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한 것이다. 깨달음이 앎과 구분되는 것은 고립되지 않고, 세상이라는 거대한 네트워크에 연동되어 있은 즉,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가능성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실천할 수도 있고 실천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깨닫지 못한 것이다. 우주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어서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다면 깨달은 것이다.

버스가 내용물이라면 정거장은 폴더이다. 나(自我)는 버스가 아니라 정거장의 역할을 한다. 울림과 떨림을 역마다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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