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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이란 무엇인가?

 



완전성의 과학 구조론

구조론은 ‘데이터’에 어떻게 ‘포지션’을 부여할 것인가? 포지션에 어떻게 ‘밸런스’를 부여할 것인가? 밸런스에 어떻게 ‘플랫폼’을 부여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시스템’으로 발전시킬 것인가를 논한다.

구조는 이렇게 점차 고도화 되어 완전성에 이른다. 완전체는 시스템이다. 구조는 데이터(정보)≫포지션(짝짓기)≫밸런스(평형계)≫플랫폼(구조체)≫시스템(닫힌계) 순서로 모듈화 되어 완전체에 이르러 자연의 생명성을 얻는다.

자연은 완전할 때 뻗어나간다. 구조는 완전체에 이를 때 비로소 작동을 개시한다. 그 날개를 편다. physical(자연, 생리)의 어원은 ‘펼쳐진다, 뻗어간다’는 뜻이다. 자연은 절로 뻗어나가는 것이며 뻗어서 완전에 이른다.

완전한 것은 생명이다. 내부에 에너지 순환구조를 갖추었다. 씨앗처럼 움츠리고 있다가 봄을 맞이한 새싹처럼 펼쳐져 나온다. 꽃처럼 피어난다. 구조론은 자연의 완전성, 생명성, 진보하고 뻗어나가는 성질을 탐구한다.

구조론은 세상을 해석하는 경로다. 구조는 정보≫포지션≫평형계≫구조체≫시스템 순서로 발달하며 구조론은 구조체의 모델링과 시스템의 시뮬레이션을 통하여 자연의 완전성에 도달하는 과학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구조의 작동이 일(work)이다. 일은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에 따른 1사이클 순환이 존재한다. 세상은 일들의 집합이다. 구조론은 일을 해명한다. 자연이 일하여 생명으로 발전하듯이 인간은 일하여 문명으로 발전한다.  

그 지점에서 인간의 일은 자연의 생명성을 얻는다. 공명한다. 울림과 떨림이 전파된다. 봄을 맞이하여 새싹들이 깨어나듯 일제히 분출한다. 폭발한다. 혁명한다.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세계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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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론은 폭넓은 지평을 가진다. 구조론은 자연의 완전성을 통하여 이상주의로 나아가는 철학이고, 세상을 해석하는 경로를 제시하는 과학의 방법론이며, 자연의 완전성을 삶의 양식으로 내면화 하는 미학이다.

신의 완전성과 소통하는 깨달음이며, 인류의 집단지능이라는 문명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줄에 꿰어 하나의 논리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총괄이론(Theory of Everything)이다.

 

구조의 사전적 의미

구조의 구(構)와 조(造)는 짓는다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구(構)는 ‘자재를 얽는다’는 뜻이고 조(造)는 ‘짓기를 진행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조론은 '짓는 이론'이다. 만유의 얽음을 진행하는 이론이다.

구조론에서 구조체는 짓기(압축)와 풀어내기(압축해제)의 양방향 진행을 동시에 가진다. 짓는 것은 닫힘이고 푸는 것은 열림이다. 세상은 닫힘과 열림에 의해 이루어졌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가 닫히면 하나가 열린다.


구조론의 명명한 의미

18세기에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 있었다면, 19세기에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다윈의 진화론이 있었고, 20세기 들어서는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큰 영향을 미쳤다. 21세기와 그 이후는 구조론의 시대이다.

 

구조론을 말한다

 

‘완전성의 과학’ 구조론은


◎ 세상을 해석하는 경로다. 우편물 배달은 주소체계로 가능하고, 웹 세계의 항해는 웹브라우저로 가능하듯이, 구조론이 제시하는 입체적 모형의 새로운 질서체계에 의해 세상은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 과학의 방법론이다. 구조론은 개념을 선 위에 열거하는 단선적 사고를 지양하고 이를 입체적 모형의 사고로 전환한다. 흑백논리-이항대립-단선적 사고에 따른 교착상황을 타개하여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 수학의 자궁이다. 수학은 세상을 계량화, 수치화한다. 그 계량화, 수치화의 전제가 되는 단순화, 모형화 과정이 구조론이다. 구조체의 모델링과 시스템의 시뮬레이션을 거쳐 수학적 방법의 정량적 분석을 끌어낼 수 있다.

◎ 포지셔닝 게임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작용 반작용의 짝이 있다. 짝지어진 대칭구조 속에서 톱 포지션을 차지하는 이가 승자다. 상대가 어떤 방법으로 나와도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하여 비교우위에 설 수 있다.

◎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다. 깨달음은 인간의 사고체계를 자연의 완전성 원리에 맞게 연역적 구조로 재구축한다. 인간의 인식체계를 자연의 완전성 원리와 일치시킴으로써 소통하고, 감응하고, 증폭하고, 전파하고, 낳는다.

◎ 구조는 존재의 짝짓기다. 세상은 원인과 결과, 시작과 끝, 입력과 출력, 작용과 반작용, 여자와 남자, 음과 양으로 무수히 짝지어져 있다. 구조론은 대칭과 평형-포지션과 밸런스 원리에 따른 짝짓기 법칙으로 해명한다.

◎ 구조는 만유의 밸런스다. 존재는 점≫선≫각≫입체≫밀도의 각 단위에 걸쳐 밸런스를 이룬다. 밸런스는 둘이 짝지은 한 쌍이다. 점을 짝지어 선, 선을 짝지어 각, 각을 짝지어 입체, 입체를 짝지어 밀도의 밸런스를 이룬다.

◎ 구조는 문제해결의 우선순위와 접근경로다. 모든 존재는 절대경로와 상대경로를 가진다. 존재의 발생계통을 따라 절대경로를 추적할 수 있고 짝지어진 파트너를 따라 상대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 구조는 만유의 얽힘과 풀림이다. 구조는 정보를 복제하고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보를 압축하고 한편으로 그 압축을 해제한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모태를 가지며 얽힘과 풀림을 통하여 그 자궁에서 유도된 존재다.

◎ 구조는 패턴을 공유한다. 자동차는 동력을 쏘는 활이고, 소설은 이야기를 쏘는 활이고, 피리는 가락을 쏘는 활이고, 사랑은 마음을 쏘는 활이고, 깨달음은 지혜를 쏘는 활이다. 모든 존재는 본질에서 구조가 같다.

◎ 구조는 만유의 목이다. 반드시 지나다니는 목이 있고 트래픽이 걸리는 지점이 있다. 구조는 길목에서 작용을 전달한다. 시장은 목 좋은 곳에서 번창하고, 생명은 목으로 숨 쉬고, 존재는 목을 중심으로 뻗어나간다.

◎ 구조론은 비반복성의 탐구다. 서구정신을 밑바닥에서 규율하는 수학과 인과율은 ‘1, 2, 3..’의 산술증가식 반복성 원리에 기반을 둔다. 구조론은 점≫선≫각≫입체≫밀도로 차원이 비약하는 비반복 과정이다.

◎ 구조론은 시간의 인과율을 공간의 포지션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원인과 결과가 있으면 작용과 반작용이 있고 그 사이에 판정이 있다. 구조체는 원인≫작용≫판정≫반작용≫결과의 다섯 포지션으로 세팅된다.

◎ 구조론은 문제해결의 프로세스를 제시하는 존재의 알고리듬이다. 하나의 존재는 작용반작용 법칙으로 짝 짓고,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압축되며, 엔트로피 보존의 법칙에 의해 그 압축이 해제되며 그 자신을 드러낸다.

◎ 구조론은 대상을 다루는 방법이다. 절대경로와 상대경로를 따라 일관되게 포지션의 우위를 점하여 대상을 장악, 통제, 제어할 수 있다. 원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이끌고, 원하는 대로 판을 짜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구조론은 세상을 원본과 복제본으로 본다. 세상은 작은 알갱이가 모여서 크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본이 무한복제의 빅뱅을 거쳐 크게 이루어졌다. 원본이 복제본을 통제함으로써 우주는 지탱된다.

 

구조론은 자연의 완전성을 탐구하는 과학이다

세상에 완전이 있다. 모든 변화는 완전에서 불완전으로 일방향 진행한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은 그 완전성의 빛이 아니라 그림자다. 인식은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인간의 인식시스템은 원초적 불완전성을 가진다.

그런데도 일정부분 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은 먼저 인식하고 다음 행동한다. 이때 그 인식의 체계는 불완전성을 따르지만 그 행동의 체계는 완전성을 따른다. 인간의 행동시스템은 인식시스템과 별개이기 때문이다.

행동은 인식과 무관하게 본능으로 존재한다.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은 이성의 영역에 속한다. 본능으로 보면 먼저 행동하고 그 다음에 인식한다. 그러므로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본능적 행동에 완전성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인간은 희미한 인식의 가능성을 얻는다. 큰틀에서 ‘인식≫행동’이지만 세부적으로는 경험≫인식≫판단≫행동≫양식으로 구축된다. 그 경험은 행동의 경험이다.

행동은 완전할 수 밖에 없다. 불완전한 행동은 그 행동을 실패로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공한 행동의 경험에서 추상하여 완전성의 패턴을 추출하고 그 완전성을 바탕으로 불완전한 인식을 재구축한다.

백이 주어져 있다면 그 백을 얽어 완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백의 일부인 5에서 작은 완전을 구하고, 그 완전의 성공사례를 모델로 삼아 나머지 백을 일거에 구축한다. 인식은 축적이 아니라 비약이다.

백층짜리 건물을 짓는다면 1층부터 백층까지 부지런히 쌓는 것이 아니라 우선 일층을 확실히 짓고, 그 일층의 완성된 설계도와 거푸집에 곱하기 백을 가하여 자동으로 백층을 얻어낸다. 비약적인 성취가 일어난다.

이는 문명의 발달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비약적, 폭발적, 혁명적인 소통으로 일어남을 의미한다. 하나를 확실히 알면 저절로 열을 알고 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막힌 곳이 뚫리면 기어이 폭발한다.

10년 방랑한 필자가 독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야기를 생산하는 이유는 완전한 하나의 텍스트를 원본으로 삼아 무수히 복제해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원본 하나를 제대로 아느냐가 중요하다.

그림을 하든 음악을 하든 그러하다. 쉬운 목표 하나를 정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과정에 참여하여 혼자 힘으로 해내고 거기서 완전성의 뻑적지근한 느낌을 얻어야 한다. 벅차오르는 충일감을 맛보아야 한다.

그 빛나는 느낌을 얻으면 무슨 일이든 그 진행방향이 어느 쪽인지, 밑바닥에 고인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 또 어느 단계 쯤 와 있는지 직관하여 알게 된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살아있는 지식이다.

그 완성의 느낌을 얻지 못하면, 아는 것이 많아도 난삽해져서 한 줄에 꿰어내지 못한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지 못한다.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모르므로 가치를 평가할 수 없어서 흥미를 잃게 된다.

매일매일 그날의 성취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외긴 했는데 그것이 과연 기억으로 축적되고, 그만큼 진도가 나가주고, 그만큼 지식이 늘고, 나중 써먹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면 학습효과는 없다.

하나의 단어를 외운 것은 학습이 아니다. 더하여 문장을 외고, 나아가 그 문장이 지시하는 상황을 포착하여, 그 상황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가야 진짜다. 하나의 인식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사건이어야 한다.

그 안에 피아의 대결이 있고, 작용과 반작용이 있고, 그에 따른 팽팽한 긴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의 무턱된 암기는 뇌가 거부한다. 입력된 정보에 확장자명이 붙지 않으니 그 정보를 사용할 수 없다.

어렵지만 한번 패턴의 완성에 성공하면 다음부터는 쉽다. 무엇보다 완전성이란 이런 것이다 하는 감을 잡아야 한다. 하나의 작은 씨앗은 물을 주고, 볕을 주고, 싹을 내고, 꽃을 피워서 열매 맺어야 완전하다.

동물이라면 짝을 짓고, 새끼를 낳고, 그 새끼를 길러서 출가시켜야 완전하다. 일 사이클이 시작되고 끝나며 닫힌계의 동그라미가 이루어진다. 그럴 때 마음에 달 하나 뜨는 것이다. 그곳에 완전의 모습이 있다.

작은 하나의 단서가 있고, 상대적인 짝이 있고, 정교한 밸런스가 있고, 핵심이 되는 코어가 있고, 사방으로 망라하는 뻗어감이 있다. 그 지점에서 신의 완전성과 소통할 수 있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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