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역의 궁극적인 출발점은 느낌이다. 연역은 ‘A면 B다’의 상호작용 메커니즘을 사용한다. 메커니즘은 반응으로 나타난다. 그 반응을 느끼는 것이다. ◎ 상호작용의 메커니즘≫반응≫느낌 피타고라스가 대장간 옆을 지나다가 쇠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화음을 찾아냈듯이 또 그리스인이 황금비례를 찾아냈듯이 느낌으로 찾아내는 것이며 느낌은 몸의 반응을 따르는 것이고, 그 반응은 자연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원래 자연의 환경에,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에, 인간의 뇌에, 뇌와 신체감관의 관계에 그러한 메커니즘이 세팅되어 있다. 혹은 특정 상황에서 여러 조건들이 맞아떨어질때 메커니즘이 세팅된다. 그럴 때 종이 울리듯 소리가 난다. 반응한다. 아는 사람이 뭔가 맞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고, 마땅하고, 떳떳하고, 자연스럽고, 똥꼬가 뻑적지근한 충일감을 느낀다. 온 몸이 찌르르 한다. 의기양양해진다. 반대로 틀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쁘고, 못마땅하고, 창피하고,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고, 공중에 떠서 발이 지면에 닿지 않는듯한 허전하다. 만약 틀린 이야기에도 기분이 좋다면 그건 구조가 단순한 거다. 전체의 구조를 보지 않고 특정한 일부분의 구조를 본 것이다. 그 경우는 낮은 차원의 잘못된 메커니즘을 쓰는 것이다. 악기를 다루다보면 악기가 전체적으로 공명하지 않고 한 부분만으로 소리가 날 때가 있다. 북채로 가죽을 치지 않고 옆면의 몸체를 쳐서 ‘딱’ 하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다. 하부구조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도 구조는 구조이고 반응은 반응이므로 그것이 정답이라고 고집하는 오류를 저지르게 된다. 항상 전체의 구조를 보고 전체에 반응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인간의 뇌가 메커니즘적으로 세팅되어 있으므로 자연의 메커니즘에 반응한다. 완전하면 반응한다. 완전한 어미는 새끼를 낳고, 완전한 피리는 소리를 내고, 완전한 꽃은 향기를 퍼뜨리고, 완전한 시는 기분을 좋게 한다. 커피 한 잔이 사람을 긴장시키듯이 좋은 시는 사람을 깨어나게 한다. 졸다가도 눈이 떠진다.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 시는 긴장시키고, 음악은 즐겁고, 그림은 유쾌하다. 영감을 주고 힘을 준다. 거기에는 반드시 메커니즘이 있다. 이러한 반응을 보고 알고 느낌을 보고 아는 것이 직관이다. 연역은 본질에서 직관이다. 직관은 뇌가 자연의 완전성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훈련하여 그 반응성을 높일 수 있다. 피아노를 조율하여 느슨해진 줄을 조여주듯이 팽팽하게 긴장시켜 두어야 한다. 그래야 민감하게 반응한다. 화음을 들려줘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소음을 들려줘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틀린 이야기를 하나 맞는 이야기를 하나 반응이 없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반응이 안 되고 호응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고장난 라디오로 방송을 청취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당연한 거다. 논리적인 추론은 그 다음의 일이다. 1차적으로는 반응하고 느껴야 한다.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고 슬퍼할 일에 슬퍼해야 한다. 반응하지 못한다면 뇌가 고장난 거다. 애초에 반응능력을 키워야 하며 그것이 깨달음이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언어적인 거다.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의 공통된 특징은 주어와 술어가 호응되지 않는다는 거다. 인간의 언어는 메커니즘적으로 완성되어 있다. 만약 언어가 잘못되었다면 소통은 불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적인 센스만으로도 맞는 말인지 아닌지 그냥 알 수 있다. 언어 안에 메커니즘이 세팅되어 있다.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은 비어를 쓰거나 비문을 쓴다. 뜻이 없는 허어를 쓴다. 그런 단어를 태연하게 쓰는 이유는 그런 단어를 써도 어색하지 않고 창피하지 않고 부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뇌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깨진 종과 같고, 찢어진 북과 같고, 늘어진 기타줄과 같다. 기(氣)라든가 까르마라든가 ‘간에 열이 찼다’거나 ‘UFO’라거나 ‘창조론’이라거나 단어가 될 수 없고 문장이 될 수 없는 허어(虛語)를 쓰면 창피함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다원주의라는 말을 태연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 원(元)은 으뜸인데 으뜸이 다(多)하면 으뜸이 아니고 버금이다. 즉 비어고 허어다. 글자가 될 수 없다. 어떻게 인간이 다원이라는 말을 한심하게도 쓸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런 글자는 사전에 나올 수 없다. 이원론도 마찬가지다. 원은 으뜸이며 일원일 경우에만 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원론이나 다원론은 단어로서 성립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단어를 태연하게 쓴다면 그 사람의 뇌는 찢어진 북이고, 깨진 종이며, 늘어진 기타줄이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단어가 성립되지 않는 단어를 태연하게 쓰는 것을 보고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9살때다. 그래서 구조론을 만들었다. 귀신이나 영혼도 쓸수 없는 단어다. 그 안에 메커니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메커니즘은 의미를 담는 그릇이다. 메커니즘이 없으면 의미를 담을 수 없으므로 허어다. 인간의 문장 자체가 하나의 메커니즘이면서 동시에 단어 하나도 메커니즘이다. 단어가 명사라면 동사가 숨어 있는 것이며 동사라면 명사가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전제되어 있다. A면 B다의 조건이 숨어 있다. 모두 세팅되어 있다. 숫자가 1이라면 가리키는 대상과 가리키는 자를 동시에 지시하고 있다. 자리 1과 임자 1이다. 0이라면 자리 1에 임자 0이다. 그냥 1이라고 해도 이미 A면 B다의 조건이 숨어 있는 것이다. 모든 숫자는 자리와 임자의 비례를 나타낸다. 퇴계가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면 이미 단어가 틀린 것이다. 이기구분론이라고 해야 맞다. 엔진이 바퀴를 돌린다고 하면 맞는 말이고, 자동차가 바퀴를 굴린다고 하면 틀린 말이다. 자동차가 간다고 해야 맞다. 소가 밭을 간다고 해도 실제로는 사람이 밭을 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세팅되어 있다. ◎ 맞는 말 - 엔진이 바퀴를 굴린다. ◎ 틀린 말 – 자동차가 바퀴를 굴린다. ◎ 맞는 말 – 자동차가 길을 간다. ◎ 틀린 말 – 사람이 심장을 뛴다. 이런 차이를 메커니즘적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퇴계는 사람이 심장을 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심장이 뛴다고 해야 맞다. 대부분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문장이 잘못되어 있다. 연역한다는 것은 문장구조를 따라 맞게 배치한다는 것이다. 문장 역시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를 따라가므로 문법에 맞게 표현하기만 해도 지식이 대량으로 복제된다. 틀린 말이라도 통용된다면 생략되어있는 것이며 그 생략된 부분을 낱낱이 들추어 추궁하면 답이 나온다. 자동차가 바퀴를 굴린다는 틀린 말이지만 숨은 포지션을 찾아보면 자동차가 자신의 바퀴를 굴린다가 된다. 여기서 축과 대칭을 살펴보면 바퀴와 굴린다가 대칭일 때 자동차가 축이고 그 바동차와 자신이 역시 대칭임을 알 수가 있다. 축과 대칭의 구조는 반드시 존재하며 그것이 없는 경우는 없으며 만약 없다면 생략되어 있다. A면 B다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 사람이 손을 흔든다고 하면 잘못된 표현이며 사람이 자신의 손을 흔든다고 해야 맞다. 물론 번거러우므로 적절히 생략하고 함축할 수 있지만 과학영역에서는 다 들추어낸다. 이런 연속된 대칭의 구조는 느낌으로 알 수 있다. 대칭은 짝짓기다. 짝이 없으면 허전한 느낌이 들고 짝이 맞으면 가득찬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은 고양이도 느낀다. 고양이도 쥐를 잡았을 때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으쓱한다. 의기양양해 한다. 가득찬 충일의 느낌 때문이다. 연역은 메커니즘으로부터 출발하며 메커니즘은 완전성을 반영하고 완전성은 반응을 끌어내며 그 반응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세부는 대칭의 짝짓기다. 짝이 맞으면 떳떳한 느낌이 들고 하나가 빠지면 어색한 느낌이 든다. 밥통들은 포지션만 맞추는 수가 있다. 내용을 보지 않고 그냥 억지로 아무 단어나 집어넣어 포지션만 채우는 것이다. 환생이라든가 내세라든가 시간여행이라든가 이런 단어는 성립될 수 없다. hope는 까치발을 들고 담 너머를 바라보며 손님이 오기를 고대하는 동작이다. 구체적인 동작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는 경우는 없다. 막연히 희망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dream은 데리고 간다는 뜻이다. 꿈은 어딘가로 떠나가는 것이며 희망은 무언가 멋진 소식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이다. 반드시 구체적인 액션이 있다. 거짓 단어들은 그러한 액션이 없다. 척 보면 가짜인지 알 수 있다. 그냥 꿈이라고 하고 희망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7급 공무원이 꿈이라고 대답하면 곤란하다. 꿈은 현장을 이탈하여 반드시 어딘가 신천지로 가야만 하고 희망은 어디선가 자신에게로 찾아와야만 한다. 많다라는 말의 어원은 그릇에 쌀이 넘친다는 뜻이고 good의 어원은 그릇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cool은 추워서 몸이 딱딱하게 굳는다는 뜻이고 더위는 몸에 끈적한 것이 달라붙는다는 뜻이다. 반드시 일정한 조건에서 일정한 반응을 끌어내는 ‘A면 B다’가 숨어 있다. 그것이 없는 경우는 없다. 그러한 짝짓기와 대칭의 연쇄고리로 메커니즘은 작동한다. 짝이 없으면 허전하고 그것은 가짜다. 짝이 있으면 가득차고 그것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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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지킬앤 하이드'를 보면서 예술의 기원을 생각했습니다.
약 하나로 악을 물리치고 내면을 안정시킬 수 있나?
그러나 약은 선과 악을 완전히 분리하여,
지킬을 더욱 지킬 스럽게, 하이드를 더욱 하이드 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생각했죠.
사람의 마음을 약으로 치료할 수 있냐?
치료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나냐?
약물은 답이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주위 동료나 친구들이 괴로우면 성당이나 교회를 가고 싶어하는데
그러면 종교가 대안이냐?
(종교를 가지고 계신분이 있을 텐데, 이것은 저의 사견입니다.)
성당에서 세례받으려고 교리공부를 하는데
저는 왜가 너무 많은 거예요.
구약성서를 지금의 가치관으로 읽으면 안되는 데
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하느님이 의심스럽고
신부님한테, 성당은 왜케 보수적이냐?
수녀님은 왜 미사집전하면 안돼냐?
끊이없이 왜, 왜, 왜, 질문만 하다가
간신히 세례는 받았는데 역시 뭔가 허전해요.
그렇다면 불교는 영양실조 걸리는 줄 알았습니다.
고기는 먹으면 안되고, 다 놓아주라고 하는데
그거 지키다가 영양실조 올 뻔 했어요.
예수님과 부처님 시대와 지금은 괴리가 너무 커서,
제 기준에서 역시 종교도
사람의 마음을 진정시킬 답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지킬의 약을 대신할 수 있냐?
전 거기에서 예술을 봤어요.
(물론 화가도 아니고 뮤지션도 아니고 문학가도 아니지만)
첼로소리, 이중섭의 소, 고은선생님의 시 등등
뭔가를 심연으로 끌고 가서 안정시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생각했죠. 이것이 종교다. 예술잉 종교다.
일요일날 예배당에 성당에 법당에 가지 않아도
심연에서 안정시켜줄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그래서 예술의 기원을 생각해봤는데
노래 음악 시 모두 종교에서 왔고
어쩌면 이것들이 다음세기에 종교의 역할을 하겠구나.
그래서 시를 쓰고 싶었어요.
그림 시 음악 중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시도 깊이를 가지려면 느낌뿐만 아니라
인문학이 바탕이 되고 아니 모든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깊이를 가지는데,
그래서 역사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해요.
계속 고은 선생님이나 도정환시인의 시를 읽고 있는데
안타까운 것이 우리라나는 서정시가 넘치고
서사시는 단한편도 읽어보기 힘들어요. (고은선생님이 쓰시기는 했음.)
개인적인 평가지만 시단이 고은선생님 대 서정시단 이렇게 나누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를 쓰기전에 먼저 다양한 것을 듣고 느끼고 역사책을 읽자
이렇게 생각했고, 지금은 조금씩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을 동렬님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리고 한가지 더 이제는 신의 존재하냐 하지않냐 하는
신의 문제에 대해서 나름 고생이 많았는데,
이제는 전혀 고민하지 않아요.
사람들을 보면서 신의 문제를 생각했는데
이 고민 사라지니까 마음이 날개가 달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