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을 향한 세간의 찬사가 과연 합당한가?"
"경세가인 공자를 수도사로 각색했고, 공자의 출신성분도 왜곡한다. 거기에다 보수주의자였던 공자를 진보주의자로 둔갑시켰고,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이유도 잘못 알고 있다."
▲ TV를 통한 공자와 노자강의로 인기를 끈 도올 김용옥(좌)과 김용옥의 공자와 노자해석에 비판을 제기한 묵점 기세춘. ⓒ2002 화남출판사
김용옥의 공자와 노장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의 책이 출판돼 논란이 되고 있다.
재야철학자 기세춘이 출간한 '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 시리즈'가 바로 그것. 기씨는 시리즈의 첫째 권인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를 통해서는 '김용옥의 공자 해석에는 11가지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셋째 권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에서는 '도올의 저서 <노자와 21세기>에는 11가지의 문제점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세춘은 '사월혁명연구회'와 '국민화합운동연합' 등의 단체에서 사회운동을 해오는 한편, 동서양의 철학과 중국 고전시가(古典詩歌)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온 철학자로 <천하에 남이란 없다-묵자> <우리는 왜 묵자인가>를 출간한 바 있고,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와 공동작업으로 <중국역대 시가선집>을, 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예수와 묵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기씨는 "공자와 노장의 사상을 말하면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성찰 없이 자신의 신변잡담이나 견강부회한 처세훈, 잘못 해석한 명언 몇 구절을 붙잡고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고 이 책의 출판을 서두르게 됐다"며, "거침없는 해설과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고전강의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는 도올을 향한 세간의 평가가 과연 합당한 찬사인지 검증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기세춘은 김용옥이 해석한 어떤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 아래는 기씨가 제기한 도올 비판의 일부다. <도올 논어>에 비판과 <노자와 21세기>에 비판으로 나눠서 살펴보자.
<도올 논어> - "공자의 <논어>는 관료의 처세술에 불과하다"
▲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와 <도올 논어>
ⓒ2002 자료사진
기세춘은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를 통해 김용옥이 공자를 명상가 혹은 수도자로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기세춘의 해석에 따르면 <논어>는 철학은커녕 경세치학도 인생관도 아닌, 관료가 살아남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기씨는 '공자의 안이한 시대인식과 민초에게 등돌린 보수주의적 처세'를 <논어> 폄하의 이유로 언급하며, '김용옥은 공자를 예악(禮樂)과 인생을 논하는 풍류가객으로 찬양하고, 달관자로 재창조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공자와 그 제자들은 기존의 가치체제와 타협하지 않은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설파하는 김용옥의 주장에도 기씨는 단호히 반대한다. '공자가 난국타개 방안을 제시한 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그 내용이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 즉, 복례(復禮)를 제창하고 천자중심주의를 주장했으므로 (공자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라는 것'이 김용옥과는 상반된 기세춘의 주장.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이유에 관해서도 두 철학자의 의견은 엇갈린다. 기세춘이 "대부(벼슬이름)로 승진된 공자가 대인파(수구파)의 선두에 서서 소인파 우두머리(소정묘)를 처형한 사건이고, 이로써 공자는 대인파의 대표가 된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동일한 사건을 두고 김용옥은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법률적 사건이며, 법가적 엄형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외에도 기세춘은 ▲공자학의 핵심인 제정(祭政)을 아는가? ▲인과 민의 신분계급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은 어떤 것인가? ▲덕치와 법치의 본 뜻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공자의 노예적 경제정의를 착각하여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의 공개적인 질문을 김용옥과 <도올 논어>를 향해 던지고 있다.
<노자와 21세기> - "<노자>는 형이상학이나 인생론이 아니다"
▲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과 <노자와 21세기>
ⓒ2002 자료사진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은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가 설파한 주장들을 논박하고 있다. 기세춘이 해석하는 <노자>는 단순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철학이다. 반면 김용옥은 같은 <노자>를 두고 '형이상학이자, 인생론'이라 이야기한다.
김용옥은 "노자는 '항상 그러함'을 말할 뿐 '불변'을 말하지 않는다. 동양인들에게 '불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서양인들이 '불변의 영원'을 추구했다면, 동양의 지혜는 '변화의 영원'을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 기세춘은 "원전해석의 오류다"며 '상(常)은 생명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요, 도(道)는 낳고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 살다가 끝내는 다시 생명의 뿌리인 천명(天命) 또는 무(無) 또는 시원(始原)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을 추구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 다를 바 없다'며 김용옥의 <도덕경> 제1장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인간 노자'를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의견은 상반된다. 김용옥은 <노자> 13장을 '자기주장이 없고 감정이 없는 도인이 천하를 맡아야 한다'고 해석해 노자를 '겸애정치를 계승한 후계자'로 지칭한 반면, 기세춘은 '상과 벌로 다스리는 것은 권력으로 위협하는 정치이니, 생명살림의 정치만이 바른 정치'라고 해석하여 노자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단언한다.
이외에도 ▲상도(常道)는 불면의 도인가 ▲사람의 일곱 번째 구멍은 감각인가 ▲노자의 도는 플라톤의 이데아인가 ▲노자는 공산사회를 지향하였는가의 문제도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와 기세춘의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이 대립하는 지점이다.
논쟁 제의한 기세춘, 김용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실 김용옥에 대한 비판제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도올은 이미 지난해 고려대 서지문 교수와 인하대 김진석 교수에 의해 혹독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당시 김용옥은 "나는 사상가나 철학자가 아닌 고전번역자다. 30년 이상 쌓아온 고전번역에 관한한 내 자랑을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라는 말로 자신이 고전번역의 권위자임을 우회해서 내세운 바 있다.
이번 기세춘의 문제제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씨는 김용옥의 고전번역의 맹점과 허구성, 견강부회한 논리들을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책의 출판과 함께 기세춘은 김용옥에게 논쟁을 제의했다. 대중의 지극한 관심 속에 서있는 인기철학자(?) 는 기씨의 제의에 어떻게 화답할까? ⓒ 2002 OhmyNews
이상은 오마이뉴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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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번 있었던 도올비판은 수준이하여서 논쟁거리도 안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넌센스였다.
기세춘의 도올비판은 물론 상업적 저의를 담고 있는 속임수이기는 하나 일부 진지한 측면이 관찰된다.
철학가인가 번역가인가 두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번역가의 관점으로 보면 도올은 완벽하다. 물론 도올도 오류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국내 최고 수준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철학가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어차피 개인의 철학이 묻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철학가의 관점은 도올이 자신의 철학을 덧씌우든 말든 그것을 지적하여 오류라고 말해서 안된다.
그건 오류가 아니라 권리이고 권위인 것이다. 학자는 자기의 철학을 덧씌울 권리가 있다. 왜? 학자이니까. 그맛에 학자 하는 거지 아니면 뭐하러 학자 하겠는가?
그러므로 기세춘 역시 자신의 철학을 덧씌운 것이며 둘 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독자 역시 자신의 철학을 덧씌워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도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는다. 만약 도올에 속아서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 독자의 문제일 뿐이다. 학문이란 것은 원래 그렇다.
그러므로 함부로 도올의 강의에 오류가 있다고 말해서 안된다. 대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명백한 허위사실을 포착했다면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세춘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들은 양자의 의견을 두루 참고할 내용이지 어느 한쪽을 취하고 버릴 문제가 아니다.
얄팍한 상업적 저의를 담고있기는 하지만 기세춘의 논쟁이 아주 저급한 시비는 아니라고 본다. 도올의 대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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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건 공자건 동아세아의 수구보수기득권 원조로서 마땅히 팽 되어야 할 썩은 사상이다. 그런데 잘 나가던 서구문명이 일부 한계를 보이자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쉬운따나 노자나 공자에게서 혹 건질만한 것이 없는가 하고 돋보기를 들여대 보았더니 과연 썩은 수구보수 사상으로서 조금도 건질만한 것이 없는 실정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현미경을 들여대었더니 약간, 그야말로 병아리 눈꼽만큼은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걸 잘 갈고 닦고 포장해서 동양정신이라는 것이 아주 썩어빠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내려는 것이 도올의 노력이다.
기세춘은 무엇이 다른가? 기세춘은 어차피 썩은 공자를 갈고 닦아 뺑끼칠 해도 광이 안날 것이므로 차라리 묵자를 발굴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또 노자에 대해서는 생명사상이라는 거창한 포장지를 덧씌우면 어찌 21세기 이 시대에 교훈이 될만한 뭔가를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노력이다.
비교하자면 도올의 노자론은 깨달음의 관점에서 불교나 기타등등 공통되는 동양정신의 코드를 찾아서 이를 세계 보편적인 이념으로 발전시켜보려는 노력이 되겠고, 기세춘의 노자론은 노자의 일부 측면에서 생명사상을 발굴하여 서구정신의 일부 진보주의사상에 대입해 보려는 노력이 되겠다.
결론적으로 기세춘은 조금 더 서구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썩은 노자 공자 사상에서 세상을 뒤집는 신통한 것이 나올리는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기세춘의 노력에서 약간의 진전된 점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우리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이건 부질없는 노력이다. 그래봤자 서양사상을 경탄하게 될 뿐이다.
이건 뭐 우리가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맹글었고 금속활자를 맹글었다는 주장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논의들은 서구사상을 정통으로 세워놓고 동양정신에서 그 서구의 틀에 맞는 부분을 발굴하여 "우리도 쬐끔은"하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노예적인 발상이다.
글타고 도올이 신통한 답을 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볼 때 서구정신의 큰 틀을 깨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는가 하는 점에서 보아서 도올이 현재로는 더 스케일이 크게 가는 것이다. 각론이 부실하다 해도 후학들에게 맡기고 앞서가는 자는 일단 집은 크게 짓고 보아야 한다.
"경세가인 공자를 수도사로 각색했고, 공자의 출신성분도 왜곡한다. 거기에다 보수주의자였던 공자를 진보주의자로 둔갑시켰고,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이유도 잘못 알고 있다."
▲ TV를 통한 공자와 노자강의로 인기를 끈 도올 김용옥(좌)과 김용옥의 공자와 노자해석에 비판을 제기한 묵점 기세춘. ⓒ2002 화남출판사
김용옥의 공자와 노장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의 책이 출판돼 논란이 되고 있다.
재야철학자 기세춘이 출간한 '신세대를 위한 동양사상 새로 읽기 시리즈'가 바로 그것. 기씨는 시리즈의 첫째 권인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를 통해서는 '김용옥의 공자 해석에는 11가지의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셋째 권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에서는 '도올의 저서 <노자와 21세기>에는 11가지의 문제점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세춘은 '사월혁명연구회'와 '국민화합운동연합' 등의 단체에서 사회운동을 해오는 한편, 동서양의 철학과 중국 고전시가(古典詩歌)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온 철학자로 <천하에 남이란 없다-묵자> <우리는 왜 묵자인가>를 출간한 바 있고,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와 공동작업으로 <중국역대 시가선집>을, 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예수와 묵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기씨는 "공자와 노장의 사상을 말하면서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성찰 없이 자신의 신변잡담이나 견강부회한 처세훈, 잘못 해석한 명언 몇 구절을 붙잡고서 매스미디어를 통해 열변을 토하는 것을 보고 이 책의 출판을 서두르게 됐다"며, "거침없는 해설과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고전강의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는 도올을 향한 세간의 평가가 과연 합당한 찬사인지 검증해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기세춘은 김용옥이 해석한 어떤 부분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일까? 아래는 기씨가 제기한 도올 비판의 일부다. <도올 논어>에 비판과 <노자와 21세기>에 비판으로 나눠서 살펴보자.
<도올 논어> - "공자의 <논어>는 관료의 처세술에 불과하다"
▲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와 <도올 논어>
ⓒ2002 자료사진
기세춘은 <공자는 왜 소정묘를 죽였는가>를 통해 김용옥이 공자를 명상가 혹은 수도자로 보는 시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기세춘의 해석에 따르면 <논어>는 철학은커녕 경세치학도 인생관도 아닌, 관료가 살아남는 처세술에 불과하다. 기씨는 '공자의 안이한 시대인식과 민초에게 등돌린 보수주의적 처세'를 <논어> 폄하의 이유로 언급하며, '김용옥은 공자를 예악(禮樂)과 인생을 논하는 풍류가객으로 찬양하고, 달관자로 재창조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공자와 그 제자들은 기존의 가치체제와 타협하지 않은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설파하는 김용옥의 주장에도 기씨는 단호히 반대한다. '공자가 난국타개 방안을 제시한 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그 내용이 구체제로 돌아가는 것 즉, 복례(復禮)를 제창하고 천자중심주의를 주장했으므로 (공자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라는 것'이 김용옥과는 상반된 기세춘의 주장.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이유에 관해서도 두 철학자의 의견은 엇갈린다. 기세춘이 "대부(벼슬이름)로 승진된 공자가 대인파(수구파)의 선두에 서서 소인파 우두머리(소정묘)를 처형한 사건이고, 이로써 공자는 대인파의 대표가 된 것"이라고 말하는 반면, 동일한 사건을 두고 김용옥은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법률적 사건이며, 법가적 엄형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외에도 기세춘은 ▲공자학의 핵심인 제정(祭政)을 아는가? ▲인과 민의 신분계급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분은 어떤 것인가? ▲덕치와 법치의 본 뜻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공자의 노예적 경제정의를 착각하여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등의 공개적인 질문을 김용옥과 <도올 논어>를 향해 던지고 있다.
<노자와 21세기> - "<노자>는 형이상학이나 인생론이 아니다"
▲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과 <노자와 21세기>
ⓒ2002 자료사진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은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가 설파한 주장들을 논박하고 있다. 기세춘이 해석하는 <노자>는 단순한 형이상학이 아니라 하나의 통치철학이다. 반면 김용옥은 같은 <노자>를 두고 '형이상학이자, 인생론'이라 이야기한다.
김용옥은 "노자는 '항상 그러함'을 말할 뿐 '불변'을 말하지 않는다. 동양인들에게 '불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서양인들이 '불변의 영원'을 추구했다면, 동양의 지혜는 '변화의 영원'을 추구한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해 기세춘은 "원전해석의 오류다"며 '상(常)은 생명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요, 도(道)는 낳고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이 태어나 살다가 끝내는 다시 생명의 뿌리인 천명(天命) 또는 무(無) 또는 시원(始原)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을 추구하는 것은 동양과 서양이 다를 바 없다'며 김용옥의 <도덕경> 제1장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인간 노자'를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의견은 상반된다. 김용옥은 <노자> 13장을 '자기주장이 없고 감정이 없는 도인이 천하를 맡아야 한다'고 해석해 노자를 '겸애정치를 계승한 후계자'로 지칭한 반면, 기세춘은 '상과 벌로 다스리는 것은 권력으로 위협하는 정치이니, 생명살림의 정치만이 바른 정치'라고 해석하여 노자를 '무정부주의자'라고 단언한다.
이외에도 ▲상도(常道)는 불면의 도인가 ▲사람의 일곱 번째 구멍은 감각인가 ▲노자의 도는 플라톤의 이데아인가 ▲노자는 공산사회를 지향하였는가의 문제도 김용옥의 <노자와 21세기>와 기세춘의 <일곱번째 구멍을 뚫으면 도가 죽는 까닭>이 대립하는 지점이다.
논쟁 제의한 기세춘, 김용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실 김용옥에 대한 비판제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도올은 이미 지난해 고려대 서지문 교수와 인하대 김진석 교수에 의해 혹독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당시 김용옥은 "나는 사상가나 철학자가 아닌 고전번역자다. 30년 이상 쌓아온 고전번역에 관한한 내 자랑을 그대로 받아들여달라"라는 말로 자신이 고전번역의 권위자임을 우회해서 내세운 바 있다.
이번 기세춘의 문제제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기씨는 김용옥의 고전번역의 맹점과 허구성, 견강부회한 논리들을 비판의 주된 대상으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책의 출판과 함께 기세춘은 김용옥에게 논쟁을 제의했다. 대중의 지극한 관심 속에 서있는 인기철학자(?) 는 기씨의 제의에 어떻게 화답할까? ⓒ 2002 OhmyNews
이상은 오마이뉴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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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여러번 있었던 도올비판은 수준이하여서 논쟁거리도 안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넌센스였다.
기세춘의 도올비판은 물론 상업적 저의를 담고 있는 속임수이기는 하나 일부 진지한 측면이 관찰된다.
철학가인가 번역가인가 두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번역가의 관점으로 보면 도올은 완벽하다. 물론 도올도 오류가 없을 수야 없겠지만 국내 최고 수준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철학가의 관점에서 봐야한다. 어차피 개인의 철학이 묻어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철학가의 관점은 도올이 자신의 철학을 덧씌우든 말든 그것을 지적하여 오류라고 말해서 안된다.
그건 오류가 아니라 권리이고 권위인 것이다. 학자는 자기의 철학을 덧씌울 권리가 있다. 왜? 학자이니까. 그맛에 학자 하는 거지 아니면 뭐하러 학자 하겠는가?
그러므로 기세춘 역시 자신의 철학을 덧씌운 것이며 둘 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고 판정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독자 역시 자신의 철학을 덧씌워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취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도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지 않는다. 만약 도올에 속아서 잘못된 인식을 가지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그 독자의 문제일 뿐이다. 학문이란 것은 원래 그렇다.
그러므로 함부로 도올의 강의에 오류가 있다고 말해서 안된다. 대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해야 한다. 물론 명백한 허위사실을 포착했다면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기세춘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들은 양자의 의견을 두루 참고할 내용이지 어느 한쪽을 취하고 버릴 문제가 아니다.
얄팍한 상업적 저의를 담고있기는 하지만 기세춘의 논쟁이 아주 저급한 시비는 아니라고 본다. 도올의 대응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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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건 공자건 동아세아의 수구보수기득권 원조로서 마땅히 팽 되어야 할 썩은 사상이다. 그런데 잘 나가던 서구문명이 일부 한계를 보이자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아쉬운따나 노자나 공자에게서 혹 건질만한 것이 없는가 하고 돋보기를 들여대 보았더니 과연 썩은 수구보수 사상으로서 조금도 건질만한 것이 없는 실정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현미경을 들여대었더니 약간, 그야말로 병아리 눈꼽만큼은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걸 잘 갈고 닦고 포장해서 동양정신이라는 것이 아주 썩어빠진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내려는 것이 도올의 노력이다.
기세춘은 무엇이 다른가? 기세춘은 어차피 썩은 공자를 갈고 닦아 뺑끼칠 해도 광이 안날 것이므로 차라리 묵자를 발굴하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또 노자에 대해서는 생명사상이라는 거창한 포장지를 덧씌우면 어찌 21세기 이 시대에 교훈이 될만한 뭔가를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뭐 이런 노력이다.
비교하자면 도올의 노자론은 깨달음의 관점에서 불교나 기타등등 공통되는 동양정신의 코드를 찾아서 이를 세계 보편적인 이념으로 발전시켜보려는 노력이 되겠고, 기세춘의 노자론은 노자의 일부 측면에서 생명사상을 발굴하여 서구정신의 일부 진보주의사상에 대입해 보려는 노력이 되겠다.
결론적으로 기세춘은 조금 더 서구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썩은 노자 공자 사상에서 세상을 뒤집는 신통한 것이 나올리는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기세춘의 노력에서 약간의 진전된 점을 발견할 수는 있으나 우리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이건 부질없는 노력이다. 그래봤자 서양사상을 경탄하게 될 뿐이다.
이건 뭐 우리가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맹글었고 금속활자를 맹글었다는 주장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논의들은 서구사상을 정통으로 세워놓고 동양정신에서 그 서구의 틀에 맞는 부분을 발굴하여 "우리도 쬐끔은"하고 인정받기를 바라는 노예적인 발상이다.
글타고 도올이 신통한 답을 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볼 때 서구정신의 큰 틀을 깨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하는가 하는 점에서 보아서 도올이 현재로는 더 스케일이 크게 가는 것이다. 각론이 부실하다 해도 후학들에게 맡기고 앞서가는 자는 일단 집은 크게 짓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