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 4516 vote 0 2004.09.07 (22:51:08)

 

13. 자생적 민주주의자 김구

놈들은 화가 나서 나를 천장에 매달고 태(苔)로 장(杖)으로 무수히 난타한다. 놈들이 밤을 꼬박 새워가며 독립투사들을 고문하는데 충실한 것을 생각하니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나라를 남에게 먹히지 않겠다는 내가 저 왜구처럼 밤새워 일해본 적이 몇이나 되는가 자문하매 부끄러운 눈물이 눈시울에 가득 찬다. [백범일지]

한일합방을 전후로 하여 일제의 뭉어리돌 제거작전에 따라 김구는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15년형을 받고 투옥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민중은 일본이 간접통치나 하지 설마 직접 식민지지배를 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선제기습을 당한 것이다.

조선왕조의 최종몰락은 양반중심 신분제 사회의 완전한 퇴장을 의미한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농공상의 신분제도가 철폐된지 16년이 지났지만 그때까지 민중들은 여전히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하는 양반 유림세력의 권위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와서 양반세력의 일부는 왜와 결탁하여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케케묵은 위정척사 논리를 버리지 못하여 민중으로부터 완전히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상민계급이 앞장선 동학농민항쟁과 양반계급이 주도한 의병운동의 연이은 실패로 하여 낡은 사상으로는 나라를 되찾을 가망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민중의 관심이 그 시점까지 기독교도라 하여 배척되고 있던 개화꾼들에게로 쏠리게 된 것이다.

친일과 반일을 떠나서 양반세력들은 최종적으로 불신임되었고 신학문을 배운 개화꾼들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편승하여 그 동안 상민출신으로 신분의 한계 때문에 남들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신중한 행보를 보이던 백범이 기라성 같은 양반출신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전까지 김구의 소원이 상놈의 출신으로 태어나 그를 괄시하던 이웃마을 양반 강,이가들 보다 더 큰 양반으로 출세하여 큰소리 한 번 쳐보는 것이었다면, 민중에 의해 양반세력이 최종적으로 불신임된 이 시점부터 민족지도자로 우뚝 선 김구의 소원은 첫 번째도 나라의 독립이요 두 번째도 나라의 완전한 독립으로 된다.

왜놈이 심문하기를 『전답을 매수한 지주로서 그 전답의 뭉어리돌을 골라냄이 상례가 아니냐.』고 한다. 왜놈이 나를 뭉어리돌로 인정하는 것은 참 기쁘다. 오냐, 나는 죽어도 뭉어리돌의 정신으로 죽겠고 살아도 뭉어리돌의 책무를 다하고 말리라 생각한다. [백범일지]

사부 고능선선생의 지적대로 김구는 과단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신중한 젊은이였다. 일제에 잡혀 조선의 뭉어리돌로 인정을 받게 됨에 긍지를 가지게 된 김구는 그동안 양반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몸을 낮추었던 신중한 처세를 버리고 호방한 대자유인 김구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백범이 왜를 타살하고 그 피를 마시거나 하는 사례를 두고 김구를 과격한 인물로 오해함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양반의 권위가 없는 상민출신의 지도자가 문자를 배우지 못한 상민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하나의 방법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백범과 노무현의 삶에는 무수한 연극적 요소가 있다. 백범이 왜를 타살함은 젊은이의 혈기가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계산된 연극적 행위로 보아야 한다.

여전히 양반계급을 중심으로 지식층의 공론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식자층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김구는 마곡사 승려신분으로 사찰에 유람을 와서 시회를 여는 양반들의 먹물시중을 들며 어깨너머로 문장을 익혀 겨우 양반과 교유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양반의 앞에는 계단이 놓여져 있다. 그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면 된다. 그 방법은 자신을 중심으로 인맥을 만들고 세력을 쌓는 것이다. 상놈의 앞에는 벼랑이 놓여져 있다. 그 벼랑에 밀려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 상민계급에는 언제나 생존이 문제가 된다. 남의 위로 올라가 보겠다고 설치다가는 그 벼랑으로 떠밀려 추락하고 만다. 살아남는 방법은 하나 뿐이다. 그것은 고의로 져주는 것이다.

김구도 그렇고 노무현도 그렇다. 부단히 져주므로서 살아남았다. 노무현이 부산에서 거듭 낙선한 것도 학벌부족으로 자기 주도하에 독자적인 계보를 만들 수 없는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극도로 신중한 끝에 가장 낮은 자리에 서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명색이야 의병이든 도적이든 왜놈이 순한 백성이 아니라고 감금하여 두는 것이면 그것으로 족히 의병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지 않느냐? [백범일지]

백범이 양반 지식층과 교유하면서 어느덧 민중의 마음과 멀어진 자신을 발견하고 문득 깨달아 다시 민중의 아버지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백범이 감옥에서 본 의병들은 글도 모르고 국가의식도 없는 것이 떼강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들도 문자를 배웠다면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백범은 무지한 백성이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을 핸들링 할 자신과 경험과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다. 노무현은 민중의 마음을 빼앗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병폐는 민중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가지고 함부로 우러러본다는 점이다. 어느 시점에 와서 그 환상은 깨어진다. 민중이 먼저 지식인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민중의 배신을 구실로 지식인들도 등을 돌린다. 민중이 먼저 배신하였으므로 그들의 배신은 정당화된다.

잘못이다. 민중을 이해하여야 한다. 민중이 지식인을 따라오지 못하면 지식인이 몸을 낮추어 민중의 눈높이에서 민중을 이해하고 민중의 마음을 뺏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민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드라마가 필요하다. 때로는 일부러 져주는 방법으로 몸을 낮추어 민중의 마음 안으로 다가가서 그들과 한 가족이 된다. 한 사람의 가족으로 인정받고서야 비로소 민중을 꾸짖어 계도할 수 있다.  

쉬는 날에는 책자를 볼 수 있는데 그 중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자국이 반반한 ‘감옥서’라는 도장이 찍힌 광학류편, 태서신사 등 서적을 보았다. 나는 그런 책자를 볼 때 내용보다는 배알치 못한 이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의 느낌이 있었다. [백범일지]

이 시기 이승만박사는 지체 높은 왕족 출신에 미국을 드나들며 외국의 사절들과 무시로 접촉하는 까마득한 독립운동의 선배요, 김구는 하찮은 상놈의 신분에 혈기만 믿고 설치는 새까만 후배 젊은이다.

김구가 존경하는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30년 후 두 사람은 정치적 라이벌이 된다. 그 사이에 김구는 컸고 이승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노무현이 존경하는 사람은 김근태였다. 두 사람은 정치의 라이벌이다. 머물러 있는 자 있고 그렇지 않은 자 있다.

도적의 괴수 김진사의 말을 듣고 생각하여 보았다. ‘내가 국사를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품고 비밀결사로 일어난 신민회 회원의 한 사람이나 저 강도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조직과 훈련이 아주 유치한 것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백범일지]

백범은 자생적 민주주의자다. 데모크라시를 이나라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김구의 민주주의는 이승만의 데모크라시와 다르다. 법률과 제도에 의지하는 이승만의 데모크라시는 결국 625의 국난을 당하고 독재로 흘렀다.

김구의 민주주의는 동학의 접주로 농민군을 지도해 본 경험, 감옥에서 도적의 괴수들과 문답해 본 경험 등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 무수한 상놈들과 현실에서 부딪혀 본 경험에 의해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쌓아올려진 것이라는 점에서 외국에서 직수입한 이승만의 데모크라시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가 망한 원인은 주자학을 기초로 한 계급독재에 있다. 이 때문에 싹이 트려다가 눌려 죽은 새 사상, 싹도 트지 못하고 밟혀버린 경륜이 얼마나 많았을까.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백범일지]

선생이 깨달으셨듯이 민주주의의 본질은 제도나 법률이 아니고 견제와 균형의 묘, 그리고 사상의 자유경쟁원리이다. 이러한 본질을 깨치지 못하고 민중이 계몽되지 않은 단계에서 제도와 법률만으로 민주주의를 시도할 경우 반드시 독재로 흐르고 만다.

김구의 민주주의가 이승만의 데모크라시와 다른 것은 민중에 대한 교육과 계몽 및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관점일 것이다. 대개 서민과 부대껴보지 못한 지식인은 민중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아니면 과소평가한다. 그들은 민중을 밑에서부터 계몽하는 방법을 모른다. 사회주의식으로 위로부터의 강제적인 학습을 시도하거나, 히틀러식으로 미디어를 활용하여 파쇼적인 선동주의로 흐르거나, 이승만식으로 무절제한 자유방임으로 팽겨쳐두거나이다.

민주주의는 제도나 법률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유방임과 시장원리에 의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요. 위로부터의 강제학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미디어를 통한 선전활동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부단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피드백 과정을 거쳐 민중 각자가 자각하므로서 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이를 총체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철학적 기초이고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의 가역과정을 거쳐 견제와 균형의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는 조정능력이다.

이승만의 자유주의는 헛된 이념공세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알맹이가 없다. 맹목적인 자유의 외침은 야수의 정글과 같은 혼란과 폭력의 악순환을 부를 뿐이다. 이승만의 데모크라시에서 실제로 작동한 것은 김두한을 위시한 깡패집단의 폭력이었다. 인간의 사회가 아니라 동물의 생존경쟁이었다.   

참된 민주주의는 좌파나 혹은 우파의 이데올로기 공세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견제와 균형의 묘를 발휘하여 중재하고 조정하는 능력과 그 숙련된 노하우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다원주의, 합리주의, 실용주의의 철학적 기초로서 가능하다.

김구는 중경정부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좌파와 우파세력을 중재하여 합작을 실현해낸다. 김구는 탁월한 중재자이기도 하다. 노무현 역시 노조와 재벌을 중재해 본 경험이 있다. 이승만에게 없는 그것이 김구와 노무현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이름을 구(九)로 고침은 왜놈의 호적에서 떨어져 나감이요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침은 다년간 연구한 바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 나의 정도는 되고서야 완전한 독립이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자는 것이다. [백범일지]

이 즈음 명치천황과 천황의 처가 잇따라 죽었다. 15년형을 선고받았던 백범은 명치가 죽어서 7년으로 감형되었다가, 명치의 처가 죽어서 다시 5년으로 감형된다. 다시 사회에 나아가 활동하기 위한 준비로 백범은 호와 이름을 고친다. 백범(白凡) 곧 백정(白丁)과 범부(凡夫)는 민중과의 자기동일시이다.

백범일지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지나친 겸손과 자기비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상놈의 출신으로 양반에게 억눌려 살아오면서 익힌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의 서민적 정체성을 끝까지 잊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기도 하고, 또 민족지도자로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로서의 시대의 소명을 상민계급에 대한 계몽으로 설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밑바닥생활의 경험으로 얻은 민중을 컨트롤 하는 노하우로서의 김구 특유의 자생적 민주주의의 탄생인 것이다.

노무현은 김근태가 자신을 친구로 대해주는 것을 보고 이렇듯 훌륭한 사람의 친구가 되다니 하며 감격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노무현의 언행에서도 지나친 겸손과 고의적인 자기비하를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오해해서 안된다. 백범과 마찬가지로 민중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서민출신 지도자 특유의 포지셔닝인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그러한 위치에서 세상과 각을 세우는 것이다. 노무현의 태도는 김근태 한 사람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무릇 천하에 대한 겸손한 태도이다.

지식인의 출세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것과 같아서 인맥은 넓을수록 좋고, 자리는 높을수록 좋고 명성은 떨칠수록 좋다. 지식인집단의 평판과 공론과 인맥이 보호해주므로 어떤 경우에도 그 세계에서 추방될 위험은 없다. 그러나 서민의 출세는 위태로운 곡예여서 아차 하는 순간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다시 살아돌아올 수 없다.

민중의 지도자가 살아남는 방법은 첫 번째도 굽히는 것이요 두 번째도 굽히는 것이다. 조직의 보호를 받는 엘리트 지도자는 굽힐수록 조직의 핵심에서 밀려나지만 애초에 조직이 없는 민중의 지도자는 굽힐수록 천하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 발판을 얻는 것이다.

부부간에 말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자기 아들 편을 드는게 보통인데 우리 집에서는 아내가 내 의견을 반대할 때는 어머님이 십배 백배의 권위로 나만 몰아세운다. 가만이 보면 고부간에 귀속말이 있은 후에는 반드시 내게 불리한 문제가 발생한다. [백범일지]

양반 가문의 경우 가부장제도의 권위주의로 하여 남존여비사상이 완강하나 상민 계급의 경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타인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도 지식의 힘과 조직의 힘으로 가능한 바 배우지 못한 가정에서 오히려 집안일에서는 여성의 위상이 더 높은 경우가 흔히 있다.  

남성위주의 가부장제도는 대규모의 친족집단으로 이루어진 씨족공동체 하에서 기능한다. 상민계급은 양반계급에 비해 친척들이 별로 없거나, 농사일을 목적으로 형제들이 분가하여 뿔뿔이 흩어져서 핵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므로 씨족공동체의 기능이 미약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상대적으로 덜 심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백범은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여왕봉형 가정에서 태어나 부친 김순영씨보다 어머니 곽낙원여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의 유년기 가정환경도 집안의 대소사를 여성이 결정하는 여왕봉형 가정이라는 점에서 유사한 데가 있다.

백범의 부친 김순영씨가 술로 인생을 망쳤다면 노무현의 부친 노판석(盧判石)씨는 사업을 하여 한때 큰 돈을 벌기도 했으나 어수룩하여 재산을 남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다. 두 분 다 집안에서 큰소리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백범과 노무현의 민주적 사고는 서민집안 특유의 평등한 가정환경이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노형극이란 감독관이 소작인들을 자기 집에 모아서 도박을 하게 하고 추수할 때 소작인 몫의 곡물을 전부 탈취하였는데, 도박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경작지를 주지 않았다. 소작인들의 풍습은 아버지는 도박하고 자식은 망을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백범일지]

지식인들은 흔히 제도와 법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현실에 부대껴 보아 형편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완벽한 제도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이 바로되지 않고는 소용없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백범이 경험한 바와 유사한 착취구조는 지금도 이 사회 곳곳에 온존하여 있다. 강제노동을 시킨다는 서해안의 새우잡이 어선이나 혹은 여성에게 매매춘을 강요하는 퇴폐업소에 이와 유사한 악랄한 수법은 대대로 전수되고 있다. 불과 20여년전만 해도 전국의 건설현장에 이와 같은 악습이 뿌리내려 있었다. 건설노동자가 임금을 받아 저축을 하고 가정을 돌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권익은 지배집단의 온정이나 선의(善意)로 되는 것이 아니요 법률이나 제도의 개정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부딪혀 본 경험에서 축적된 노하우로만 가능하다. 백범과 노무현의 민중적 리더십은 이러한 현실에서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909~ 1918년]

34세,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관련자로 몰려 체포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다.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하여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논의한다.  

36세, 안명근사건으로 체포된다. 징역 17년을 언도받은 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다. 옥중에서 이름 김구의 구(龜)를 구(九)로 바꾸고 호를 백범(白凡)으로 고친다.  

39세, 왜왕 부부의 잇단 죽음으로 형기 5년으로 감형되어 석방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동산평에서 농감을 맡는 한편 소학교를 설립하고 교편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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