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인간은 에너지를 추구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에너지를 표현할 적절한 어휘가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열정이나 패기나 기운이나 주체나 존엄으로 말해질 수 있지만 대개 어색하다.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근원의 생명력이며 그 원초적인 생명력을 나타낼 수 있는 좋은 표현은 없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이 질문이 던져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에너지 넘치는 꼬마에게 어울리는 질문은 아니다. 무언가 원한다는 것은 그 원하는 대상이 지금은 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결핍이다. 불행하다. 불행한 사람에게 묻는다면 행복이라는 답을 미리 정해놓고 답정너를 행사하는 셈이 된다. 어떤 좋은 것은 그 자체로 설명될 수 없다. 나쁜 것은 질병이나 불운이나 가난이다. 질병에 걸린 환자는 건강을 원한다. 불운한 사람은 행운을 원한다. 가난한 사람은 재화를 원한다. 결핍된 사람에게 필요한 건강과 행운과 재물을 설명하기 쉽다. 노예에게 해방을 말하기는 쉽다. 이미 해방된 자유인에게는 뭐라 말할까? 인간은 언제라도 근원의 생명력을 원하며 그것은 넘치는 에너지다. 그것은 활력이나 열정이나 패기다. 마음이 들뜬 상태다. 호기심과 모험심과 도전정신이 충만한 상태다. 인간은 에너지를 원하며 이미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질병을 앓아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흡연의 해악을 납득시키기 어렵다. 선교사는 예배가 끝나자마자 예배당에 모인 조선인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조선인들은 참 바쁘게 사는가 봐. 그게 아니었다. 예배당 문을 나서자마자 주변에서 빈둥대고 있었다. 사실 조선인들은 좀이 쑤셔서 밖으로 뛰쳐나왔을 뿐이다. 좁은 공간에 앉아있으니까 갑갑했던 것이다. 노예는 해방을 원하는가? 해방은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그다음 계획은 없다. 자유인에게는 노예가 모르는 특별한 것이 있다. 활력이 있고 패기가 있고 자신감이 있다. 노예가 해방된다고 해서 바로 활력을 찾고 패기를 가지고 자신감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해방된 노예는 여전히 주눅 들어 있다. 여전히 의기소침해 있다. 진짜는 다른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원한다고 말한다. 이미 주눅들어 있다. 의기소침해 있다. 왜? 그 질문이 노예에게 던져지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불행한 사람을 향하기 때문이다. 왜? 대칭원리 때문이다. 인간은 대칭을 통해 사유한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지금은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결핍을 뜻하며 인간은 불행을 떠올리게 된다. 불행 반대는 행복이다. 이는 바른 사유가 아니다. 답정너에 걸렸다. 사유의 함정이다. 노예 말고 자유인에게 질문하라. 자유인은 이미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관찰해보면 그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다. 노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유인의 자신감, 패기와 열정과 생명력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노예에게 설명할 수 없다. 왜? 노예는 그것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부족민에게 이 사람들은 왜 좋은 자동차 놔두고 변변찮은 자전거를 찾는가 하고 묻는다면 넌센스다. 쇠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는 인도인들은 왜 좋은 불고기 놔두고 감자카레를 원하는 거지? 이런 말은 실패다. 언어가 망했다.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당신에게 좋은 것은 보상이다. 밥이나 돈이나 칭찬이나 지위나 평판이다. 이미 노예상태에 빠져 있다. 노예와의 대화는 당연히 실패다. 보상받으려고 하는 자의 대화는 의미 없다. 강아지와의 대화는 부질없다. 행복한 돼지와의 진지한 대화는 애초에 가능하지가 않다. 인간은 징벌받는 것을 싫어하고 보상받는 것을 좋아한다. 행복은 보상이다. 그 보상은 누구에게서 주어지는가? 왜 주는 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받는 자가 되려고 하는가?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주는 자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행복은 받는 것이며 받고자 한다면 이미 틀려먹었다. 행복할 때는 말년병장이 제대할 때다. 그 행복을 누리기 위해 두 번 현역병으로 입대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노예의 행복을 추구할 이유는 없다.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마라. 그것은 비참한 것이다. 개한테 던져지는 뼈다귀 같다. 살점이 하나라도 붙어 있으면 노예는 행복하다. 자유인에게는 노예가 모르는 특별한 것이 있고 그것은 언어로 설명하기가 힘든 것이다. 군자의 호연지기를 소인들에게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이다. 정상에 올라 전모를 볼 때 인간은 진정한 경지에 도달한다. 그 시선으로 볼 때 행복은 참 초라한 단어다. 진지한 사람의 대화에는 낄 수 없다. 인간은 기운을 원한다. 세상의 어떤 약점을 보았을 때 기운을 얻고 용기를 낸다.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그 기운을 느낀다. 폭탄을 손에 든 독립투사는 조선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안다. 가슴을 뜨겁게 하는 그것이 있다. 내가 배척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친구가 소리쳐 나를 불러줄 때다. 그럴 때 엄마 곁의 아기처럼 천진난만할 수 있다. 아기와 엄마는 무한한 믿음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호응하는 존재이며 언제라도 호출받기 원한다. 부름을 받고 응답을 하는 상호작용의 구조 속에 있기를 원한다. 그 상태는 들뜬 상태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다. 세상의 슬픔을 곧 나의 슬픔으로 느끼고 세상의 기쁨을 곧 나의 기쁨으로 느끼는 상태다. 커다란 원통을 굴리는 서커스 소년처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줄타기하는 곡예단의 소녀는 허공에 드리워진 굵은 밧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쳐다보는 1천 개의 눈동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만 번 연습하던 과거와 연결되고 더 큰 무대에 도전하는 내일의 성공과 연결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충일한 상태가 된다. 발바닥에서부터 기운이 차오른다. 에너지는 안정화되려는 성질이다. 들뜬 상태라야 안정될 수 있다. 곡마단의 소녀가 줄 위에 오르면 들뜬 상태다. 가수가 무대에 오르면 들뜬 상태다. 연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야 들뜬 상태가 되고 화가는 붓을 들어야 들뜬 상태가 된다. 막 시작하려는 준비된 상태다. 언제라도 마음이 그 상태로 들어갈 준비가 호연지기다. 행복은 안정을 의미하지만, 안정상태는 들뜬상태를 통과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노예에게는 들뜬상태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주눅 들어 있고 위축되어 있다. 에너지는 안정화되려고 하지만 지금은 안정되어 있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널리 연결되어 하나의 긴밀한 계를 이루고 있다. 다른 것과 싱크되어 있어야 한다. 어원으로 보면 system은 쌍 sys으로 서는stem 것이니 계系를 이룬 것이다. 이것과 저것이 링크되어 동기화된다. 이것이 가면 저것도 간다. 양자화되어 있는 상태다. 인간은 긴밀하게 연동되어 무리를 이루고 함께 움직이기를 원한다. 진보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기를 원한다. 함께 대오를 이루고 당당하게 나아가기 원한다. 행복을 꿈꾸는 노예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특별한 세계다. 원한다는 것은 바란다는 것이고 바란다는 것은 뻗는다는 것이다. 철학Philosophy의 Philo-는 손을 뻗는 것이다. 지혜를 갈망하여 손을 뻗는다. 당신이 무언가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다. 손을 뻗어서 그것에 닿기를 원한다. 닿으면 둘이 연결된다. 동기화된다. 양자화된다. 합쳐서 하나의 계를 이룬다. 그럴 때 이것이 가면 저것도 간다. 파트너가 가면 당신도 같다. 두 사람의 마음이 동기화되면 그것이 사랑이다. 두 사람이 양자화되어 하나의 커플이 된다. 하나의 의사결정의 단위를 이루면 호랑이도 무섭지 않은 커다란 에너지를 얻는다. 인간은 그런 생명력을 원한다. 인간은 행복을 바란다고 말들 하지만 물어보니까 하는 소리다. 그저 그렇게 말할 뿐이다. 질문하는 사람은 높은 사람이고 응답하는 사람은 낮은 사람이다. 인간은 높은 사람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인간이 받는 보상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물어보면 보상받기를 원하며 그 보상의 내용은 행복이지만 그런 것은 진짜가 아니다. 인간은 언제라도 신과 연결되기 원한다. 연결되면 양자화된다. 동기화된다. 그럴 때는 들뜬다. 들뜬 상태는 불안정하다. 그러면서 안정을 추구한다. 안정은 보상받는 것이며 곧 행복이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신과 연결되고 자연과 연결되고 엄마와 연결되고 세상과 연결되고 그러므로 안정을 지향하는 것이다. 연결이 끊어지면 소외와 고립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연결의 끊어짐을 두려워한다. 끊어지려 하는 상태는 불안정이며 연결은 안정된 것이며 그러나 연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게임이 시작된다. 인간은 그 게임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 게임에서의 승리와 보상은 중요한 게 아니다. 게임에 참여할 때 마음이 들뜨게 된다. 정선 카지노에서 돌아다니는 아저씨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은 당연히 돈을 따기 원한다고 말한다.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곧 터지게 되어 있는 좋은 자리 찜해놨다고 자랑한다. 속지 말라. 그건 거짓말이다. 설사 잭팟이 터진다 해도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왜? 그들이 잭팟을 원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당신이 질문했기 때문이다. 잭팟이 터진다고 대답해야 그럴듯한 대화가 된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 대화에 구색을 맞추려는바 답정너다. 그들은 대화가 어색해지지 않기를 원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들은 마음이 들뜬 상태를 원한다. 슬롯머신 앞에 앉으면 쫄깃해진다. 다리를 배배 꼰다. 심장이 쫄깃한 상태다. 양자화된 상태를 그들은 원하는 것이며 그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으니 잭팟이 터진다는 둥 되도 않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카지노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다. 그 에너지와 연결되기를 원한다. 거대한 에너지와 자신을 동기화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명력이 된다. 촌놈은 불안정하고 향원은 안정되어 있다. 촌놈은 불안정하므로 에너지가 있고 향원은 안정되어 있으므로 에너지가 없다. 청년 노무현은 불안정하므로 에너지가 있고 부자 안철수는 안정되어 있으므로 에너지가 없다. 인간은 촌놈이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모른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노무현 되기를 원하다가 안철수 된다. 노자는 불안정을 지향한다. 방향이 틀렸다. 에너지는 불안정에서 안정으로 가는 과정에 얻어지는 것이며 안정에서 불안정으로 가는 노자는 거꾸로다. 물은 불안정하고 돌은 안정돼 있다. 노자는 불안정한 물이 안정된 돌을 이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돌의 안정을 추구하는 존재이지 물의 불안정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을 봐야 한다. 과정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방향이다. 에너지는 방향성에서 유도된다. 돌을 보든 물을 보든 방향을 보지 못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인간은 촌놈의 불안정을 원하는 게 아니라 촌놈의 폭발하는 에너지를 원하는 것이다. 변방은 촌놈의 영토다. 그곳에 머무르는 자는 노예다. 촌놈은 도시로 쳐들어가야 한다. 공자는 변방에서 중심을 치고 노자는 변방에서 돗자리 깔고 장사하기 원한다. 구조론은 방향이 중요하다. 인간은 자유롭기 원하지만, 자유는 인간의 진짜 목적이 아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의 특별한 에너지를 원한다. 생명력을 원한다. 촌놈의 자유는 상당 부분 포기된다. 노무현은 그 싸움에서 많은 것을 포기했다. 인간의 가치는 자유를 포기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마이너스다. 정상에서는 자유롭지만, 그곳에서는 많은 것이 포기되어 있다. 방향성을 잃은 노자의 막연한 자유는 허무로 귀결된다. 자유는 인간의 진짜 목적이 아니다. 자유는 탑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이며 바텀포지션과 대결하게 된다. 어떻게 에너지를 유도할 것이냐가 철학의 근본문제다. 에너지는 게임에서 얻어진다. 어떤 게임을 할 것인지는 각자가 정한다. 게임 체인지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근본이다. 노예가 추구하는 행복게임에서 자유인이 추구하는 존엄게임으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노예는 내전을 하고 자유인은 외전을 한다. 왜 내전인가?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의당은 안에서 내전을 하는 집단이고 민주당은 밖으로 나가서 세계를 치는 집단이다. 민주당은 에너지를 누리는 자유인의 정당이며 정의당은 해방을 꿈꾸는 노예의 정당이다. 게임이 다르다. 정의당 게임은 적이 강한 적이 존재해야만 성립하는 반쪽짜리 게임이다. 바텀포지션에서만 싸울 수 있는 게임이며 야당만 하는 게임이다. 그러므로 절대 여당이 될 수 없다. 노예는 탈주를 원할 뿐 자유인이 가진 생명력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원하지 않는다. 탈주하면 에너지를 손에 쥘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에너지를 취하지는 않는다. 운전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차가 있어도 운전면허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부족민은 자동차를 원하지 않는다. 도로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라도 안정을 지향해야 하지만 그냥 안정화되면 안 된다. 들뜬 상태에 자신을 두어야 한다. 들뜨는 게 목적이 되면 안 된다. 촌놈의 에너지를 얻었으면 거기서 우쭐대며 폼잡지 말고 곧장 도시로 쳐들어가야 한다. 행복은 안정이지만 이미 안정을 얻었으니 안정화되려는 에너지가 없다. 가짜다. 행복은 행복하지 않다. 촌놈의 기백을 잃은 행복은 허무하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만, 자유가 목적은 아니다. 인간은 손실한다. 존엄에서 출발하여 자유로 나아가고 사랑으로 나아가고 성취로 나아가고 마침내 행복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 잃는다. 자유를 얻을 때 고향을 잃고, 사랑을 얻을 때 친구를 잃고, 성공을 얻을 때 젊음을 잃고, 행복을 얻을 때 에너지를 잃는다. 인간이 거의 모든 것을 얻었을 때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다. 그렇게 얻은 행복은 참되지가 않다. 과정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위대한 출발점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에너지를 지켜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