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문제의 진실 팟캐스트 질문에 대한 답글로 씌어진 글입니다. 많은 오류가 비뚤어진 옳고 그름의 논리 때문에 일어난다. 저급한 프레이밍 전술 말이다. 현실에서의 많은 변화는 사실 생산성의 증대 때문에 일어난다. 에너지가 본질이다. 생산력을 낮추고 원시시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것은 합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수가 찬성해도 단 한 명이 반대하면 그 사람이 룰을 정하게 된다. 한 명의 반대자가 권력을 쥔다. 그러므로 퇴행은 합의될 수 없고 진보는 비가역적으로 일어난다. 생산력이 증대할수록 개인이 더 많은 권력을 쥐게 된다. 개인주의가 득세하는 것이며, 아기를 낳지 않는 것이며, 양성평등 문제와 성소수자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봉건 가부장이나 집단의 우두머리가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이다. 개인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이 좋거나 옳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탈출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한다. 생산성이라는 본질을 모르므로 서로 프레임을 걸어서 답이 없는 무익한 논쟁의 수렁에 빠져 교착된다. 선악의 프레임, 옳고 그름의 프레임, 정의와 불의의 프레임으로 보면 답이 없지만 생산력으로 보면 누가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그래서 나는 바른말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그들은 진실이 아니라 권력을 추구한다. 진실은 복잡하지만 권력은 단순하다. 그들은 본질을 떠나서 엉뚱한 곳에서 변죽을 울린다. 세상을 규정하는 것은 에너지의 통제가능성이다. 개인에게 결정권이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에너지가 개인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SNS가 개인의 수중에 들어간 거다. 집단이 개인을 통제할 수단이 없으므로 각자 적응할밖에. 이제는 개인이 각자 SNS소총으로 무장하고 자기를 방어해야 하는 시대이다. 성소수자 문제는 사실 복잡한 것이다.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풀어야 한다. 정치적인 대결로 가서 억지 프레임을 걸고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사생결단 투쟁으로 몰아가면 안 된다. 전문가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그런데 전문가가 없다. 게이가 되어보지 않고는 게이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게이는 이성애자의 입장을 모른다. 동성애자 자신도 정확히 모른다. 게이가 게이를 성추행하는 일은 흔하다. 군대 내무반과 같은 곳에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게이는 게이를 알아본다. 문제는 피해자 게이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 있다. 설사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신체접촉을 원하는건 아니다. 자기 타입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이 두 사람이 만났는데 서로 원하는 타입으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깝다. 탑과 바텀 때문이다. 설사 타입이 맞다고 해도 그럴 기분이 아닐 수 있다. 계급문제 때문이다. 무수한 장애물이 있는 것이며 그럴수록 제한을 뛰어넘고 싶은 욕망도 있다. 성소수자지만 평범하게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사는 경우도 많다. 다만 침대를 같이 쓰지 않을 뿐이다. 각방생활에 지친 부인이 바람나면 간통죄로 고소한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잘못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동성애자이지만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파트너를 외롭게 하면서 이성애자로 사는 것이 행복한가 아니면 커밍아웃을 하고 게이바를 찾는 것이 행복한가? 누구도 정답을 말할 수 없다. 커밍아웃을 할 권리와 커밍아웃을 하지 않을 권리를 동시에 존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상황은 다양하고 고도화된 현대사회에 가부장의 통제는 불가능하며 통제를 시도한다면 그게 곧 파시즘이며 그런 환경에 우리가 적응해야 한다. 적응하려면 교양이 필요한 것이며 그러므로 학습하여 잘 알고 각자 위험을 회피해야 한다. 레즈비언과 달리 남성간 동성애가 특별히 문제로 되는 이유는 전립선 자극을 목적으로 하는 남색 때문이다. 많은 논란이 동성애와 남색을 혼동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유는 성추행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여자는 전립선이 없으므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동성애자도 학습을 해둬야 한다.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남들도 자신과 같을 것으로 착각해서 성추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브라질 인구의 25퍼센트가 양성애자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지 상당부분 남색을 의미한다. 봉건사회는 남색이 일반화되어 있어서 소년은 당연히 아저씨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유교 때문에 비교적 덜했다. 일본의 경우 조선의 유교가 전해져 뒤늦게 남색이 금지되었는데 거의 모든 전국시대 무장이 젊은 소년을 데리고 살았다. 심지어 남자가 여자와 자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며 남자는 당당하게 남자와 동침해야 한다는 설이 퍼져 있었다. 여자와 자는 것은 후손을 남길 때뿐이며 남자와 자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식이었다. 조선통신사와 일본 학자의 문답에 그런 내용이 많다. 신라의 화랑도를 남색집단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경상도 말로 빠구리라는게 있는데 원래 계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장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있었던 일이며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며 문제는 통제가능성이다. 무리하게 손대지 말아야 한다. 현대사회의 룰은 많은 부분을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그만큼 위험해질 수 있다. 교양과 학습이 필요하다. 성소수자 문제가 부각된 이면에는 유명인 중에 성소자자가 많고 그 사람들이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가 유명인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들을 억압한다면 생산성이 낮아진다.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나라는 생산성의 저하로 후진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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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를 억압하는 것은
순혈주의를 추구할 가능성이 있고
순혈주의는 쇄국과 같은 것이며
쇄국은 고립으로 가고
고립으로 가면 나라가 망한다.
명나라가 망하고
조선중후기 조선이 망한 것은
명나라와 조선이 국제적으로 교류가
약해졌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있었던 일이며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며 문제는 통제가능성이다."
주제가 뭐가 되었든
해심은 인권이고 존엄.
이성애자만 존엄이 있고, 양성애자나 동성애자에게는 존엄이 없는 듯 말하는 시류가 문제.
이것도 결국 에너지 총량과 통제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개인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바뀐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이 좋거나 옳기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의 총량이 점점 팽창하고 있는 시대가 온듯 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