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선배를 밟고 지나가는데 인문학은 선배를 밟고 지나가지 못한다. 유시민이 한 말이라고. 인문학은 스승이 만든 가두리 양식장을 탈출하지 못한다. 특유의 인맥놀음 때문이다. 인문학의 목적은 평등한 동료를 얻어서 집단 내부에 의사결정하는 코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려면 같은 스승을 섬겨야 한다. 이념적 동질성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종교의 속성을 버리지 못한다. 종교는 교주가 있어야 평등하다. 한 부모에게서 난 자녀가 평등하듯이, 한 스승에서 배운 제자가 평등하고, 같은 신을 섬기는 무리가 평등하다. 의사결정이 가능한 구조다. 과학은 실력대로 차별한다. 노벨상을 갖고와야 인정받는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과학자는 고집만 부리고 인문학자는 눈치만 본다. 먼저 인문학으로 집단의 코어를 만들고 과학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집단의 우두머리는 양쪽 세계를 다 경험해 본 열린 사람이라야 한다. 서양의 모든 좋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고 모든 나쁜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나왔다. 동양은 공자를 넘지 못했고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지 못했다. 다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건드린 분야가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육예를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인류가 과학에 방정식을 써먹은 것은 케플러의 법칙이 처음이라고 한다. 과학의 역사는 불과 500년 안팎이다. 신의 질서에 안주하는 중세인이라면 도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 중에 맞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가 손을 대지 않은 분야도 없다. 인간은 스승을 넘지 못한다. 서구 문명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있다. 탈레스는 물 일원론을 제안했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일원론을 주장했다. 동양의 주역은 역 일원론이다. 플라톤은 이데아 일원론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사상의 시조는 일원론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선을 상징하는 아후라 마즈다 일신론자인데 점차 앙그라 마이뉴의 힘이 커져서 선악 이신론으로 변질되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가세하면서 교회 안에서 역할을 요구하므로 과학이 순수성을 잃고 점차 집단의 롤 플레잉 게임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히어로와 빌런의 밸런스를 맞추어야 흥행이 된다. 이는 집단을 격동시키는 장치다. 광장에 모인 군대가 히어로의 활약을 믿고 흩어져 버리면 곤란하다. 정치는 종교다. 집단을 긴장이라는 울타리에 가둔다. 서로를 긴밀하게 연결시켜 집단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심리적 장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 이분법을 제안했다. 서양은 여전히 조로아스터교의 선악 이분법에 갇혀 있다. 마르크스의 계급 이분법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입으로 변화를 떠들지만 본질에서는 변화를 부정한다. 한 번 혁명으로 변화를 끝내고 거기서 안주하려고 하는 것이다. 질료와 형상은 원인과 결과를 다르게 말한 것이다. 질료와 형상을 연결하는 라인은 하나다. 그 하나의 에너지 방향성에 주목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는 둘이라도 변화는 하나다. 하나는 자신을 복제한다. 생물은 원래 단성생식을 한다. 자궁에서 아기가 아니라 자궁이 나온다. 양성생식의 역사는 불과 5억 년이다. 생명은 30억 년 동안 단성생식을 해왔다. 질료에서 질료가 나오고, 형상에서 형상이 나오고, 변화에서 변화가 나온다. 물이 계속 흐르고, 불이 계속 타고, 역易이 계속 조화하는 것이다. 집단이 역할을 나누고 부하를 감시하는게 이원론이다. 이원은 감시하는 사람과 감시당하는 사람이다. 사람을 부려서 일을 시켜먹으려고 하므로 이원론이 된다. 인간들이 워낙 말을 들어먹지 않으니 '말 좀 들어라 인간들아. 내가 따로 줄 것은 없고 허울 좋은 계급을 올려줄게.' 이러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순수로 돌아가자. 대립된 둘을 통일하는 하나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스 시대가 좋았다. 그때는 벌거숭이 임금님을 보고 벌거숭이라고 말해도 되는 시대였다. 이후 종교가 득세하면서 인간의 사유는 대중의 평균에 맞추어 규율되었다. 지구인 모두는 바보가 되었다. |
인문학의 진보를 강단좌파 (국내외를 막론하고)가 담당할수 없고,
19세기까지 인문학의 진보를 강단 (철학-사회학-경제학)이 담당할수 있었던건, 학문 자체가 귀족의 전유물이었기 때문. 먹고사니즘에 관련이 없으니(*), 그리스-로마 (BC146-AD330)와 0세기의 공자사상 (BC 551) (독일의 공자철학)으로 돌아가서, 0세기 전후의 인류의 원류를 받아올수 있었음.
(*): 14-16세기의 서유럽의 학문팽창은, 12-13세기 몽골의 아랍폭발에 따른, 유태인과 과학자들의 서유럽 진출에 기반하고, 그리스-로마 아랍번역본들이 라틴어와 독일어-프랑스어-영어로 폭발적으로 전파됨. 그와 동시에, 아랍에 투르크계들이 장악하는 바람에,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물적 토대가 만들어지니,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같이 발전. 인문학은, 세력이 강화되는 브루주아에 맞춘 막스베버의 윤리론 (1905)이 나오고, 뉴턴의 물리학책의 제목은 '자연철학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1687)'이었음. 자연과학 (물적토재)이 먼저 치고 나가면, 그걸 설명하는 인문학이 나중을 받쳐서 생활양식을 변화시킴.
몇가지 정리하면,
1. 그리스-로마 (0세기 전후) - 10세기까지 아랍의 지혜의집 - 13세기 이후 서유럽으로 전해진 '과학'의 정신은 유효. 그 근간에서, 세계통상 (여권제도), 기계공업 (공장제 생산), 에너지 (석탄-석유) 혁신이 21세기까지 이어짐. 그 '과학'의 정신은 지금도 유효.
2. 2차대전후의 '자유주의' 풍조가 '과학'의 정신을 좀먹음.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제3세계의 고질적 문제를 다양하게 받아들임. 신세대들은 마약과 포퓰리즘에 선동되고, 무엇보다, 여기서 '신토불이', '성찰', '눈물' 이런게 나옴. 이 마약성분의 원료들은 마음의 안정은 주지만, 상황을 해결하지 않음.
3. 서구사회의 근본적 문제는, '분절주의'. 분절시키는 것이 문제의 부분적 해결을 가능하게 하지만, 전체적인 해결과 시간적 해결을 주지 않음. 그러나, 여기서 '한의학'으로 넘어가서 혈을 찾거나 기를 찾으면 문제는 더 난망. 분절주의를 기본으로 하되, 주변과의 관계를 개선하는것이 공간과 시간을 합치는 사건의 해결책. 결국에는, 상호관계가 존재를 설명하며, 존재자체의 상호관계를 고침과 더불어, 존재가 외부 존재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의 메커니즘을 밝히고 접점에서 치료하는것이 필요. 예) 서구사회의 흑인 빈곤문제는, 흑인 자체의 문제와 더불어, 흑인사회가 외부사회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의 통로를 개설하는데서 해결책이 나옴. 1) 문제의 부분을 협소해서, 내부의 원사이클을 복원, 2) 복원된 원사이클이 외부의 환경과 연결되는 통로를 개설함. 서구의 문제는 1) 없이 2)를 개설해대는 난망. 1)-2)를 순차적으로 바라보고, 시행착오를 가는게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