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메트릭스는 적이다. 성소는 아군이다. 그러므로 성소를 옹호한다.

영화는 예술이다. 예술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영화가 예술인 것은 아니다. 극소수의 새로운 영화만이 그러하고 대부분의 영화는 하나의 문화상품에 불과하다.

다수 대중의 판단이 옳다고들 한다. 다수가 '성소'를 부인하였으니 성소는 가치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하라! 대중의 판단이 늘 옳다면 어찌 에스트라다 같은 얼뜨기가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겠으며, 한국의 에스트라다인 정몽준이 대통령출마를 결행하였겠는가?

다수의 판단은 늘 옳지 않다. 다수의 판단이 옳지 않기 때문에 히틀러에게도 한번쯤 권력이 가는 것이며, 한국의 히틀러라 할 박정희나 그 부류에 속하는 이회창씨나 미국의 히틀러로 일컬어지는 부시에게도 기회가 가는 것이다. 이렇듯 대중의 판단은 늘 옳지 않다.

대중의 판단이 옳은 경우도 많다. 상품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좋지 않은 상품은 시장이 알아서 퇴출시키는 법이다. 그러나 시장이 예술을 알아본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전혀 없다.

예술과 시장은 원래 궁합이 맞지 않다. 시장은 늘 예술을 퇴출시켜 왔고, 예술은 늘 시장에 도전해 왔다.

TV진품명품인가 하는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있다. 5억이나 하는 작은 도자기와 10억이나 하는 서예작품이 있다. 그것이 5억이나 10억의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감식안은 만에 하나도 안된다. 대한민국을 통털어 100명도 안된다. 대중의 판단은 늘 옳지 않다.

고흐는 1000여점을 그렸으나 한점의 그림도 팔지 못하고 상심한 끝에 자살했다. 이중섭은 경찰이 전시회의 그림을 강제로 철거하자 식사를 거부하여 죽었다. 누가 고흐를 죽이고 이중섭을 죽였는가? 대중의 안목이 예술가를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중이 판별해내지 못하는 그 예술이란 무엇인가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예술은 정치다. 그러므로 대중은 절대로 예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정치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른바 순수예술지상주의다. 역시 정치다. 그들은 현 정치정세와 거리를 두고 순수하게 정치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예술은 정치다. 그러므로 예술은 투쟁인 것이며 예술은 언제나 사회와 충돌하는 것이며 대중은 늘 예술가의 적인 것이다.

석가탑의 미를 발견하였는가? 어떤 사람이 석가탑을 한번 보고 "이야! 멋진 예술이구나"하고 감탄한다면 100프로 거짓말이다. 교과서에 묘사된 석가탑의 미는 절대로 거짓이다. 석가탑의 미는 전국의 사찰에 흩어져 있는 불탑들을 최소한 50여기 이상의 보고와야 눈꼽만큼 볼일락말락한다.

문화유산답사기의 유홍준님 말마따나 '아는 만큼' 보인다. 알지 않으면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1500년전 신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신라인들은 소박했다. 해 뜨면 일어나 밭 갈고 해 지면 돌아가 밥 먹고 잤다. 어느 날은 왕이 관리를 보내 세금을 내라 한다. 전쟁을 하자고 꼬드긴다. 왜? 왜 세금을 내야 하고 왜 전쟁을 해야하는가?

석가탑의 미는 질서와 균형이다. 그 질서와 균형은 수학 속에 들어있다. 왕이 수학교과서를 보여주면 백성이 납득할 것인가? 눈에 보이는 수학이 필요하다.

석가탑은 수학교과서 속에 숨어있는 질서와 균형을 교과서 밖으로 집어 낸 것이다. 그제서야 백성은 왜 세금을 내야 하는지 왜 전쟁을 해야하는지를 납득한다. 왕이 독점하고 있는 수학이라는 괴물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 채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정치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예술이 정치가 아니라고 말할까? 그 정치는 500년이나 천년쯤 지나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은 적어도 천년을 내다보는 원대한 정치다. 그러므로 차라리 정치가 아니라 순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렸다.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 옆에 벌거벗은 하느님이 있다. 하느님이 누드를 선보이다니 골 때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교황과 충돌한다.

미켈란젤로는 왜 당시의 최고권력자인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벌거숭이 하느님을 그렸을까?(교회는 미켈란젤로 사후 덧칠로 하느님의 치부를 가렸다)

필자가 장선우를 옹호하는 것은 그의 정치를 옹호하는 것이다. 매트릭스가 재미있는 건 가상현실임을 밝히지 않고 시작했다가 나중 관객의 뒷통수를 치기 때문이고, 성소가 재미없는 것은 가상현실임을 사전에 밝혀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숨은 정치를 옹호하는 것이다.

정치는 간단하다. 적이냐 아니면 동지냐이다. 적이면 적, 동지면 동지 이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사리는 분명하다. 장선우가 동지이므로 옹호한다. 이렇듯 명쾌하다.

매트릭스는 가상현실을 비난하고 있다. 가상현실은 전체주의 국가의 비유다. 북한 주민들은 세뇌되어 있다. 북한 주민들은 "사회주의 안에서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말하지만 가짜다.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속고 있다.

필자는 북한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정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에서 왕따시키며 이지메를 가하는 헐리우드의 획일적인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려는 것이다.

공룡이 왜 멸종하였는가? 종의 유전적 다양성이 죽었기 때문에 멸종한 것이다. 소행성이 충돌한다. 환경이 변한다. 획일화되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는다.

미국이 세계를 획일화시키려 들고 있다. 헐리우드가 그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기수가 매트릭스다.

매트릭스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는 다원주의다. 동양에서 최초의 다원주의는 유교주의의 획일화에 저항한 도교사상이다.

후대에 도교는 현실도피적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도교의 비난받아야 할 부분이다. 변산공동체 교장 윤구병선수의 실험은 현실도피적이다. 그렇다 해서 누가 윤구병선생을 비난할 것인가?

기독교는 저항의 종교다. 로마의 획일주의에 저항했다. 후대에 와서 기독교는 변질되었다. 기독교가 획일화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의 잘못일 뿐 예수의 잘못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저항 그 자체였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왕실불교나 호국불교는 획일주의다. 그러나 그 출발은 저항이었다. 도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그 첫 출발점은 저항이었다. 그 저항의 대상은 획일주의다.

매트릭스는 획일주의다.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고 있다. 가상현실이 악이고 현실이 선이며 선인 현실이 악인 가상현실을 파괴한다는 줄거리다. 즉 선인 미국이 악인 북한과 이라크와 이란을 응징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야 한다. 물론 북한을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북한 역시 획일주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획일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성소'의 시스템은 그 획일주의를 상징한다. 성소는 시스템과 싸운다. 획일주의와 싸운다. 매트릭스도 역시 그 획일주의(전체주의)와 싸운다.

그러나 매트릭스는 그 획일주의와 싸운다는 저항집단 역시 획일주의다. 획일주의로 획일주의를 치고 전체주의를 반대한다는 논리로 전 지구를 전체주의화 하려든다.

히틀러는 스탈린과 싸운다. 스탈린의 전체주의에 저항한다면서 전 지구를 전체주의화 하려든다. 이건 가짜다. 우리편이 아니다. 적이다.

간단하다. 동지냐 적이냐? 아군이냐 적군이냐? 이것이 논리다. 매트릭스는 적이고 성소는 아군이다. 결론은 명쾌하다. 적은 친다. 아군은 돕는다. 이 외에 다른 논리는 없다.

왜 헐리우드를 반대하는가? 왜 헐리우드의 반대편에 성소를 자리매김하는가? 매트릭스는 전체주의를 반대한다면서 전체주의로 맞서고 있다. 북한의 전체주의를 반대한다면 전 지구를 전체주의화 하려들고 있다.

성소는 시스템에 저항한다. 매트릭스도 시스템에 저항한다. 시스템에 저항하는 주인공 주와 희미 역시 전체주의집단이 아닌가이다. 매트릭스에서는 저항집단 역시 전체주의였다. 이 본질은 속일 수 없다.

성소는 끝없는 자기부정의 연속이다. 성소는 영화이면서 영화임을 부정하고 게임이면서 게임임을 부정한다. 심지어는 그 영화를 만든 튜브엔터테인먼트 회사까지 박살을 낸다. 관객들은 그러한 자기부정을 싫어한다.

주는 이름 그대로 구세주이다. 그러나 구세주임을 거부하는 구세주이다. 나는 구세주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구세주이다.

왜? 우리 모두가 구세주가 되지 않으면 주는 세상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혁명은 아래로부터여야 한다.

모두가 부처가 될 때 한 명의 부처가 탄생하는 것이며 모두가 예수가 될 때 한 명의 예수는 재림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날 짠 하고 나타나는 구세주는 없다. 그런 구세주는 결단코 오지 않는다. 왜? 구세주는 전체주의 아래 신음하는 백성을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구세주가 짠 하고 포옴잡고 나타난다면 그 구원된 천국 역시 전체주의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라!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여 마침내 낙원에 다다르고 천국에 이르면 그 천국은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국에는 악이 없다. 범죄가 없다. 도둑도 없다. 사기꾼도 없다. 그렇다면 천국은 곧 전체주의 공산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더란 말인가?

그대가 바라는 천국은 범죄도 없고 매매춘도 없고 도둑도 없고 경찰도 없는 전체주의사회이다. 그대는 전체주의의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재미없는 것이다.

그대는 성소를 싫어한다. 성소는 자기부정의 연속이다. 자신을 창조한 튜브엔터테인먼트에 기관총을 난사하는 신은 자신의 출생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내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대는 그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그것이 좋은 것이다.

멋진 반전의 무기가 되는 고등어(전자총)는 장난감 같다. 그러나 추풍낙엽은 장난감 같아야 진짜이지 진짜 같으면 가짜가 아닌가고 응수한다. 그 장면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재림예수가 예수님처럼 짠 하고 서울에 나타났다면 사이비종교집단의 교주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처럼 오지 않는다.

재림 예수는 여자일지도 모른다. 재림 예수는 흑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무적의 고등어는 장난감 같아야 한다. 그 장면에서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그대는 이 영화의 관객으로서는 자격미달이다.

물론 그대의 잘못은 아니다. 관객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못하고 난해한 영화를 만든 감독의 잘못이다. 감독을 비난해도 좋다. 그러나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는 아군이다. 적이 아니다.

마이너리티리포트는 재미가 있다. 그러나 적이다. 우리편이 아니다. 마이너리티리포트 역시 전체주의적인 방법으로 전체주의를 깨고 있다. 과학만능주의를 비난하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빛나는 미국의 과학기술을 홍보하고 있다.

가짜다. 속임수다. 거짓말이다. 속지 말라! 마이너리티리포트를 보고 결말부분에서 조금도 역겨움을 느끼지 못한 관객과는 적어도 친구가 될 수 없다. 이건 진실이다.

마이너리티리포트의 표면적인 메시지는 전체주의를 비난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3류 포르노잡지가 매매춘을 비난하는 방법으로 성을 상업화하는 것과 같다. 속임수다.

스포츠신문이 시중에 나돈다는 가짜 C양 비디오를 비난하는 방법으로, C양 비디오를 홍보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들은 C양비디오를 촬영한 범죄자를 비난하고 있지만 목적은 널리 홍보하자는 것이다. 그건 속임수다. 가짜다. 욕나온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아무리 재미가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아군이 아니라 적군인데! 람보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면 뭣하는가?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백인종 람보가 왜소한 몸집을 가진 황인종인 그대를 죽이러 왔는데!?

100억을 쓰면 어떤가? 적군을 물리치겠다는데.

멋진 적군과 허접한 아군이 있다면 그대는 멋진 적군의 품에 안길 것인가 허접한 아군의 도움을 바랄 것인가?

끝끝내 진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쓸쓸하다. 이 순간 나는 우울하다. 한 명의 동지를 발견하기가 이다지도 힘들다는 말인가?


덧붙이는 글-
필자는 이 영화가 어째서 구도영화의 완성인지를 장황하게 이야기하려 했다. 그러나 싫어졌다. 독자들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울하다. 그러나 단 한 명의 들을 귀 있다면 결론만 간단히 말하겠다.

전체주의로 전체주의를 치는 가짜는 많이 나왔다. 장애자를 놀려먹으며 장애자를 돕는 오아시스도 나올만큼 나왔다. 폭력을 반대한다며 폭력을 휘두르는 공공의 적도 나올만큼 나왔다.

가짜는 시장에 넘친다. 진짜는 없다. 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씨가 말랐다. 필자가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다. 진짜냐 가짜냐이다. 아무리 멀쩡해도 진품이 아니면 쳐주지 않는다.

구도의 논리는 간단하다. 깨달아서 부처가 된다면 거짓말이다. 예수가 짠하고 재림한다면 거짓말이다. 전체주의를 조장한다.

초인은 없다. 기다리는 초인은 어디에서도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초인이어야 한다.

왜 구원이 필요한가? 전체주의를 깨기 위해서다. 전체주의로 전체주의를 깬다면 가짜다. 이몽룡의 폭력으로 변사또의 폭력을 응징한다면 가짜다. 람보의 폭력으로 베트콩의 폭력을 응징한다면 가짜다. 노동자의 폭력으로 공권력의 폭력을 응징한다면 가짜다.

곧 죽어도 진짜여야 한다. 성소는 자기부정의 연속이다. 자신의 자궁인 튜브엔터테인먼트부터 박살내놓고 시작한다. '주'인데도 끊임없이 나는 '주'가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초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예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진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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