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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290 vote 0 2017.07.03 (16:56:40)

       

    통제되지 않는다.


    사회의 허다한 분란은 하나의 이유로 일어난다. 인간들이 도무지 말을 안 듣는다. 문제는 그것을 잘못 해석하는 데 있다. 일제강점기라 치자. 일본인이 조선에 왔다. 그런데 조선사람이 일본사람 말을 듣겠냐고? ‘조선인들은 죄다 나쁜사람이로군.’ 이렇게 간단히 규정해 버린다. ‘조선인들은 열등해. 조선인들은 나빠.’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아니 상대방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 태연하게 ‘딸 같은 며느리’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다. 딸처럼 지배하겠다는 말이다. 왜 타인을 지배하려 하지? 심지어 며느리를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미친 거다. 인간은 열다섯이면 부모 곁을 떠나도록 뇌가 세팅되었다.


    나이 열 다섯이 넘으면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게 정상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결혼하는 건데 누군가의 며느리가 된다면 그게 결혼이냐고? 며느리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 시아버지니 시어머니니 이런 단어도 나쁜 거다. 독립적인 인간 대 인간이지 거기 무슨 상하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21세기에 말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권력적 동기가 개입해 있는 것이며, 모든 인간은 독립적인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며, 그 권력은 의사결정권이며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든 말을 안 듣는 게 정상이며, 나이 열다섯이면 부모자식 사이에도 서열은 깨졌으며, 독립하려고 사회로 나아가다가 더 큰 집단을 만나게 되는 게 국가의 존재다.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척력이 걸려 있다. 서로 밀어내려고 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야 한다. 텃세를 부릴 마음이 없더라도 외부인이 들어오면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는다. 통제한다는 것은, 컨트롤한다는 것은 척력을 인력으로 바꾸는 것이다. 척력의 반발력을 밀어낼 정도로 세게 밀어야 인력이 생긴다.


    질을 눌러서 입자로 바꾸고, 입자를 눌러서 힘으로 바꾸고, 힘을 눌러서 운동으로 바꾸고, 운동을 눌러서 량으로 바꾼다. 창의한다는 것은 질을 통제하여 입자로, 입자를 통제하여 힘으로, 힘을 통제하여 운동으로, 운동을 통제하여 량으로 조직해내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척력을 꺾는 억압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창의할수록 창의할 수 없다. 질을 억압하여 입자를 창의할 수 있지만 입자를 억압하여 질을 창의할 수는 없다. 일방향성이다. 그러므로 창의할수록 경직된다. 이런 딜레마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딜레마가 있어야 정상이고 없으면 잘못이다. 풀어서 창의하거나 혹은 억눌러 창의하거나 한쪽만 선택하려고 한다.


    풀면 부족민처럼 자유롭게 망한다. 전혀 창의하지 못한다. 부족민은 자유롭지만 그 자유가 감옥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왜? 아무도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다. 부족민에게도 형이 있고 동생이 있을 것인데 다들 자유로워서 아무도 말을 안 듣는다. 형은 아우의 말을 듣지 않고 아우는 형의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창의가 불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밀어내기 때문이다. 자유인들은 텃세가 심하다. 억압해도 창의는 못한다. 질에서, 입자로, 힘으로, 운동으로, 량으로 층위가 내려가기 때문이다. 쭉 미끄러져서 모두들 량으로 속이려고만 한다. 빌어먹을 한경오들처럼 데이터 장난만 계속하는 것이다.


    구조론이 추구하는 동적균형은 딜레마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이 서로 밀어내고, 배척하고, 불편해하고, 독립하려 하고, 말을 듣지 않는 데서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독일병정들처럼 말을 잘 들으면 망하는 거다. 반발해야 질을 세팅할 수 있다. 질의 창의가 중요하다. 팀을 만들기다. 상부구조가 필요하다.


    딜레마가 없으면 뭔가 불안하고 잘못된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 본능적으로 딜레마를 찾으려고 해야 한다. 애국이니 충성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들은 딜레마를 부정하는 것이다. 노자의 무위니 하는 것도 딜레마를 부정한다. 딜레마는 방향을 자신이 조직하는 것이다. 어느 한 방향으로 몰려가면 흐름에 휩쓸려 버린다.


    방향을 부정해도 안되고 휩쓸려도 안 된다. 어원으로 보면 dilemma는 두 개의 말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카드를 손에 쥐어야 한다. 쉽게 충성하고 복종하거나 혹은 쉽게 반항하고 도주하면 망한다. 합리적인 전략은 충성하되 그 충성의 대상을 자신이 조직하는 것이다. 있는 대상에 충성하지 말고 팀을 만들어낸다.


    족보를 조직하고 그 족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통제한다는 말의 의미는 통제되지 않는다는 기본 전제를 깔고간다는 것이며 이는 원소들에 각각 자유에너지가 걸려있다는 말이다. 에너지가 없는 순종적인 사람은 당연히 쓸모가 없으며 에너지가 있되 방향성을 잃어 통제되지 않는 야생마도 쓸모가 없다. 


    컨트롤은 메커니즘을 쓰므로 쉽지가 않다.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은 오른발과 왼발의 교대를 배우는 것인데 3초만에 가능하다. 그런데 왜 아기는 걸음마를 배우는데 무려 5초도 넘게 걸리는 것일까? 소뇌 안에서 뇌세포들이 서로 경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많은 뇌세포가 간여한다. 우승자를 정해야 한다. 

   

    점차 하나가 남고 나머지는 탈락하여 예비자원이 된다. 죄다 간여하면 망한다. 의사결정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단 한 개의 뇌세포가 컨트롤해야 아기가 바르게 걸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그 하나의 뇌세포가 틀려버리면? 대책이 없다. 그 경우 투수의 볼 컨트롤은 망하는 것이다. 타자는 타격감을 잃어버리고 만다.


    타자가 한 번 감각을 잃어버리면 저절로 복구되지 않는다. 이게 딜레마다. 많은 뇌세포가 간여하면 안 된다. 한 개가 도맡아야 하지만 그 한 개가 망가지면 대책이 없다. 결국 망한다. 방법은 경쟁에서 탈락한 예비자원 중에 하나가 다시 책임을 맡고 임무교대 바톤터치를 하는 것이다. 이런 역할교체는 시간이 걸린다.


    투구폼을 잃어버리거나 타격감을 잃게 되면 슬럼프가 꽤 오래간다. 왜냐하면 소거법을 쓰기 때문이다. 후보들을 하나씩 탈락시켜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보수꼴통이 된다. 예비자원을 죄다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소모품이라서 복구가 안 된다. 의사결정능력은 갈수록 망가지는 거다. 


    나이가 들면 고집만 남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이 이와 같아서 어떤 것을 분명히 할수록 망가지게 된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자역학의 이중성을 갖추어야 한다. 중첩상태에 자신을 두고 적절히 변해야 산다. 우디 알렌의 이레셔널 맨에서 여학생의 정언명령과 대학교수의 정언명령이 충돌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둘 다 도덕을 추구하고 범죄를 미워했는데 결과는 반대로 된다. 이는 서구적인 사유다. 동양이라면 주역의 음양론을 배워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한다. '악은 제거해야 해.' 이건 영화에 묘사되는 칸트의 정언명령이다. 동양이라면 악은 선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한다. 악 속에는 선이 숨어 있다.


    주역을 배운 강희제는 어떤 사람이 선을 행했다 하면 그 이면의 악을 보려고 했고 어떤 사람이 악을 행했다면 그 이면에 숨은 선을 보려고 했다. 악을 행한 것이 다수를 위해 총대를 맨 즉 선인지도 모른다. 선을 행한 것이 명성을 탐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전한 말에 신을 건국한 왕망이다.


    명성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식을 죽였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워낙 올바른 성인이라서 법을 어긴 자기 자식까지 처벌했다고 말했지만 그 반대였다. 명성을 위해 자식을 희생시킨 흉악범이었다.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다. 그러나 강희제의 주역도 틀린 것이다. 선과 악의 이중성만 보았지 방향성은 못봤다. 


    막연히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는 게 아니다. 최초의 상태는 에너지가 걸린 상태이며 그 에너지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이중성도 아니다. 그 에너지는 타인을 밀어내지만 그것이 악은 아니다. 개가 짖는다고 해서 나쁜 개라고 말할 수는없다. 개가 짖는 것은 겁을 먹어서다. 사람을 해치려는 것은 아니다. 


    일단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밀어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낯선 곳을 방문했는데 부족민이 밀어내지 않고 쉽게 받아들였다면 음식에 독을 탔다. 최초의 상태는 밀어내는 상태이며 그것은 선이나 악이 아니고 에너지가 걸린 상태이며 이후는 통제하기에 따라 악도 되고 선도 된다. 통제는 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두 방향으로 오락가락하면 안 된다. 먼저 외부를 물리치고 다음 내부를 다스린다. 즉 먼저 외부의 나쁜 것에 악을 행하고 다음 내부의 우리편에 선을 행하며 그 악은 외부인에게 상대적으로 악이고 그 선은 내부인에게 절대적으로 선이다. 이는 선과 악 사이에서 모호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떳떳하고 분명한 것이다.


    그러려면 높은 포지션에서 착수해야 하며 낮은 포지션에서 착수하면 망한다. 부족민을 상대할 때는 대표자를 만나야 한다. 보통은 부족민 중에 가장 신분이 낮은 만만한 사람과 계약을 맺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와서 그 계약을 엎어버린다. 부족민은 역시 믿을 수가 없어 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자신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족민을 상대할 때는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신분을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부족민은 평등하여 신분이 없기 때문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과 협상해야 하는데 부족민은 모두 평등해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협상과정에서 신분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이쪽에 내적 질서가 있음을 보이고 그것을 복제하여 상대편도 내적질서를 갖추도록 유도해야 한다. 부족민과 협상하는 과정은 부족민에 족장을 만들어주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런 복잡한 사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통제한다는 것은 소거법을 써서 한 방향으로 점차 압축해 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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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향성은 절대성과 상대성을 동시에 깨닫는 것입니다. 절대성에 매몰되면 아무것에나 충성하고 상대성에 매몰되면 의심하다가 끝납니다. 딜레마는 둘 사이에 중립이 아니며 양다리 걸치기 이중행동도 아니며 우선순위를 지정하여 교통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메커니즘을 세팅한 다음에는 일방향으로 쭉 갑니다. 즉 충성한다는 말입니다. 그전에 평등한 구조를 갖춘 좋은 팀을 만들어놓고 시작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시합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면 반항하고 그러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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