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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독교도들은 사랑하지 않을까?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생활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인생도 달라진다.’ 장미란 선수가 강연에서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행동≫습관≫생활≫인생의 전개가 돋보인다. 이는 구조론적인 사고라 할 수 있다. 생각 다음에 행동이고 행동이 쌓여 습관이고 습관이 모여 생활이고 생활이 통일되어 인생이다.

그냥 단어들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순서가 있다. 언어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부자관계도 있고 부부관계도 있다. 붙어다니는 짝도 있고 적대하는 관계도 있다. 촌수가 있다. 1촌도 있고 2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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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대한 비판은 삼가해 왔다. 종교를 반대한다는 마르크스교가 더 위험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종교화 되는 이유는 원초적으로 인간의 삶에 그에 해당하는 포지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 인용한 생각≫행동≫습관≫생활≫인생의 전개에서 보듯이 인간의 삶은 일정한 모형을 가지고 있다. 그 입체적 모형 안에서 포지션들이 있다. 그 포지션들 중 하나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공격수든 수비수든 하나가 빠지면 팀이 와해된다. 투수나 포수나 하나를 빼놓고 시합을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종교의 포지션이 존재하는 이상 종교를 전면 부정할 수는 없다.

인위적으로 종교를 부정하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밀하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면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포지션들로 이루어진 입체적 모형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는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의 전개를 가진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삶은 경험≫인식≫판단≫행동≫생활로 대응한다. 이는 사회에서 과학≫철학≫사상≫이념≫종교(미학)로 나타난다.

● 사실≫의미≫가치≫개념≫원리
● 경험≫인식≫판단≫행동≫생활
● 과학≫철학≫사상≫이념≫종교(미학)

이들은 전부 갖추어져야 한다. 모여서 입체적 모형을 이루어야 한다. 무신론자들이 과학을 앞세우지만 표면의 사실에서 경험하여 과학할 뿐 그 배후의 의미와 가치와 개념과 원리로 나아가지 못한다.

왜 종교인가? 삶의 일관성을 원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무수한 사건들의 집합이다. 숙녀를 만났을 때는 신사가 되어야 하고 아내를 만났을 때는 남편이 되어야 하고 자녀를 만났을 때는 아빠가 되어야 한다.

이 개별 사건들이 서로 충돌하고 모순될 때 위화감을 느낀다. 어색해진다. 부자연스럽다. 앞뒤가 맞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막걸리를 먹다가 갑자기 양주를 먹으려면 이상해진다. 인간은 이를 되도록 조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문화가 있고 양식이 있다. 그 양식을 낳는 미학이 있다. 그 미학이 발달하여 있지 못하므로 종교가 이를 대신한다. 종교에는 미학이 반영되어 있다. 불교에는 불교미학이 기독교에는 기독교 미학이 있다.

그 미학을 완성하는 것은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종교를 믿거나 아니면 과학을 내세우고 실제로는 마르크스교를 믿거나 혹은 앞뒤가 맞지 않는 난폭한 행동을 하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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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믿음에 기반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믿음은 앎에 대해서 믿음이다. 앎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무엇인가? 인식은 판단을 낳고 판단은 행동을 낳는다.

그런데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판단과 행동을 해야할 때가 많다. 아기는 엄마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른다. 어떻든 엄마를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

갓난 아기가 엄마에게 ‘내게 젖을 주려는 거야 독을 주려는 거야?’하고 의심하는 일은 없다.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판단과 행동을 가능케 하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믿음이 필요하다.

사실은 경험과 과학을 따르고
의미는 인식과 철학을 따르고
가치는 판단과 사상을 따르고
개념은 행동과 이념을 따르고
원리는 생활과 종교(미학)를 따른다.

여기서 판단에는 사상, 행동에는 이념으로 구분된다. 사상은 혼자 가질 수 있지만 행동은 혼자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행동에는 항상 상대가 있고 그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판단과 행동은 일어난 특정 사건에 한정되지만 생활은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생활은 하루 24시간 내내 문제가 되고 탄생부터 죽음까지 계속 문제가 된다. 그런데 사상과 이념은 인간을 24시간 통제하지 않는다.

만약 사상과 이념이 인간의 24시간을 통제하려 든다면 그게 곧 종교다. 그래서 마르크스교라는 표현을 쓴다.

사상과 이념은 특정 사건을 해결할 뿐 일생을 전부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에게 종교가 요청되는 것이다. 종교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필요하고 삶의 양식이 필요하고 미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경험≫인식≫판단≫행동≫생활을 통일하는 것이다. 하나의 기준에 맞추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가는 것이다. 그래야 어색하지 않다. 불안하지 않다.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

무엇보다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정상에서 전모를 보아야 한다. 그것이 신(神)에 대한 개념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신의 존재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상관없이 완전성 그 자체를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경험을 인식의 동그라미 안에 가둘 수 있고 인식을 판단의 영역 안에 갈무리할 수 있고 판단을 행동에 옮길 수 있고 그 행동이 생활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다치지 않게 할 수 있다. 허둥대지 않고 일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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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가르친 사람은 예수다. 증오와 복수를 가르치는 쪽은 유대교다. 일부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유대교의 가르침 사이를 편리한대로 오가면서 사랑과 증오를 동시에 실천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실패다. 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기독교가 사랑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으되 진정 사랑해야 할 대상을 깨닫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엉뚱한 것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대등해져야 한다.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완전성을 내 안에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노예가 주인을 사랑할 수는 없다. 복종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섬기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희생도 아니고 봉사도 아니다. 사랑은 존엄이다. 사랑은 자유다. 사랑은 소통이다. 사랑이란 나로 인해서 너의 감추어진 가능성이 드러나고 너로 인해서 내 안의 가능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 존엄≫ 신의 완전성을 내 안에서 찾아낸다.
● 자유≫ 신과 대등한 눈높이에서 독립적인 나를 완성한다.
● 소통≫ 내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의 전부로 당신의 전부를 끌어낸다.
● 사랑≫ 이러한 전개를 갖추고 스위치를 켜야지만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 행복≫ 사랑에 의하여 보상되는 결과일 뿐 목적이 되어서 안 된다.

신의 완전성을 내 안에서 찾아내는 것이 존엄이다. 드높은 존엄 안에서 무한한 자유가 펼쳐지는 것이며 그 자유의 실천에서 혼신의 연주와 같은 ..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끌어내는 완벽한 소통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소통의 오고감에 의해서.. 그 수평적 교류의 대등함에 의해서 온전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며 삶의 행복은 그 결과의 확인일 뿐이다. 한쪽이 높고 한쪽이 낮다면 그러한 소통은 불발이다. 오고감이 없다.

나는 아직 신의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한 명의 기독교인을 보지 못했음을 유감으로 한다. 내 안의 전부를 끌어내지 않으면 신은 당신의 전부로 응답하지 않는다. 일방적 요구를 내거는 기도에는 건성의 응답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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