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구조는 원래 살빼고 양념빼고 건조하게 가는 것이다. 무미건조해서 싫은 거다.
그러나 구조를 해야 한다. 왜? 그대가 선장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감독은 1퍼센트 타율차이로 선수를 넣거나 뺀다. 고작 1퍼센트 가지고? 그거 모이면 백퍼센트 된다. 단 1퍼센트 차이를 논하는게 구조다.
근데 선장이 아닌 사람이 있다. 선원들은 미세한 바람의 차이를 읽을 이유가 없다. 선원들이 여기에 와서 ‘나는 그거 싫은데?’ 하면 곤란하다. 누가 당신 오라고 했냐고? 이곳은 선장들만 모이는 곳이다.
◎ 흰 것은 빛이 나고 검은 것은 어둡다. ◎ 내 차는 검은 차라도 광이 번쩍번쩍 한다.
어깃장을 놓자는 거다. 짜장면과 짬뽕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짬짜면은 안 되냐고? 결혼도 그런 식으로 짬짜혼 할래? 취직도 그런 식으로 짬짜직할래? 우승팀은 하나 뿐이다.
두 사람과 동시에 결혼할 수 없고, 두 직장에 동시에 출근할 수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1퍼센트의 미세한 차이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100만명이 오른쪽을 보더라도 한 명의 리더가 왼쪽을 보면 그 집단은 왼쪽으로 간다. 100만명 어쩌고 하면 강퇴된다. 이곳은 연구소다. 당연히 독재다. 민주적으로 토론해서 말 잘하는 사람이 이곳 운영자 되는 일은 없다. 이곳은 진리를 다루는 곳이다. 독재라는 말의 어원 ‘딕타’는 ‘닥터’와 같다. 말한다는 뜻이다. 교수는 말하는 사람이고 학생은 듣는 사람이다. 민주적으로 말 잘 하는 학생이 가르치는 곳은 없다. 혹 모르고 착각하신 분은 당장 떠나야 한다. 구조론은 적극적으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런 판단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 있다. 판단 자체를 싫어하는 거다. 이런 사람들은 성철 스님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해도 ‘산인들 어떠하며 물인들 어떠하리’로 왜곡해서 읽는다.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명박인들 어떠하며 근혜인들 어떠하리?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명박이라도 상관없고 근혜라도 상관없다. 나라가 탈이 나서 문제이지.
상태가 안 좋은 분들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 방송국형 – 어디서 소리가 들린다. 중계방송 한다. ◎ 레드선형 –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갑자기 맛이 간다. ◎ 성격장애 – 호르몬이 과다하면 통제가 안 된다.
문제는 방송국형이다. 이 분들은 원래 자기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상대와 대화가 안 통하든 말든 상관없다. 논리적인 설득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할 말이 속에 들어차 있어서 내뱉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나는 예수다’ 하고 선언해놓고 말씀을 내리는데 들어줄 청취자가 없으면 벽보고 중얼중얼 한다. 애초에 자기 안에 말씀이 차고 넘치므로 감당을 못한다. 이분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다.
레드선형이나 성격장애형은 그 상황을 피하거나 그 지점을 적절히 통제하면 된다. 방송국형은 그냥 그러고 사는 수 밖에 없다. 이 분들에게 정신을 차리게 해 주면 더 불행해질 뿐이다. 계속 안에서 말씀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애초에 구조가 싫은 것이다. 왜? 구조가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답을 정해놓고 자기가 원하는 말을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 아이 성적이 내려갔는데’ 하고 하소연 한다. (자유게시판 이기준님 글)
네티즌이 ‘그건 엄마 잘못이에요.’ 하고 정답을 말해주면 화를 낸다. 누가 문제해결을 원했느냐고? 그냥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거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목적이 분명하게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걸 관철할 뿐 대화는 없다.
그들은 질문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마이크를 잡으려는 것이며 마이크 잡는 포지션을 원하는 것이다. 말대답해주면 갑자기 가르치려 든다. 결론은 선장이 아닌 선원이 되려는 사람은 이 사이트에 오지 말아야 하고 선장이 되려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며 그 판단을 즐겨야 한다는 거다. 위로받으려 하면 안 되고 문제해결을 즐겨야 한다. 중요한건 합리적인 판단을 계속할 수 있느냐다. 선동렬 감독이 합리적인 판단을 하자 선수들이 삐졌다. 고참들을 모아 대화를 했더니 고참들이 솔선수범해서 지금 6연승을 달리고 있다. 김성근 감독은 정기적으로 정신교육을 한다. 합리적인 판단이 현장에서 먹히지 않는 이유는 중간그룹을 깨기 때문이다. 고참 포수나 인기 선수는 자기 기록관리 해야 한다. LG는 그것 때문에 안 된다. 선수단 모두가 승리라는 한 방향으로 맞춰지지 않고 개인기록에 맞춰지면 팀은 붕괴된다. 리더가 제시하는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구성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내세우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는 카리스마가 필요하다. 보통 카리스마 만들다가 망한다. 리더는 카리스마를 살릴 수 있는 결정만을 해야 한다. 불리해도 후퇴명령을 못내린다. 그래서 지는 거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자는 거다. 99퍼센트가 왼쪽을 보고 있어도 1퍼센트가 오른쪽을 보고 있으면 그 1퍼센트를 보고 판단을 해야 한다. 그게 현장에서 먹히도록 팀을 만들어가야 한다. |
안 미친 사람도 마찬가지요.
방송국형 레드선형 성격형은 주변 어디에나 있소.
이명박 보시오. 전형적으로 방송국형이오.
패턴이 반복되는 것은 사실이에요.
이명박 진단하면 분명 종신 치료감호 처분 내려질 듯.
직장에서 독서모임을 하거나, 회식을 가거나, project를 진행하거나
뭘 하면 계획을 세우고 진행과정 살펴보고 끝이 어떻게 될지
전체적인 상황을 대략 예측하고, 설명을 해줍니다.
예측대로 안되지만 캄캄한 곳을 생각없이 가는 것 보다
뭔가 방향등을 가지고 있어야 될 것 같아서
그리고 한번 그렇게하면 다음 번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제스스로 지치는 거예요.
제 위치가 중간이라서, 선배들은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후배들은 자기의견을 말하고 싶지만 선배눈치를 보고
그 상황에서 일을 끌고 갈 사람이 중간에 있는 저뿐이여서
전 그래도 한발짝 앞으로 가고 싶거든요.
후배들의 뾰족한 부분과 선배들의 둥글둥글한 부분을
제가 맞추다보니까, 가끔은 저도 위로받고 싶고
또 일을 진행하지 말자해서 진짜로 2년동안
손을 놓아 버렸어요.
독서모임 흐지부지되구, 회식 안 가고, project는 메뉴얼없이 뒤죽박죽
일을 놓아버리니까, 머리 안써도 되고 몸은 편한데
제 스스로 퇴화되는 거예요.
머리아프고 골치 아픈 일들 놓아버리니까
나도 퇴화되는 거예요. 그게 더 슬픈 일이더라구요.
그런데 다시 시작하면 중간에서 또 혼자 뛰어야 하는데,
또 내 스스로 지쳐도 위로 해줄 사람 없을 텐데
다시 시작해서 뭐하나 하다가?
작년 12월엔가 타 사이트에서 구조론 싸이트를 알게되었구요.
솔직히 여기에는 구조론 글 0.1%도 읽지 못했어요. (책은 이기는 법은 읽었습니다.)
요즘 글을 많이 남긴 것은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전에 워밍업으로 일이 좀 없어서
담주 부터는 다시 바빠질거예요.
구조론 사이트 읽으면서 좋아진 건
내가 지치면 누가 위로해주나 이런 생각 안합니다.
그냥 독서모임하고, 회식하고 그 자체 즐겁기 때문에
(솔직히 주도권이 제가 있어서, 제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해요,
일단은 뭘 하겠다는 사람이 주도권을 잡는 거 잖아요.
그리고 틀린 계획이라고 뭘 내놓으면 거의 수긍하는 눈치예요)
그리고 선배후배가 한발짝 앞으로 나가는 것이 나도 한발짝 뛰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날 위로해 주나, 알아주나 이런 생각 이제는 안 합니다.
언젠가 이사이트에서 '친연'이라는 단어를 쓰신 것 같은데
말로 다 설명할 순 없지만 이 사이트와 저 사이에도 친연이 인것 같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처한 상황을 어떤 고정된 형태로 규정해서 인식하고 싶어합니다. (존재규정)
고정관념의 선을 긋습니다.
그리고 그 선안에서 판단(생각)을 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려고 하죠.
그리고 이 존재규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서 (현실반복)
그 선을 점점 좁힙니다. 세계관이 축소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범위를 점점 줄여나가면서
퇴화해들어갑니다.
결국 수구꼴통이 됩니다.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이유가 다 00때문이다"라고 단순화하게 되지요.
이것이 인간이 기본적으로 처한 고해의 구조입니다.
구조론을 하는 사람은 밖으로 계속 뻗어나갑니다.
자신의 영역이 확장됩니다.
결국 세계의 끝과 만납니다.
세계와 하나됩니다.
사람은 뭘좀 해야겠다 하면 백이면 백 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힘이 드는 이유는 집단의 속석상 리더가 꼭지점을 형성하게 되기에 거기에 과부하가 반드시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보는 사람은 별거 아닌데 당사자는 피곤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혼자서 일대다를 상대하기 보다는, 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힘들어 못하게 된다고 하여 파기해버리는 방향은 공동체에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럴때 개인이 할수 있는 것은 떠넘기기라고 봅니다.
자신은 쉬고 싶거나 시간이 필요 하거나 상황이 안되더라도, 다른 사람은 가능 하거든요. 떠넘긴다는 것은 부정적인 처방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 사람을 접촉하여 넘겨주거나, 입원이 적다면 집단의 의사를 물어 다음 사람을 결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같은 것을 경험하게 만들어 세력화 시키면 됩니다. 단 두 사람 뿐이어도 이미 세력화가 됩니다. 이러한 구조를 만들어 버리면 뒤에 온 사람들은 이미 구조에 갇히게 됩니다. 닫힌계가 형성되면 뒤에 온 리더도 구조에 갇히게 되므로 상부구조를 치지 못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골격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공동체를 유지 하는데 적용되는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독재는 이 원리를 발견하여 정착시킬 수 있는 카리스마입니다. 사이비 독재는 자기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안하고, 후임을 키워 리더를 양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고사됩니다.
문제는 어려울때일수록 공동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넘어설수 있고, 억울하지도 않게 됩니다. 안목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보아도 예전의 사람을 보는 방식으로 보지 않게 됩니다.
일상에서의 취미 활동에서라도 꼭지점을 형성하게 되면 힘이 들지만, 구조를 탐두하기 좋은 포지션을 얻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래서 구조론에 관심을 가지신 것이겠지만은요.^^
폰이라서 오타가 수정이 안되요. 다음에 고치고 삭제할께요.
뭘 좀 하려면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뭘 좀 하려고 했는데 과부하가 걸리는 이유는 구조 없이 일을 시작하면 그렇게 됩니다.
처음 시작할 때 구조 없이 시작했기 때문에 하부에서 밀려오는 정보를 처리하지 못해서 과부하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억지로 공동체를 생각해서 일을 처리하면 '공동체'라는 어떤 상像을 '존재규정'하는 것이 되어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오히려 문제를 창의적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나 해도 거기서 문제가 또 몇개씩 파생되어 발이 묶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는 일을 잠시 쉬고 휴식을 해도 상관없으니 구조의 기본단위를 생각하고 재조립하는 일을 해야합니다.
님이 말씀하신 '나 자신이 꼭지점이 되어서 판정한다' 부분은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사람은 그것에 대해 정확히 몰라서 그렇지 구조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느끼는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꼭지점을 형성하면 반응이 온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구조론이란 언어가 있으니 다시 규명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고, 이것은 인식론 방향이지만, 있다라고 느낀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기에...여기서 혼선이 생기는 것이라고 보입니다.
존재론 적인 것을 느끼지만 명확하지 않다가, 그러기에 인식론으로 거슬러 올라가 규명하고나서 확인하고나니, 다시 존재론적으로 펼쳐지는 과정을 사람들이 경험하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단지 처음에는 느껴지는 것일 뿐이고 방향성만 알수 있지, 그 중간의 구조에 대한 메커니즘이 규명이 안되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 고리들을 연결하는 것이 잘 안되기에 좌절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규명되면 힘이 팔팔 솟는 것이겠지요. 그럴때 존재론적으로 연역된다고 보입니다.
사람의 좌절은 자기가 아니어도 잘 굴러 간다는 것이겠지요. 세상이나 공동체나...
그렇기 때문에 구조를 알아야 그런 근본적 좌절이 해소되고, 그냥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죽음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없이..., 이것만 알아도 자신을 누르는 보이지 않는 그 무게를 걷어낼 수 있으니...살기 편해지는 것이지요.ㅋ~^^
좋은 말씀 잘 들었어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뭐냐면요.
앞으로 아란도님이 구조의 관계, 상부 꼭지점이 하부구조를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고 얘기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공동체나 세력에 대해서 지금 의미부여를 너무 많이 하고 계세요.
지금 아란도님의 전개하시는 논지가 고정관념이 생기는 갈림길에 와 있거든요.
공동체나 세력은 구조를 표현할 때 쓰는 하나의 꼭지점(포인트)에 불과합니다.
공동체와 세력이 상부구조로 실존하지 않아요.
그게 실존한다고 정해놓고 의식하면서 논지를 전개하면서 문제가 생겨요.
더 이상 제가 아란도님이 하신 얘기의 작은 부분까지 일일히 반박하는 것은 곤란하므로 이만 줄이겠습니다.
제가 위에 말한 얘기 그 외에 다른 모든 부분은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
그러나 상부구조는 한번 세팅되면 잘 깨지지 않지요. 그래서 구조적인 모순이 생기는 것이구요. 그래서 혁명이나 혁신이나 개혁을 얘기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혁명, 혁신, 개혁은 공동체가 받쳐주지 않으면 안되지요. 이럴때는 공동체가 상부구조가 되는 것이고, 더 넓게는 지구 공동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개인으로 보았을 때 상부구조는 공간이 아니라 시공간적으로 보아야 하므로, (그 이유는 인간이 그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상승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상승의 끝은 전체와 만나는 것이고 근원과 만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잘 표현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로가 표현하는 문체가 다르니 다소 서로에게 잘 전달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서로의 언어도 익숙해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하네요.^^
논지를 전개할 때마다 장황해지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상부구조다'
'세력이 상부구조다'
'상부구조는 한번 세팅되면 잘 깨지지 않는다'
'상부구조는 공간에 한정되지 않고 시공간이다'
계속 이런식으로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위험천만합니다.
여기에는 단어만 있고 단어들이 관계를 맺는 '구조'가 없어요.
아란도님의 주장은 아직 구조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매커니즘, 패턴, 즉 구조가 확인된 바 없고 아란도님이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란도님은 본인의 주장에서 기본적으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어떤식으로 관계를 맺고 통제되는 방식이 무엇인지
기본적인 패턴이나 매커니즘조차 예를 들어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경험에서 관찰된 직관적인 사례를 들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지적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아란도님의 주장은 전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며 일견 들어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란도님의 주장에는 우리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논지 전개에 사용되는 '구조'가 빠져 있습니다.
아란도님 말씀은 자꾸 '00가 있다', '00는 XX다' 라는 말의 패턴이 반복되고 있어요.
이것으로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미 다른 댓글에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란도님 자신일 뿐 주의깊게 지켜보는 저의 입장에서는 '단어를 사용한 돌려막기'로 보입니다.
이것은 저와 님이 사용하는 단어가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님이 무슨 단어를 사용해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저는 단어를 보는게 아니라 님 말씀에서 구조가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님의 말씀에서는 구조가 잡힐 듯 하다가 "공동체, 세력, 상부구조"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폭넓게 사용되면서 구조가 망가지고 있습니다.
님 얘기가 하나의 닫힌계(게임, 모델)를 구성해야 되는데 님이 자신의 주장에 구조를 조립하다가 중간에 막히면 너무 스케일이 큰 개념을 가져와서 스스로 그 구조를 파괴하고 있어요.
"공동체, 세력, 상부구조"라는 단어가 거의 "이것이 신의 섭리다"라는 식으로 남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얘기하다가 애매하게 막히면 "그것이 신의 뜻이겠지" 하는 식으로 종교인이 레파토리로 사용하는 것처럼요.
한번 '공동체, 세력, 상부구조' 등 님이 지금 즐겨 사용하는 단어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글을 써보세요. 그러면 뼈대의 실마리를 잡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얘기 나누기를 희망하며 방법론에 있어 참고할 수 있는 조언을 드리는 것이니 생각해 주세요.
리더는 이런 덩어리에서 개인을 개체로 분리해낼줄 알아야 합니다. 집단의 특성상 개인은 집단뒤에 숨어 있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리더는 개인을 자꾸 소집해야 합니다. 여기서 그 집단에알맞은 사람 혹은 능력이나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안된다면 평소에 안목을 갖추는 자기를 훈련 시키기라도 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구조론을 자기안에 체득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판단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자신이 꼭지점에서 결정한다라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상황이 되면 써먹을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것은 자신이 그런 안목을 갖고 있으면 세상이 보이므로 일단 뭔가에 대해서 휘둘리지는 않겠지요. 크게 써먹지 않더라도 삶에서 효율성이 나올수 있겠지요. 그리고 거기서 스스로 존엄하게 세상과 만나므로 때로는 낙차가 느껴져 슬프기도 하겠지만, 슬픔도 공동체를 의식하게 되면 환희로 바뀌기도 하므로, 그래서 계속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고 봅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만나고 부딪히는 가운데 오는 고민들은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것이고, 그것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다른 것으로 덮어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보입니다. 머물지 말고 계속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문제를 만나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면 10년이 가도 자기안에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게되어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문제를 보는 것에 있어서 물론 개인의 성격이나 소양도 관여는 되겠지요. 그러나 문제를 보는 것에 있어서 자기를, 정확히 감정을 배제시키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감정으로 문제를 보고 감정으로 해결하고...최악의 상황이 되겠지요.
이러한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알지 못해서 무겁게 삶을 누르는 괴로움은 없어진다고 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일어나는 조건반사적인 화나 감정발산...그냥 이런 것들은 누구나 하고 살기 때문에 ... 솔직해지는 것이 좋지만, 조절할줄 알면 더 좋겠지요. 감정에 휘둘리면 일단 자신이 먼저 피곤해지니까요.^^
그런분들도 구조론에 접하고 나면, 이 사이트에서 읽었던 문장과 단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조금씩 떠오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같은 경우도 무의식적으로 구조론에 뇌가 동화되어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계속해서 동렬님 글을 보고 뇌에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고있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디서건 언제나 패턴을 찾고있고, 뼈대를 보려하고 있고,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구조론으로부터 한번이라도 긁음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분명 언제가 그 가려움을 의식할때 즈음, 구조를 인식하려는 의식이 생기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바야흐로 구조론 연구소가 기를 떠나 승으로 나아가는 단계 같습니다.
직접 참여는 못하고 그 과정을 보는 즐거움이 커요. 그 과정! 그 풀이과정의 노출이라고 해야하나요?
귀족님, 기준님의 본격 등장, 아란도님의 꾸준함등... 신선한 자극제가 되고 구조론 주변부나마 못떠나게 하는 것 아닌가 합니다. 자영업하는 저의 위치, 좌표를 계속 확인 또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남아 있고 싶다 이말이죠.
비유적으로 가끔 이 말이 실감이 나요. 어느철인이 말한대로 '개미가 사람이 위에서 보고 있는 것을 의식할 수 없을 것'이듯이, '일상(반)인은 구조가 보고 있슴을 의식할 수 없다'라고 말이죠... 그러니 구조가, 결이, 순서와 질서와 방향이, 구조론이 뭔지 계속 보고 또보고... 짝 사랑에 빠진듯 하요...^^
저는 영감이 넘치는 글이 좋습니다. 김동렬님의 글은 어떤 영감을 줍니다. '이게 뭐니' 하고 떡을 던집니다. 그럼 받아 먹느냐 안먹느냐는 본인 선택입니다. 떡을 먹어야 되나 안먹어야 되나 스트레스 받습니다. 낼름 받아 먹어야죠. 공짜로 주는 떡을 왜 바닥에 떨어지게 합니까? 공중에 던져진 것이 떡인지 된장인지 똥인지 , 시료분석을 통해 정체를 파악한후 포크로 먹을 것이냐 젓가락으로 먹을것이냐를 판단하여, 점심에 먹을것이냐 저녁에 먹을 것이냐까지 생각하다보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그냥 있는 그자리에서 떡먹을 준비자세 취하고 떡 맛있게 먹으면 됩니다.
시속 43km의 속도로 뛰어가고 있는 토끼에게, 시속 54km로 뛰어가고 있는 캥거루가 한마디 합니다. '너는 너무 느려..... 최소 50km 정도는 되어야 빠른 편이라고 볼수 있는 것이거든.....' 그리고는 시속 75km 속도로 달려가는 말에게도 한마디 합니다. '너는 너무 빨리 뛰기때문에 문제야 그러다가 심장이 터지거든? 시속 54km가 기준속도야....'
캥거루가 시끄러운 이유는 캥거루네 집에 토끼와 말이 세들어 살기 때문입니다. 캥거루의 기준이 객관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사회제도적 객관의 미세조정은 주관의 요소입니다. 주관을 그럴싸하게 만들어 포장한 것이 객관이란 것이죠. 큰 방향이란 것은 자유도의 증진이 맞겠습니다만.... 전략적 선택지에서는 힘의 논리에 의해 주관이 충분히 객관으로 포장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속 43km로 가느냐... 시속 54km로 가느냐.... 시속 75km로 가느냐 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보고 있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방향으로 어떤 세를 모아 갈 것이냐? 시속 43,54,75가 각각 절대속도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한방에꿰어 , 한광주리로 집합시켜 모아내는 리더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관, 객관, 포장, 힘, 선택, 리더, 영감, 굴러들어온 떡... 선택의 문제..., 쓰신 글을보고 나열해 봅니다.
매순간의 반응성, 상호작용, 의사결정, 문제해결의 작업에 말랑말랑한 두뇌이기를 기대하며 연구소 글들을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얘기 했던 미친사람 패턴을 이런대다 인용하면 어떡하나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