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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2]이상우
read 226 vote 0 2025.01.07 (10:34:34)

학부모상담 만렙인 나도 올해 맡은 아이가 워낙 레벨 최강이라 다들 걱정이 많았다. 우리 학년인 선생님들이 반을 뽑을 때 손이 떨리더라. 나는 늘 그렇듯이 금쪽이 나오면 바꿔드릴테니 걱정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1/4의 확률을 뚫고 내가 금쪽이를 뽑았다.
금쪽이의 부모님은 이전에도 학교에 비협조적이고, 우리 아이가 잘못된 것은 학교폭력 피해 때문이고, 정상적인 아이를 교사가 이상한 애 취급하는 게 문제고 그래서 우리 애가 나빠진다는 식으로 나왔다.
학교에서 꼭 오시라고 해도 생업이 바쁘니 못오시고, 연락을 드려도 연결이 잘 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이 말만 듣고 퇴근 후에도 저녁 식사 즈음에 민원 문자를 보내고, 몇 분 안지나서 바로 전화를 해서 아이 변호사처럼 내게 따졌다. 그렇다. 부모입장에서 아이 말을 믿지 누구 말을 믿을까? 내새끼 내가 지키지 누가 지킬까?
이런 악조건 상황에서도 10개월이 지난 지금 아이는 매우 잘 지내고 있다. 사회성 부분에서 너무 좋아져서 자해와 괴성과 교실 이탈, 부모에게 전화, 교사에게 막말하고 친구들에게 잘못 덮어씌우는 행동들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런데 적어도 학생의 긍정적인 측면은 부모에게 사진으로 메시지로 종종 보내고, 답장이 없어도 계속 연락했다. 짝사랑 같은대화였지만 그럼에도 교사는 아이를 학교에서 책임지고 학부모의 신뢰를 얻으면 학생이 더 나아지는 것은 자명한 상식이기에 그렇게 했다.
학생의 문제행동이 확 줄은 것은 내가 맡은 지 한 달 만이었지만, 역시 문제 하나가 해결되니 다른 행동이 삐죽 삐죽 나왔다. 모둠활동에서 아무 것도 안하던 애가 모둠활동을 하니 다른 애들이 불편해 한다. 친구들과 좀 친해지니 여기 저기 다 낄려고 하다가 애들과 부딪힌다. 코로나를 직격으로 맞은 입학식 상실 2020년 1학년이었던 지금의 5학년 애들은 친구 관계가 좁고, 자신과 타인의 경계 인식, 자기의 책임과 타인과의 협조얻기에 매우 미숙했다. 그러니 다툼이 안생길 수가 없고, 요즘 어른들이 그렇듯이 '그냥, 아예 안보고 싶다', '쟤랑 말하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회피한다. 차라리 미워하면서도 계속 부대끼면 나아질텐데, 회피는 답이 없다. 애가 이러면 부모라도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부모들 중에서도 우리 애가 더 피해다, 아예 두 애를 떼놓아 달라고 부탁이 아닌 지시를 한다. 양육 전문가인 부모가 교육 전문가인 부모에게 훈수를 둔다. 이 때문에 올해 가장 격렬하게 논쟁한 부모는 금쪽이 부모가 아니라, 자기 자녀가 금쪽이 성질이 있는지 잘 모르는 아버지였다.
그래도 어쩌랴. 부대낄 것은 부대끼고, 물러 설 때는 물러서고, 기다릴 때는 기다리고, 기회를 보고 다시 관계의 접촉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사니 늘 그렇듯이 심호흡 한 번 하고, 숨을 고르고 다시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 결과 아이들이 전반적으로 나아졌다. 특히 내 반이 되면 남여 학생이 잘 어울리고, 내향적인 아이들도 외향적으로 되고, 소심한 애들도 자기 주장을 잘한다. 물론 다 되지는 않더라. 아직도 별 것 아닐 수 있는데, 당황하면 눈물만 흘리고 그저 버티기 하는 애도 있고, add라서 과격한 행동을 하진 않아도 주의 집중이 안되고 과제를 빼먹고 딴소리 하는 애도 있다. 이 역시 나보고 겸손하라는 하늘의 뜻이고, 아이를 바꾸기 전에 먼저 아이를 관찰하고 이해하라는 신의 계시로 여겼다.
평생 실패만 하고 살았던 페스탈로찌, 아이들과 함께 죽음의 가스실로 의연하게 걸어갔던 야뉴슈 코르착, 아이들과 삶의 글쓰기를 한 이오덕, 아이들의 삶 그 자체로 문학을 살았던 권정생, 이런 교육의 선구자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그분들의 어깨, 아니 발 뒤꿈치를 붙들고 조금씩 나아갈수 있다. 아직도 내겐 12년의 남은 교직인생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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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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