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란 무엇인가? 천재 하면 아인슈타인이다. 물리학을 했기 때문이다. 과학의 으뜸은 물리학이다. 물리학이 바뀌면 천지개벽이 된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듯이 물리학에 연동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 바뀌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다 바꾸어야 한다. 노벨상 중에도 물리학상이 가장 세다. 먼저 천지분간을 해야 각자의 일에 착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학의 출발점은 에너지다. 에너지로 시작해서 에너지로 끝난다. 에너지만큼 중요한 단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검색해도 별 내용이 없다.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란다. 이건 너무 단순한 설명이다. 그렇다 치고 일은 뭔데? 일은 힘을 가해 물체를 움직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체의 움직임은 우리의 눈으로 관측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계 내부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관측되지 않는다. 실패다. 우리는 근간 양자역학의 성과로 대거 보고되고 있는 거대한 일의 세계에서 일부 말단부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일을 모른다. 일이라는 표현은 부족하고 구조론으로는 사건이다. 일은 사건의 일부를 구성한다. 상부구조가 있고 하부구조가 있다. 상부구조에서 더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그 부분은 관측할 수 없다. 에너지는 안에서 일한다는 뜻인데 하부구조는 그 일이 밖으로 드러나 보인다. 진짜 에너지는 보지 못하고 운동에너지와 같이 드러난 부분만 보는 게 일이다. 일의 관측수단은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과 시간은 같다. 방 안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기차가 몇 칸인지 센다면 1초에 한 칸이 지나갈 때 10초에 열 칸이 지나간다. 이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단번에 열 칸을 셀 수 있다. 이는 공간이다. 공간이냐 시간이냐는 관측자의 개입 정도다. 관측자를 고정시키고 관측대상을 움직이면 시간이고 반대로 관측대상을 고정시키고 관측자를 움직이면 공간이다. 관측자가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면 공간의 그림이 된다. 관측자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시간의 음악이 된다. 에너지는 그 시공간의 방향을 틀 수 있는 정도다. 일의 진행은 공간이 먼저고 시간이 나중이다. 양자화 때문이다. 공간은 양자화되어 있고 시간은 양자화가 깨져 있다. 일은 양자화 상태에서 가능하며 양자화가 깨지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러한 방향제한 때문에 비가역성이 성립한다. 엔트로피다. 공간은 두 방향이고 시간은 한 방향이다. 공간은 관측대상이 여러 방향으로 벌여져 있고 관측자의 눈도 여러 방향을 동시에 본다. 이론적으로는 여러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없다. 사실은 인간의 뇌가 프로그램을 돌려 처리하는 것이다. 뇌가 한 픽셀씩 읽어야 되는데 뇌가 프로그램을 돌려 좌우를 동시에 본다. 편법을 쓰는 것이다. 시간을 듣는 것은 귀다. 귀는 여러 방향이 없다. 공간은 각으로 파악되며 각은 두 방향을 가진다. 시간은 선으로 파악되며 선은 한 방향을 가진다. 공간은 시간에 방향이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입자는 그 공간에 또다시 방향이 하나 더 추가된다. 축과 대칭이 성립해있기 때문이다. 질은 안과 밖의 경계가 있으므로 또다시 방향이 추가된다. 공간은 힘이고 입자로 나아가고 질로 나아갈수록 더 많은 방향을 가진다. 구조론으로 보면 량이 기점 1일 때, 시간은 운동방향의 선을 추가한다. 공간은 힘의 각을 추가하고 입자는 대칭의 축을 추가하고 질은 계를 추가한다. 량에서 질로 갈수록 방향이 더 많다. 매개변수가 많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에너지는 이 중에서 공간과 시간으로 판단되는 힘과 운동 그리고 량이다. 많이 놓치고 있다. 질과 입자는 양자역학 단위에서 접근된다. 계와 핵에 대한 정보를 가진다면 에너지의 더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 정리하자. 에너지는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계의 의미는 주어진 관측대상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거다. 구태여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그게 고체덩어리 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유체상태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용기에 담겨있지 않으면 그것을 지목하여 가리키기 어렵다. 또 에너지는 사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양자화되어야 통제가 가능하다. 우리는 이러한 계의 통제가능성을 논하지 않는다. 엔트로피를 논하며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라는 표현을 쓰지만 왜 사용을 못하는지 이해를 못한다.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내부에 질서가 있다는 말이다. 계와 축과 대칭과 방향과 순서가 있어야 그 계를 정하고 축을 움직이고 대칭을 조작하고 방향을 바꾸고 순서를 바꿔 통제할 수 있다. 그냥 총알 한 개와 장전된 총알 한 개는 다른 것이다. 장전된 총알은 바로 사용할 수 있다. 가치가 있다. 그냥 총알 한 개는 가격이 백 원이다. 요즘은 올라서 500원쯤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장전된 총알과 그냥 총알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만치 에너지를 모른다. 에너지에도 급수가 있다. 좋은 에너지와 쓸 수 없는 에너지가 있다. 그냥 물과 용기에 든 물의 가격이 같을 리 없다. 생수값 싸지 않다. 질은 용기에 담긴 물이며 입자는 운반 손잡이까지 있는 경우다. 힘은 컵처럼 아가리가 있는 것이며 운동은 속도조절이 가능한 경우다. 병에 든 콜라는 일정한 속도 이상으로 컵에 따를 수 없다. 량은 그냥 물이다. 질을 사면 용기와 손잡이와 아가리와 조절기능과 물은 묻어온다. 입자는 다르다. 용기에 담아 포장하지 않고 그냥 손잡이만 줘서 들고가라고 한다. 연탄을 들고 오다가 옷에 묻는다. 힘은 컵을 갖고 와서 직접 담아가라고 한다. 운동으로 량으로 갈수록 통제하기가 어렵다. 에너지는 계의 통제가능성이니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질이 가장 질좋은 에너지라 바로 쓸 수 있다. 과일을 팔아도 균일하게 선별하여 용기에 담아 세척하고 포장해서 팔아야 한다. 그냥 밭에 있는 배추를 뽑아가라고 하면 곤란하다. 에너지는 일을 하는 능력인데 일이 더 많아진다. 우리는 공간일과 시간일에 대해서 알 뿐 그 이상의 일에 대해서는 모른다. 이런 원리는 정치판에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은 그냥 박근혜 찍어라고 하는데 민주당은 두 번 생각하고 공부하고 노무현 찍어라고 한다. 가공되지 않은 상품을 파는 것이다. 지도를 줘도 찾아갈까 말까 한데 나침반만 주고 알아서 가라고 한다. 불친절하다. 젊은이는 공부해서 길을 찾아가는데 노인은 못 간다. 민주당 안 찍는다. 모든 일은 계를 정하고 축을 정하고 대칭을 조직하고 공간과 시간으로 풀어내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내가 옳으니까 따라오라는 식의 우격다짐은 곤란하다. 국민을 졸로 만든다. 에너지를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은 기술이며 노빠만이 할 수 있다. 노빠는 나침반에 지도까지 주고 등불까지 준다. 떠먹여준다. 입가심으로 감주도 한 사발 준다. 그래야 한다. 우리는 에너지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다. 정치는 옳고 그름의 대결이 아니라 에너지의 조직이다. 프로가 달라붙어야 이긴다. 피아구분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계의 설정이다. 용기에 담는 절차다. 주도권장악을 해야 한다. 입자다. 축을 만드는 것이다. 진보의 문화와 보수의 경제를 동시에 아울러야 한다. 이는 힘이다. 투 트랙으로 가지 않으면 반드시 몰린다. 힘은 방향을 트는 데서 얻어지며 쉽게 말하면 왼쪽 깜박이 넣고 오른쪽으로 핸들 꺾는게 힘이다. 왼쪽 깜박이로 노빠를 불러모으고 오른쪽 깜박이로 경제성장한다. 그래야 표가 나온다. 경제성장 안 되면 표가 안 나온다. 여론조사는 양호하게 나오는데 결정적으로 투표를 안 한다. 왜? 굳이 투표를 해야할 이유가 없잖아. 옳기는 옳은데 그래서 지지하는데 왜 귀찮게 투표하라그래? 내 월급이 오르냐 내리냐가 걸려야 발품 팔아서 투표장까지 가는 것이다. 이런 정밀한 세팅이 없이 막연하게 나를 따르라 하는 무뇌진보 오바질은 답이 없는 수작이다. 운전사가 핸들을 잡아도 그냥 막 돌리는 게 아니고 시동 걸고 기어 넣고 엑셀레이터 페달 밟아주고 브레이크에 발 올리면서 그다음에 핸들 돌린다. 수순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왜? 방향의 존재 때문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는 다섯 매개변수가 있고 다섯 방향이 있다. 그중에 하나둘 알고 공간 시간 알고 다 아는 것처럼 설레발이 치면 안 된다. 세상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세상을 우습게 보지 말라. 바로 털린다. 역이 있고 그 역의 역이 있다. 뒤통수 치려고 노리고 있다. 운전 배워야 한다. 방향의 엮임에 의한 계의 통제가능성이 에너지다. 방향이 엮여 있을 때 그 엮인 상태를 해제하는 상태로 인간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방향은 다섯 번 엮인다. 함부로 손대면 더 엉키고 수순대로 풀어야 된다. 정치도 그렇고 연애도 그렇다. 함부로 들이대다가는 채이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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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사가 핸들을 잡아도 그냥 막 돌리는 게 아니고 시동 걸고 기어 넣고 엑셀레이터 페달 밟아주고 브레이크에 발 올리면서 그다음에 핸들 돌린다. 수순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왜? 방향의 존재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