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초대 우리는 어떤 것을 그것으로 규정하는 성질이 그것 자체에 내재한다고 믿는다. 사과를 사과로 규정하고 복숭아를 복숭아로 규정하게 하는 조건들은 사과 안에 들어 있고 복숭아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물物 자체에 고유한 것이며 우리는 어떤 주어진 대상을 잘게 쪼개어 해체하는 방법으로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 껍질을 벗기면 열매가 나온다. 거죽을 벗겨 보면 속을 알 수 있다. 관찰과 분석이라는 방법으로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데 만약 그 조건이 사과 밖에 있고 복숭아 밖에 있다면? 매우 피곤해지는 거다. 추리만화라도 그렇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하고 선언해야 한다. 반대로 ‘범인은 이 밖에 있다.’고 선언하면? 황당해진다.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통제가능하다는 것이며 밖에 있다는 것은 통제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지선다형 시험문제와 같다. 넷 중의 하나를 고르면 된다. 답은 이 안에 있다. 그런데 반대로 답이 이 밖에 있다면? 곤란해진다. 이에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몽땅 뜯어고쳐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인식체계 전반을 송두리째 갈아엎어야 한다. 결정적 사태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바로 양자역학의 세계다. 우리는 사과를 먹어 보고 그것이 사과라는 사실을 안다. 그것을 그것으로 규정하는 조건은 사과의 맛이다. 맛은 사과 내부에 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방법으로 세상을 상대해 왔다. 내부를 쪼개 보고, 분석해보고, 들여다보는 것이다. 누가 그대에게 묻는다. ‘너희 둘 사귀냐?’ 이때 파트너의 대답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파트너는 사귄다고 말할 수도 있고 사귀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확률에 달려 있다. 어느 쪽이든 관측자의 등장 때문에 방해받은 것이다. 계획은 무너졌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일이 이런 양자적 상황으로 있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 중첩상태로 존재한다. 누가 질문하면 결정된다. 안철수가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안철수는 착한 사람으로 혹은 나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질문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양자세계에서 물질은 애매한 중첩상태로 있다가 질문을 당하면 둘 중 하나로 결정된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런 것을 싫어한다.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을 좋아한다. 외국인들이 한식을 먹을 때는 당황하게 된다. 내가 직접 구워 먹으라고? 내가 직접 상추쌈을 싸 먹으라고? 국에다 밥을 말아 먹으라고? 그 문턱은 높다. 한식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여전히 외국인들은 비빔밥을 비비지 않고 먹는다. 비비는 방법을 설명해줘도 비비지 않는다. 숟가락에 힘을 주는 훈련이 안 되어 있다. 숟가락으로 음식을 사정없이 짓눌러 으깨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충격적이다. 경악을 금치 못할 사태다. 그러나 한 번 하게 되면 또 적응하는 게 인간이다. 돈까스를 꼭 칼로 썰어서 먹어야 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식당에서는 남들이 쳐다볼까봐 기분대로 입으로 고기를 찢지 못한다. 김치는 찢어먹지만 말이다. 안이냐 밖이냐? 우리는 그동안 안의 세계에 적응하여 살아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밖의 세계를 만났다. 우리는 그동안 조리되어 접시에 담긴 음식만 먹어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직접 불판에 구워서 가위로 잘라먹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용감하게 그 세계로 건너갈 것인지는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설명한다. 안에 담겨진 세계는 입자다. 입자 속에 힘과 운동과 량이 들어 있다. 입자를 깨보면 쏟아져 나온다. 질은 다르다. 질은 포장되어 있지 않다. 당신은 관측자다. 어떤 대상이 관측자와 일대일로 맞서면 입자다. 그런데 맞서 있지 않다. 우리 주변의 사물은 관측자에 맞서 있다. 컵이나 볼펜이나 스마트폰이나 다 관측자인 당신과 맞서 있다. 우리는 그 세계에 적응해 있다. 그러나 예술이나 정치나 사랑이나 역사나 이런 쪽으로 가면 심오해진다. 전혀 맞서 있지 않다. ‘1 더하기 1은 얼마냐?’ 하고 물으면 ‘2’라고 대답하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세계는 다르다. ‘1 더하기 1은 얼마냐?’ 하고 물으면 ‘얼마로 맞춰드릴까요?’로 받는다. 혹은 ‘얼마까지 보고 오셨어요?’ 하고 되묻는다. 난감하다. 가격비교 사이트에서 가격을 알아보고 왔어야 한다는 거다. 젠장! 난 그런 거 모르는뎅? 당황하게 된다. 그렇다. 깊이 들어가면 세상은 온통 이렇다. 우리는 귀찮아서 한 단계를 생략하고 건너뛰고 얼버무렸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절차를 짚지 않았다. 왜? ‘너희 둘 사귀냐?’하고 물어오는 것은 1회다. 다음부터는 커플로 인정되어 묻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곤란한 일회는 대개 부모에게 위임한다. 첫 등교일은 엄마가 학교까지 같이 와준다. 친절하게 오리엔테이션을 해준다. 주변의 도움으로 결정적인 관문을 넘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하니 편하다. 근데 정치판은 다르다. 정치의 세계에는 오리엔테이션이 없다. 안철수의 엄마는 대선출마장에 따라와 주지 않았다. 요리된 음식만 먹던 안철수는 그 비빔밥을 끝내 비비지 못했다. 어쩌겠는가?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곤란한 첫 번째 관문을 엄마에게 맡기고 의존하겠는가? 아니면 스스로의 길을 가겠는가? 당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려면 인생을 정치해야 한다. 남들이 물어오기 전에 잽싸게 커플임을 선포해버려야 한다. 미리 가격을 알아보고 용산전자상가에 들러야 한다. 비빔밥을 용감하게 비비고 쌈밥을 용감하게 싸야 한다. 난 아직 칼질이 서툴러 양식집에 안 가지만 당신은 가야만 한다.
우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문만 보이면 일단 열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술은 그 문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 문을 열면 안 됩니다. 문턱을 높이는 게 예술입니다. 아무나 못 들어오게 막는 게 예술입니다. 우리는 예술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풀어버린다는 것이며 안으로 진입한다는 것입니다. 그걸 막는 게 예술이라니깐요? 아무나 함부로 못 들어오게 닫아걸어야 한다니깐요. 아직도 예술을 보고 '난 이해가 안 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해하지 말라니깐요. 답이 정해져 있고 하나를 찍으면 되는 세계에 적응해 있는 안철수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장벽입니다. 그 세계는 확률에 지배되며 그 이득은 내게 독점되지 않고 모두에게 나누어집니다. 꾸준히 확률을 높여온 문재인이 먹었습니다. ‘너희 둘 사귀냐?’ 하고 물으면 ‘아닌뎅. 우린 그냥 친군뎅.’ 하고 고개를 가로젓던 유권자들이 ‘우리 이니와 사귀는뎅!’ 하고 대답해 버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