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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6492 vote 0 2014.11.18 (17:45:27)

    진리와 인간


    집이 두 채 있으면 그 사이에 길이 하나 있다. 구태여 길을 내지 않더라도 저절로 길이 생긴다. 도시가 둘 있으면 그 도시들 사이에 길을 닦지 않았다 해도 길은 그곳에 이미 존재하여 있다.


    길이 있으므로 사람이 그 길을 다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그리로 다니므로 거기가 길이 된 것도 아니다. 길은 내 안에서 자란다. 그리고 닿는다. 내가 아기였을 때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시골이었을 때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시골은 자라서 도시가 된다. 도시가 자랄 때 길이 사통팔달로 자란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될 때 길은 진리로 자란다.


    이것이 우리가 끝끝내 깨달아야 할 진실이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외교라는 이름의 길이 있다. 너와 나 사이에도 관계라는 이름의 보이지 않는 길이 있다. 길은 육체와 마음 사이에도 있다.


    길은 어제와 오늘 사이에도 있다. 하나의 의사결정 단위가 하나의 길이다. 그러므로 길이 없어도 길은 있다. 관계가 없으면 그렇게 단절된 관계가 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그런 관계가 있다.


    길은 그대를 앞질러 먼저 가 있다. 어떤 의사결정을 해야하는 이유가 있으면 이미 길은 그곳에 있다. 미처 길을 찾지 못했다 해도 길은 있다. 아이는 의사결정하지 않고 대신 엄마에게 위임한다.


    의사결정하지 않으므로 길은 없다. 궁벽한 시골에는 길이 없다. 어느 순간에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럴때 길은 이미 내게로 다가와 있다. 자라난 길은 이미 연결되어 있다.


    처음 길은 집과 집 사이에 있다. 집은 2다. 길은 1이다. 대칭된 2 사이에서 1을 찾았으면 길을 찾은 것이다. 그 길도 2가 된다. 길은 앞과 뒤가 있으므로 다시 2다. 한 번 더 1을 찾아야 한다.


    ◎ 집은 2를 이루므로 진짜가 아니다.
    ◎ 길도 2가 되므로 역시 진짜가 아니다.
    ◎ 그 길을 가는 방향성이 찾아야 할 1이다.


    깨달아야 할 이중의 역설이다. 거기서 전진하는 하나의 방향성을 찾아야 한다. 처음 집은 공간의 2다. 다음 길은 시간의 2다. 공간은 좌우가 2를 이루고,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2를 이룬다.


    하드웨어는 집이다. 소프트웨어는 길이다. 하드웨어가 정답이 아니듯이 소프트웨어도 역시 정답은 아니다. 실행파일이 따로 있다. 진짜 길은 일이다. 그 소프트웨어가 하는 새 일이 진짜 길이다.


    정당은 집이다. 이념은 길이다. 여당과 야당이 하드웨어 집이라면, 진보와 보수는 소프트웨어 길이다. 둘 다 틀렸다. 북은 진짜가 아니며, 북소리 또한 진짜가 아니며 현재의 연주만이 진실하다.


    여당과 야당은 진짜가 아니며, 진보와 보수도 진짜가 아니며, 혁신만이 진실하다. 진짜는 내 안에 없다. 내 밖에도 없다. 그 사이에 상호작용으로 걸쳐 있다. 몸은 집이니 버려야 할 껍데기다.


    마음은 길이니 역시 진짜는 아니다. 진짜는 너와 나 사이의 살아있는 대화다. 불씨를 꺼트리지 말고 살려가듯이 그 세상과의 대화를 살려가야 한다. 몸은 내 안에 있다. 마음도 내 안에 있다.


    내 안에 있으므로 진짜가 아니다. 글을 쓴다면 붓은 내 안에 있고 종이는 내 밖에 있는데 글씨는 나의 안과 밖에 걸쳐져 있다. 그것이 진짜다. 몸은 버려야 할 똥이고 마음은 퇴적된 과거다.


    ◎ 내 안의 붓은 진짜가 아니다.
    ◎ 내 밖의 종이도 진짜는 아니다.
    ◎ 진짜는 안과 밖 사이에 걸치는 글씨다.


    집은 공간에 있고 길은 시간에 있으며 전진만이 진짜다. 시간은 과거로 퇴적된다. 마음은 과거의 찌꺼기다. 그 몸을 확 버리듯이 그 마음을 확 버려야 한다. 진짜는 안과 바깥에 걸쳐져 있다.


    콤파스의 두 다리와 같다. 움직이는 것은 하나지만 일하는 것은 둘이다. 베틀의 씨줄이 분주히 돌아다닐때도 날줄은 고요히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지만 베는 날줄과 씨줄이 함께 짜는 것이다.


    우리는 둘 중 하나를 ‘나’라고 부른다. 일하는 것은 콤파스의 두 다리인데 그 중에 한 다리만 ‘나’라고 부른다. 내가 보는 곳까지가 진짜 나다. 내가 세계를 발견하면 세계와 함께 베를 짜는 거다.


    나의 시선이 도달하는 곳 까지가 나의 범위다. 내 몸에 속한 내 몸만 알고, 내 몸 바깥에서 돕는 내 몸을 모른다면, 그것은 베틀의 씨줄만 알고 날줄을 모르는 것과 같아서 베를 짤 수가 없다.


    내가 가족만 알고 그 바깥을 모른다면 제대로 된 베는 못 되고 새끼줄이나 겨우 꼴 수가 있을 것이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 과거의 마음만 알고 내 미래의 마음을 모른다면 베를 짤 수 없다.


    사건의 전개하는 기승전결 안에서 내가 확인한 기와 승은 나의 퇴적된 과거 마음이다. 전과 결은 나를 부르는 미래의 마음이다. 기승전결의 완전성을 모른다면 내가 내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그대 마음은 그대 마음이 아니다. 그대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대 마음이다. 내 안 마음만 알고 내 바깥 마음을 모른다면 콤파스는 헛 돈다. 선장이 배 안만 알고 바다를 모른다면 항해는 실패다.


    붓만 알고 종이를 모르면 명필은 못 된다. 북은 북 안에 있다. 북소리도 북 안에서 난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는 연주홀의 온도와 습도까지 두루 고려해야 한다. 소리는 북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 공간이 증폭시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내 바깥에서 불어오는 근원의 바람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의지가 무의식에 조종됨을 알아야 한다. 나의 계획이 집단의 희망임을 깨달아야 한다.


    마침내 콤파스의 한쪽 다리를 찾았는가? 마침내 베틀의 날줄을 찾았는가? 그것은 그대 안에 있고 바깥에 있다. 그것은 흩어져 다양하게 있는 듯 착각되지만 실은 큰 나무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임을 알아챘을 때 마침내 내 안의 하나와 맞서 씨줄 날줄을 이룬다. 그럴 때 콤파스는 원을 그릴 수 있다. 베를 짤 수 있다. 일을 할 수 있다. 붓과 종이가 만나 글을 이룬다.


    그것은 진리와의 일대일, 신과의 일대일이다. 일대일은 2나 2가 아니다. 베는 씨줄과 날줄로 2이나 이미 베가 직조되었으므로 1이다. 사건의 기승전결에 의해 완전성을 얻었으므로 1이다.


    진리라는 개념은 인간이 의사결정에 있어서 신과의 일대일, 세상과의 일대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거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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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공간의 2에서 1을 찾고 다시 시간의 2에서 1을 찾아야 한다. 하나의 사건은 두 번의 역설로 이루어진다. 만약 당신이 어떤 계획을 세웠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려는 것이며 곧 하나의 역설이다. 


    그러다가 뒤통수 맞는다. 첫 번째 패를 바꾸어야 한다. 반전은 공간에서 한 번, 시간에서 한 번으로 두 번 일어난다. 첫 번째 반전은 소승의 개인전 승부, 두 번째 반전은 대승의 단체전 승부다. 두 번 이겨야 산다. 


    이치를 모르면 안철수처럼 벙찌게 된다. '당신들이 민주당 개혁 원한다 해서 당명도 바꾸고, 로고도 바꾸고 개혁을 시도했는데 왜 시큰둥하지? 내가 뭘 잘못했어?' 이렇게 된다. 그것은 공간에서 소승적 승부다.


    시간에서 대승적 승부는 팀플레이로 달성된다. 대중과 함께 하는 게임이 아니면 안 쳐주는 것이다. 대중은 첫 번째 패를 바꾸었다. 개혁요구는 대중이 민주당 내부에 개입할 구실로 던져둔 떡밥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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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나'라고 여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은 진짜배기 나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베틀의 씨줄에 불과하다. 진짜 베는 나의 씨줄과 세상의 날줄로 이루어진다. 신과의 일대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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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이 다양한 여러가지들의 집합으로 보인다면 아직 베를 짤 수가 없다. 내 바깥의 나를 찾지 못한 것이다. 베틀의 날줄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콤파스의 한쪽 다리를 잃어먹은 것이다. 신과의 일대일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경우는 하나씩 각개격파 하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승부에 진다. 그대는 하나이고 상대는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승의 싸움이다. 그것은 바꾸어야 할 첫 번째 패다. 반드시 역습 들어온다. 세상은 만만치 않다.


    두 집 사이에서 하나의 길을 찾고, 길의 앞뒤 사이에서 하나의 방향을 찾았을 때, 첫 번째 패를 바꾸었을 때, 낱낱의 것들을 모두 이어서 커다란 하나의 통짜덩어리 나무를 이루었을 때, 신과의 일대일에서 그대의 베를 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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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만날 것인가? 세상은 넓고 가지가지 많다. 당해낼 수 없다. 새끼 꼬는 방법으로는 세상과의 승부에서 진다. 할아버지는 두 가닥 볏짚을 동시에 움직여 새끼를 꼬지만 직녀는 오직 씨줄만 움직여 베를 짠다. 


    콤파스의 두 다리 중에서 그대가 움직일 다리는 하나다. 나머지 한쪽 다리가 호응해주지 않으면? 그대 베를 짤 수 없다. 그러므로 나머지 다리까지 흔들다가 일을 망치고 마는 것이다. 반대편 다리를 어떻게 믿나?


    그것이 진리다. 진리는 불변이다. 종이가 움직이지 않으니 명필은 글을 쓴다. 두부가 움직이지 않으니 요리사는 칼로 썬다. 모음과 자음은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다. 두 다리로 걸어도 움직이는 것은 한쪽 다리다. 


    움직이지 않는 때를 알면 선장은 파도를 넘을 수 있다. 신과의 일대일을 이룰 수 있다. 씨줄과 날줄은 둘이지만 베는 하나다. 종이와 붓은 둘이지만 글씨는 하나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가지만 완성된 작품은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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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의 진짜는 그대 안에 없고 그대 밖에 없고 안과 밖 사이에,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져 있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과거의 마음이고 그대를 부르는 소리는 미래의 마음이며 진짜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져 있습니다. 깨닫는다면 진짜 베를 짤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신과 나가 콤파스의 두 다리를 이룬다면 비로소 완전성의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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