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하우에서 옮김
아래 강정미님의 '예감-오아시스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을 보고'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임권택과 이창동은 격이 다르다.
임권택의 영화는 수상을 노리고 아부용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런걸 오리엔탈리즘이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문명의 급격한 진보에 현기증을 느낀 백인종들이, 동방의 어떤 미개척지에서 이상향 샹그릴라를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는 스토리다.
동양은 서구화하지 말고 문명화하지도 말고 개발하지도 말고 언제까지나 태고적의 신비한 모습 그대로 있어조야만 서구문명이 몰락하면 필요할 때 쳐들어와서 맘껏 약탈하고 착취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가 이런 이야기다.
말하자면 동방은 오염시키지 말고 잘 건사해 두었다가 백인종 주인님들을 맞이할 주말농장 쯤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아부용영화를 만들어 뜬 사람이 중국의 장예모감독이다.
뭐 이렇게 말한다고 장예모의 영화가 엉터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는 좋다. 다만 중국인들은 리안감독의 와호장룡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와호장룡이 중국인을 얼마나 욕보이고 있는지 한국 관객들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물론 중국인들은 장예모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인을 경멸하여 영화제수상을 따내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좀 미묘하다. 여기서 필자는 '중국인을 경멸하여' 라고 표현했지만 장예모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일당독재를 비판하여'가 되므로 해석하기에 따라 장점이 돋보일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장예모의 영화가 걸작인 것은 사실이나(인정할건 인정해야쥐)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여간 임권택의 취화선은 백인들에게 "앗! 한국에도 이런 멋진 주말농장이 있다니. 거기 아가씨도 예쁘겠지. 놀러갈까 보다" 이런 놀라움을 던져주고 수상했다. 이건 간과 쓸개를 팔아먹은 거다.
오해는 마시기 바란다. 임권택의 영화가 태작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명영화제가 기본도 안된 영화에 상을 주지는 않는다. 정일성의 촬영은 좋다. 영화가 나쁜건 아니다. 다만 처음부터 수상을 노리고 만든 아부용 모범답안이라는 것이 불쾌할 뿐이다.
이창동의 영화는 솔직히 필자의 취향은 아니다. 씨네21은 유명평론가 4인을 불러 찬반의 글을 싣기로 했으나 반대파가 없어서 기획은 실패했다. 4인의 아부성 평론만 실었는데 읽을만한 것은 없었다.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과연 '소수자의 입장에서 본 바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아서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오아시스는 보이는 부분만을 묘사했을 뿐이다.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본 장애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필자는 아직 그러한 관점에서 바른 시선을 가진 한 명의 작가를 지구상 어디에서도 발견한 바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를 말한다면 소수자의 정의는 다수에 편입하거나 적응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히 대립하며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전선을 형성하는데서 얻어진다. 소수자의 위신은 다수그룹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같은 소수자그룹 안에서 자가발전으로만 얻어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아시스의 인식은 낮은 단계의 것으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 보이는 부분을 보았을 뿐 이면을 헤집지는 못했다. 동정과 연민을 이끌어내었을 뿐 전선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론적으로 취화선은 잘만든 이류다. 오아시스는 최고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즉 2프로 부족한 일류다.
영화이야기는 고만하고 명계남이 오아시스의 제작자다. 모든 신문이 명계남의 인터뷰를 싣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명계남의 인터뷰를 싣기는 글렀다. 안티조선을 선언한 노무현의 세력들은 아직 역사의 무대에서 그 전면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0년 후면 어떨까? 지금 조선일보와의 인터뷰거부를 선언한 지식인들이 인터뷰를 안해조도 조선일보가 아쉬울거 없지만 10년 후는 달라진다. 그 때는 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다. 이 싸움 오래간다.
달걀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지지 않으면 바위가 깨질 때 까지 달걀을 내려친다. 이것이 역사의 방법이다.
아래 강정미님의 '예감-오아시스의 베니스 영화제 수상을 보고'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임권택과 이창동은 격이 다르다.
임권택의 영화는 수상을 노리고 아부용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런걸 오리엔탈리즘이라 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문명의 급격한 진보에 현기증을 느낀 백인종들이, 동방의 어떤 미개척지에서 이상향 샹그릴라를 발견하고 쾌재를 부른다는 스토리다.
동양은 서구화하지 말고 문명화하지도 말고 개발하지도 말고 언제까지나 태고적의 신비한 모습 그대로 있어조야만 서구문명이 몰락하면 필요할 때 쳐들어와서 맘껏 약탈하고 착취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좋은가 이런 이야기다.
말하자면 동방은 오염시키지 말고 잘 건사해 두었다가 백인종 주인님들을 맞이할 주말농장 쯤 된다는 이야기다. 그런 관점에서 아부용영화를 만들어 뜬 사람이 중국의 장예모감독이다.
뭐 이렇게 말한다고 장예모의 영화가 엉터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는 좋다. 다만 중국인들은 리안감독의 와호장룡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와호장룡이 중국인을 얼마나 욕보이고 있는지 한국 관객들은 모른다는 이야기다.
물론 중국인들은 장예모의 모든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인을 경멸하여 영화제수상을 따내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좀 미묘하다. 여기서 필자는 '중국인을 경멸하여' 라고 표현했지만 장예모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일당독재를 비판하여'가 되므로 해석하기에 따라 장점이 돋보일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장예모의 영화가 걸작인 것은 사실이나(인정할건 인정해야쥐) 오리엔탈리즘의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여간 임권택의 취화선은 백인들에게 "앗! 한국에도 이런 멋진 주말농장이 있다니. 거기 아가씨도 예쁘겠지. 놀러갈까 보다" 이런 놀라움을 던져주고 수상했다. 이건 간과 쓸개를 팔아먹은 거다.
오해는 마시기 바란다. 임권택의 영화가 태작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유명영화제가 기본도 안된 영화에 상을 주지는 않는다. 정일성의 촬영은 좋다. 영화가 나쁜건 아니다. 다만 처음부터 수상을 노리고 만든 아부용 모범답안이라는 것이 불쾌할 뿐이다.
이창동의 영화는 솔직히 필자의 취향은 아니다. 씨네21은 유명평론가 4인을 불러 찬반의 글을 싣기로 했으나 반대파가 없어서 기획은 실패했다. 4인의 아부성 평론만 실었는데 읽을만한 것은 없었다.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과연 '소수자의 입장에서 본 바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아서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오아시스는 보이는 부분만을 묘사했을 뿐이다.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본 장애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필자는 아직 그러한 관점에서 바른 시선을 가진 한 명의 작가를 지구상 어디에서도 발견한 바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를 말한다면 소수자의 정의는 다수에 편입하거나 적응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히 대립하며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전선을 형성하는데서 얻어진다. 소수자의 위신은 다수그룹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같은 소수자그룹 안에서 자가발전으로만 얻어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아시스의 인식은 낮은 단계의 것으로 분명한 한계가 있다. 보이는 부분을 보았을 뿐 이면을 헤집지는 못했다. 동정과 연민을 이끌어내었을 뿐 전선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론적으로 취화선은 잘만든 이류다. 오아시스는 최고 단계에는 미치지 못한 즉 2프로 부족한 일류다.
영화이야기는 고만하고 명계남이 오아시스의 제작자다. 모든 신문이 명계남의 인터뷰를 싣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명계남의 인터뷰를 싣기는 글렀다. 안티조선을 선언한 노무현의 세력들은 아직 역사의 무대에서 그 전면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10년 후면 어떨까? 지금 조선일보와의 인터뷰거부를 선언한 지식인들이 인터뷰를 안해조도 조선일보가 아쉬울거 없지만 10년 후는 달라진다. 그 때는 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 있다. 이 싸움 오래간다.
달걀로 바위를 쳐서 바위가 깨지지 않으면 바위가 깨질 때 까지 달걀을 내려친다. 이것이 역사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