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싸운다. 가지 않은 길로 가는 것이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거짓이 내게 화를 내지만 그들은 이런 궁벽한 곳까지 쫓아오지 못한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화를 내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사정이 딱한 사람일 터이니 내가 이해해야 한다.
원래는 좀 아는 사람 뒤에 묻어가려고 했는데 아는 사람을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 통하는 사람 하나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렇다고 사람을 원망할 이유는 없다. 거기에는 필연의 이유가 있다. 인간 종의 어떤 약점을 봐버린 것이다. 뇌가 오염되지 말아야 한다. 좀비가 되면 끝장이다. 종교와 음모론과 괴력난신과 진영논리에 오염된 사람이 본래의 순수를 회복하고 다시 진실의 편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다. 노예는 호르몬이 오염되어 정상적인 사고를 해내지 못한다. 집단 내부의 포지션에 중독성이 있다. 노예는 자신을 을로 생각하고 유리한 거래를 시도한다.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사회와 환경을 적대한다. 그것을 지렛대로 삼는 것이다. 이는 상대의 맞대응을 부르므로 주어진 자원을 백 퍼센트 사용할 수 없다. 자신의 한 팔을 잘라서 그것으로 흥정을 시도하는 셈이다. 박정희가 차지철과 김재규를 경쟁시키는 것은 노예의 기술이다. 상대의 약점을 잡고 결함을 만들면 외부 변수가 뜨는 결정적인 순간에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윤석열이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노예가 자신의 팔을 잘라서 흥정을 시도하듯이 귀족 역시 세계의 절반만 보고 있다. 자신의 한쪽 눈알을 빼버린 것이다. 귀족은 재산을 벗겨먹으려는 소인배들에 둘러싸여 인간을 불신하고 대중을 두려워한다. 책상 바깥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보지 못한 책상물림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두 발을 잘라버렸다. 책에는 책에 담을 수 있는 부분만 담겨 있다. 강자의 횡포가 나쁜 것은 약자의 재물을 빼앗기 때문이 아니라 약자의 정신을 빼앗기 때문이다.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여 공분을 일으키고 이것을 지렛대로 삼아 강자에게 뭔가 얻어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영원히 그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이미 자신의 팔이 잘려 있다. 내가 무력한 개인이므로 힘 있는 집단으로부터 뭔가 얻어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결함이 된다.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덫에 갇혀버린다. 내 한 팔을 내줘야 상대방을 붙잡을 수 있다.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는 모든 기동은 위태롭다. 그 중독성에 갇힌다. 인간은 핑퐁처럼 오고가는 상호작용구조에 갇힌다. 서로 팔 하나를 내주고 다른 팔로 샅바를 잡는다. 귀족은 눈알을 빼주고 지식인은 다리를 내준다. 우리는 쿨해져야 한다. 그러나 지식인은 냉소적이다. 지식인은 힘이 없다. 힘은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뜨거운 지식이 진짜다. 예수의 의미, 종교의 의미는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은 원래 족장이고 족장은 부족원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성은 분별심이다.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사실 자체에 왜곡이 들어가 있다. 차가운 이성은 잘못된 연결을 단절할 뿐 바른 연결을 끌어낼 수 없다. 뜨거운 이성이라야 한다. 널리 연결되어 있다는 마음이 우리가 찾아야 할 진짜다. 거짓을 물리치고 바른길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입바른 말은 옳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파편화된 부스러기 옳음이 아니라 밑바닥 에너지의 진실을 따라야 한다. 말단의 옳음이 아니라 근본의 옳음이라야 한다. 그것은 나를 버리고 자연의 거대한 에너지 흐름에 합류하는 것이다. 인간은 집단의 일부이고 문명은 자연의 일부다. 부분은 전체에 의지해야 한다. 이성은 고정된 것을 분별할 뿐 불확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실패는 이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양자역학의 이중성은 우리에게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사고를 요구한다. 혁명가들은 자기네 손에 쥐어진 라이플을 믿은 것이다. 총은 화약으로 쏘지만 거기에 지식의 화약을 더하면? 혁명이 옳기 때문이 아니다.
혁명은 법을 고쳐서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 되도록 만든다. 혁명가의 거짓말은 많다. 계몽사상가의 거짓말도 무수하다. 내 손에 총이 쥐어져 있으면 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밸런스에 의해서 사회가 작동하게 하는 것이며 그것은 옳고 그름의 분별을 넘어서는 것이다. 머스킷 시대가 가고 라이플 시대가 온 것이다. 머스킷은 대열을 갖추어야 하고 전열보병의 대열은 강도 높은 훈련으로 이루어지지만 라이플은 그냥 쏘면 된다. 시민이 거리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라이플을 쥐는 순간 군대로 돌변한다. 머스킷 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차가운 이성을 넘어 뜨거운 이성이 필요하다. 활을 총으로 바꿀 때 변화가 일어났고 머스킷을 라이플로 바꿀 때 변화가 일어났다. 진리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거대한 에너지 흐름을 따라가는 이성이 필요하다. 변화는 발밑에서 시작된다. 지구의 자전이 멈춘다면 곤란하다. 엔진이 꺼지면 구동모터를 돌려야 한다. 인류는 발동이 걸린 상태다. 모루 위에 올려진 쇠가 가열되어 달아 있는 상태다. 밑바닥 에너지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