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 다가왔다. 예수는 기원전 7년경에 태어났다고도 하는데 정확한 탄생 연도는 모른다. 그때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때가 인류 문명의 어떤 변곡점이었던 것이다. 예수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원래 사람이라는게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게 아니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서 말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류와 맞아떨어지면 자체의 생명력을 얻어 눈덩이처럼 굴러간다. 어쩌다 보니 예수가 서 있는 곳이 정상이었고 그의 입에서 뱉어진 언어는 정상에서 굴린 눈덩이가 되었다. 누구나 마이크가 쥐어지면 말은 넙죽넙죽 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정곡을 찔렸다는 거다. 그의 말에는 힘이 있다. 예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으므로 참신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해버렸다. 다들 눈치 보고 몸 사리는데 말이다. 원래 유태인은 유태 부족신을 믿었을 뿐 일신교를 믿지 않았다. 부족마다 다른 신이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유대교가 일신교로 정립된 데는 왕중왕 키루스 2세의 영향이 컸다. 당시 유대인의 사고는 부족 단위를 넘지 않았는데 유다왕국이 멸망하고 원하지 않게 바빌론에 끌려가서 세계를 목격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세계를 만났고 부족신을 넘어서는 세계신 개념이 탄생했다. 유다왕국에서 끌려온 촌놈들에게는 페르시아 왕중왕 키루스 2세야말로 메시아였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바빌로니아처럼 이번에는 로마가 쳐들어왔다. 그때의 키루스 2세처럼 또다른 메시아가 등장할 때다. 그때 유대인이 세계를 발견했듯이 이번에도 뭔가를 발견해야 한다. 유대민족의 혈통에 집착하면 키루스 2세가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잡을 수 없다. 민족의 큰 위기에 큰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예수는 순진한 촌사람이었다. 그의 뇌는 오염되지 않았다. 약아빠진 랍비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유대인은 바빌론에 끌려가서 70년간 영혼을 탈탈 털렸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의 키루스 2세를 메시아로 알았지만 서기 전후의 유대인들은 그 정도로 털리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는 죽었다. 그들은 예수와 이름이 같은 예수 바라빠를 선택했다. 바라빠는 열심당원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성전을 파괴했고 권력은 성전에서 랍비에게로 넘어갔다. 성전의 권위가 사라진 빈자리를 랍비의 권위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공허함을 느낀 사람들이 예수의 메시아 신앙에 이끌린 것이다. 예수가 사랑을 발명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말 중에 그럴듯한 말이 별로 없었으므로 추종하는 무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각별히 기억한 것이다. 내세울 것이 그것뿐이었다는 말이다. 사랑이 뭘까? 사랑은 인간의 무리 짓는 본성이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다. 밉다를 발음해보면 입술로 상대방을 밀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가 나면 입술이 튀어나오고 웃을 때는 입술을 자기 쪽으로 당긴다. 미움의 반대는 다솜이다. 한자어 사랑思量에 밀려 사어가 되었다. 닷다. 다붓하다로 쓰였는데 '아이들은 아랫목에 다붓다붓 모여서 놀이에 빠져 있었다.'는 표현으로 알 수 있다. 다소곳하다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다가간다, 다가선다고 할 때의 다가 다솜의 어원으로 보인다. 다가가서 다닥다닥 가깝게 붙어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이 무리 지으면 권력이 생긴다. 사랑은 권력을 만드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종교의 폭주와 일탈이 거기서 시작된다. 권력을 조직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사랑은 가짜다. 진짜는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원래 안과 밖을 구분하지 못한다. 피아의 경계가 없다. 아와 비아를 가르는 선이 없다. 너는 나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너는 나와 같은 영혼이 다른 대본을 받은 것이다. 개인은 대본을 따르지만 그 대본은 집단에서 나온 것이다. 골은 손흥민이 넣어도 승부는 모두의 것이다. 지구에는 단 하나의 인격이 있을 뿐이다. 내 생각을 말하면 안 된다. 인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야 한다. 신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내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안 된다. 내가 해야하는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여러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근원의 하나와 연결되어 있으려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당시는 그리스 영향으로 논쟁술이 발달해 있었다. 예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므로 교묘한 언변으로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하는 소피스트들과 달리 인간의 본성대로 말해버렸다. 그것은 근원과 연결되어 있으려는 마음이다. 승부는 근원에서 결정되지 말단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직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