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인과 근대인 세상을 구조로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의 도덕적 당위로 보는 관점을 폐기하고, 건조하게 일 자체의 메커니즘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선악구도로 보는 관점을 극복하고, 자연의 의사결정원리로 보는 것이다. 구시대의 봉건적 관점을 극복하고, 21세기를 살아가는 근대인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볼테르가 자유주의를 주장한지 300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과연 근대인인가?’ 자문해봐야 한다. 볼테르는 평생을 종교적 광신과 싸웠지만, 이 시대의 다수는 여전히 볼테르를 억압하던 그때 그시절 종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과학자나 지식인, 무신론자들조차 말이다. 종교 그 자체와는 상관없다. 근대인이냐 봉건인이냐다. 그때 그시절 볼테르를 억압하던 종교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곧 봉건인이다. 그들은 볼테르의 친구가 될 수 없다. 평민계급 출신 볼테르는 필명을 귀족처럼 우아한 이름으로 바꾸고 귀족들의 사교계로 진출하였다. 어느날 귀족의 지시로 하인에게 매를 맞게 되었는데, 볼테르의 친구였던 후작과 공작들 중에 누구 하나 볼테르를 구원하여 나서주는 사람이 없었다. 볼테르는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교정하게 된다. 왜 볼테르와 함께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고상한 친구들은 볼테르를 배신했을까? 그것이 구시대 종교인의 눈이다. 미국의 백인 소년이 자신을 키워준 흑인 보모와 친구로 지내다가 성인이 되자 태연히 보모를 노예시장에 팔아치우는 따위의 이야기는 흔하다. 한국의 지역주의나 종북놀음도 본질에서는 이와 같다. 구시대 종교인의 세계관을 대체하는 과학의 세계관은 여전히 정립되지 않았다. 과학자라 해도 종교의 낙후한 교리나 시비할 뿐, 근본적인 시각교정은 못한다. 종교의 본질은 겉으로 내세우는 교리가 아니므로 그걸로는 종교를 타격하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볼테르를 배신한 친구들이 볼 때, 귀족과 평민은 영혼의 등급이 다르다. 인간의 속성이 다르다. 문제는 그 ‘속성’이다. 젖을 먹여 자신을 키워준 흑인 보모를 노예시장에 팔아먹은 백인 입장에서‘ 백인과 흑인은 인간의 속성이 다르다. 한국의 지역주의나 종북놀음도 세상을 ’물物 자체의 고유한 속성‘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다를 바 없다. 상대방이 포지션이 다른 한 팀의 동료라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붉은 색과 푸른 색이 있다. 검은 색이나 흰 색이라도 상관없다. 두 색은 속성이 다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고 말하는 당신은 구시대의 봉건인이다. 당신은 개화된 21세기의 근대인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당신은 볼테르의 친구가 될 수 없다. 검은 색과 흰 색은 같다. 둘 사이에 속성이 차이는 없다. 이 사실을 깨우치는 데서 진짜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명의 차이가 당신의 눈동자 뒷쪽에 자리한 스크린에 때로 흰색을 만들고, 때로 검은 색을 연출한다. 색은 당신의 뇌 속 스크린에 있다. 검은 색이든 흰 색이든 그것은 바라보는 당신의 포지션 문제다. 흑인나라가 있다. 흑인나라는 귀족도 흑인이고 노예도 흑인이다. 흑인귀족이 ‘너와 나는 속성이 다르다’며 흑인노예를 차별할 때, 평민 신분의 백인이 그 현장에 나타난다면? 귀족이든 노예든 모든 흑인은 짐승으로 취급된다. 19세기 조선의 양반이 상놈을 차별할 때 평민 신분의 백인이 그 현장에 나타난다면? 양반이든 상놈이든 똑같은 미개인 취급을 받는다. 속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는 모두 속성이 같다. 그들은 근대인과 속성이 다른 별종의 봉건인으로 분류된다. 속성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자는 역시 속성으로 밟아줄 밖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 그 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계다. ‘물物 자체의 속성’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아니라, ‘물物 바깥의 관계’로 보고, 맥락으로 보고, 자신과 다를지라도 팀의 동료로 보는 세계다. 고백하라. 당신은 낡은 세계의 거주민이다. 이쪽 세계로 옮겨와야 한다. 그 전에 영혼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당신은 완전히 털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인간이 바뀌어야 한다. 세상은 속성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구조로 되어 있다. 오후의 석양은 붉지 않다. 적외선이 낮은 고도의 먼지를 잘 통과한 거다. 정오의 하늘은 푸르지 않다. 자외선 주변의 푸른 빛이 약해서 높은 고도에서 잘 산란된 거다. 붉거나 푸른 것은 태양의 고도와 당신이 서 있는 지점의 각도가 만든다. 우주정거장에서 보면 진실이 보인다. 붉거나 푸른 것은 당신이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당신에게 거기에 가 서 있으랬냐고? 포지션이 문제다. 당신은 부당하게 사건에 개입한 거다. 자기 포지션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충격받아야 한다. 당신은 함부로 사건에 개입했고 그것은 반칙이다. 세상이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세상은 물질로 되어 있지 않고, 물질 이전의 에너지로 되어 있다. 자본은 돈으로 되어 있지 않고, 돈 이전의 신용으로 되어 있다. 도로는 길로 되어 있지 않고, 길 이전의 통행으로 되어 있다. 칼라는 색깔로 되어 있지 않고, 색깔 이전의 빛으로 되어 있다. 사물은 내재한 속성으로 되어 있지 않고, 그 이전의 메커니즘으로 되어 있다. 존재는 각각의 고유한 개체로 되어 있지 않고, 그 이전의 일로 되어 있고, 사건으로 되어 있고, 연속적인 흐름 속에 있다. 우주 안에 고유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세상은 전부 연결되어 하나의 통짜덩어리로 있다. 개별적인 존재자를 개별적으로 각각 보는 관점은 모두 틀린 것이다. 10원 동전이 다섯 개 있다면, ‘십원, 십원, 십원, 십원, 십원’이 있는게 아니고 50원이 있는 것이다. 분별을 넘어 통합된 전체를 보는 시선을 얻기 전까지 당신은 아직 무엇을 본 것이 아니다. 보지 않았으므로 당신은 말할 권리가 없다. 당신이 보고 듣고 믿는 것은 모두 가짜다. 영화는 스크린에 있지 않고 필름에 있다. 마음은 뇌 속에 들어있지 않고 사회관계에서 연주된다. 사이트는 모니터에 있지 않고 서버에 있다. 그것은 그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그것을 결정하는 그것’으로 되어 있다. 구조론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그 이전단계를 탐색한다. 팀 안에서 각각의 포지션이 주어지기 이전단계를 볼 마음이 없는 자는 여기서 일단 나가줘.
구조는 대칭이다. 당신은 개체 안에서 대칭을 찾는다. 그런데 대칭은 밖에 있다. 당신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당신은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고개를 돌려 이곳을 보라. 구조는 뼈다. 뼈는 내부에서 대칭의 축을 이룬다. 천만에. 갑각류가 아니라도 뼈는 바깥에 있다. 건물의 구조는 외부의 바람과 비와 중력에 맞선다. 건물의 뼈는 바깥에 있다. 사람의 옷도 바깥에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진짜이고, 안에 있는 것은 복제본이다. 바깥의 원본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종교인은 세상을 낱낱이 해체시켜 개별적으로 각각 바라보므로 마음에 큰 모순이 일어나 위화감을 느낀다. 그들은 볼테르를 돕지 못하는 귀족친구처럼 사는 것이 어색해진다. 엄마를 잃어버린 새끼사슴의 마음이 된다. 분리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통합시켜주는 역할로서의 신을 개입시켜 기도하고 읍소하기에 분주하다. 그것은 팀을 깨고 자신을 파멸시키는 거대한 연극이다. 대칭의 축이 바깥에 있으므로 이면에서 모두 연결되어 전체가 하나로 있음을 안다면 굳이 이 자리에 신을 끌어들일 이유가 없다. 거꾸로 내가 신을 대표해야 진짜다. 바꾸어야 한다. 미처 마음을 바꾸지 않은 자. 아직 세례받지 않은 자. 영혼이 털리지 않은 자. 근대인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 구시대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 바깥을 보지 않고 내부를 보는 자, 통짜덩어리 모습을 보지 않고 개별적으로 보는 자.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보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 그들은 볼테르의 친구가 될 수 없다. 팀의 일원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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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가 그런 사람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