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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806 vote 0 2008.08.30 (00:02:43)

깨달음과 구조론

어떻게 구조에 다가설 것인가이다. 구조론은 깨달음과 관계가 있다. 구조는 내밀한 것이다. 겉에서는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구조는 체험에 의해서만 직관되고 깨달음에 의해서만 통찰된다.

구조는 작동해야 모습을 드러낸다. 시스템이 멈추어 있을 때는 구조가 파악되지 않는다. 시스템을 작동시켜 에너지 순환 1 사이클의 전체과정에 참여해 본 경험에서 직관이 얻어진다.

그 직관을 끌어내는 것은 깨달음에 의한 통찰이다.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이다. 그것은 세상과 나 사이의 관계설정에서 비롯된다. 깨달음은 세상과 나와의 실존적 대면에서 내가 포지션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입각(立脚)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지점이 있다. 세태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체제에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각을 세우고 저항하여 나의 입지를 확보할 것인가이다. 주인의 관점이 있고 손님의 관점이 있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의 관점이 있고 남의 게임을 구경하는 관객의 관점도 있다. 사태에 개입하여 판정하는 심판의 관점도 있고 뒤로 물러나 사건에서 발을 빼고 배후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정하는 감독의 관점도 있다.  

먼저 그 관점을 얻어야 한다. 어려서다.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을 얻었다. 기법을 개발했는데 그것은 말 끝에다 ‘라고 한다’를 붙이는 것이다. ‘1+1은 2다’와 ‘1+1의 값을 2라고 한다’는 느낌이 다르다.

찰흙 한 덩이에다 한 덩이를 더하면 역시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는데 왜 1+1은 2인가? ‘라고 한다’를 붙이면 ‘1+1은 2라고 한다’가 된다. 찰흙을 더하여 얻은 큰 덩어리를 2라고 하기로 우리가 약속한 것이다.

이때 숨은 구조가 드러난다. 존재의 대칭성이 판명된다. 감추어져 있던 사회의 약속이 드러난다. 관계가 드러나고 게임의 룰이 드러난다. 그것이 이른바 ‘논리’라는 것이다. 깨달음은 논리의 획득이다.

논리는 사실에 대해 논리다. 어떤 보이는 사실이 있다면 그 배후에 의미≫가치≫개념≫원리가 숨어 있다. 논리는 표면의 드러난 사실에서 이면의 숨어서 작동하는 의미로, 가치로, 개념으로, 원리로 상승해 가는 것이다.

사실은 항상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과연 1인지 2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실수로 잘못볼 수 있다. 언제라도 의심해야 한다. 그러나 논리는 다르다.

논리의 세계는 동시성이 작동한다. 일치와 연동의 법칙에 따라 1의 값이 결정될 때 2의 값도 동시에 결정된다. 사실은 매번 확인해야 하지만 논리는 검증된 틀을 한 번 만들어 놓고 반복적으로 써먹는다.

그 보이지 않는 이면에 숨어서 작동하는 논리구조를 통찰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언어라는 시스템의 작동에서 나는 그 논리의 작동현장을 포착했다. 어떤 진술이든 뒤에 ‘라고 한다’를 붙여본 것이다.

그러자 구조가 드러났다. 뒤집어 보는 효과가 있다. 두 번 생각하는 효과다. 모든 의문이 풀렸다. 거꾸로 생각하기다.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값 2의 의미를 1 더하기 1로 약속한 것이다.

왜 1+1은 2인가? 사회가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하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사회의 약속은 항상 상대가 있고 또 증인이 될 제 3자가 있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왜냐하면 논리에 오류가 있을 경우 약속하기에 실패하게 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 자체로 약속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언어로서의 의사소통은 실패다. 언어의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는다.

서로 간에 약속이 지켜져서 의사소통에 성공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서 언어라는 이름의 약속과 그 약속의 신뢰를 담보하는 논리 시스템은 검증된 것이다. 그것이 논리의 힘이다. 구조 속에 논리가 있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 이야기가 계기가 되었다. 과연 거북이 토끼를 이긴 것일까? 토끼가 거북보다 빠르다는 사실이 변하지 않을진대 거북의 일방적인 승리선언은 허무할 뿐이다. 납득할 수 없다.

내게는 큰 화두로 되어 이후 골똘히 생각했다. ‘라고 한다’를 적용하여 ‘거북이가 이긴 걸로 한다’고 바꾸어보니 납득이 되었다. 그렇다. 그것은 누가 빠르냐는 사실판단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약속의 문제였던 것이다.

거북의 승리 의미는 사회가 거북을 칭찬하고 돕기로 약속한 데 있다. 승자에게는 보상이 주어진다. 누가 빠르냐는 사실판단에서 누가 보상받느냐는 게임의 룰로 관점을 바꾸니 사실의 배후에 가려져 있던 의미가 드러났다.

모든 명제 뒤에 ‘라고 한다’를 붙여보았다. 그랬더니 구조가 드러났다. 사실의 배후에 숨은 의미가 드러나고, 가치가 드러나고, 개념이 드러나고, 원리가 드러났다. 세상의 모든 의문이 한꺼번에 풀렸다.

누구와 논쟁해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아이들이 1층에서 멱살잡이로 다투며 서로 교착되어 씩씩거리고 있는데 2층 높은 곳에서 원히 내려다보며 낄낄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통쾌했다.    

논리는 두 사람 사이의 약속이며 약속은 상호성을 가진다. 약속은 아방과 타방,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을 서로 짝지어 연동시켜 동시에 확정한다. 그리하여 처음과 끝이 맞아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논리는 구조의 내적 정합성을 만족시킨다. 무엇인가? 자연을 관찰하여 데이터를 얻으면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의심이 든다. 1+1은 3인데 혹시라도 내가 실수로 2로 잘못 본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게임은 의심될 수 없다. 명제의 일방성과 달리 게임은 상호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게임은 항상 상대가 있다. 내가 이렇게 나가면 상대가 이렇게 응수한다는 것이 있다. 상대와 나 사이에 오고가는 것이 있다.

명제가 죽어 있는데 반해 게임은 살아있다. 게임은 시간 상에서 현재진행하며 오류가 있을 경우 즉시 스톱된다. 그러므로 게임은 오류가 즉시 확인된다. 깨달음은 죽은 명제를 산 게임으로 변환시킨다.

게임은 자동차와 같다.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면 그 자체로 고장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게임은 처음과 끝이 연동된다. 처음 1을 결정할 때 2와 3의 값도 연동되어 동시에 결정된다.

그 즉각적 반응이 자동차의 질주와 같다. 구조는 직관과 통찰로 접근되며 그것은 죽은 명제를 산 게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라고 한다’를 적용하여 사실을 의미≫가치≫개념≫원리로 상승시켜 가능하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연속적인 대칭구조로 전개된다. 그 안에 게임의 룰이 있다. 구조가 있다. 완전성이 숨어 있다. 그러므로 만약 오류가 있다면 의사소통에 실패하게 된다.

‘라고 한다’를 붙이는 것은 문장 뒤에 동사 하나를 더 붙여서 진술을 객관화 한 것이다. 의사소통의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멈춰 있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움직여버리는 것이다.

멈춰있는 자동차는 확실히 오류가 있다. 멈춰있는 자동차를 보고 집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자동차가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움직여 보면 도로와 신호등과 운전수와 승객 사이의 구조가 드러난다.

자라는 나무는 조화가 아니고 움직이는 개는 석상이 아니다. 멈춘 것은 속일 수 있지만 움직이는 것은 속일 수 없다. 움직일 때 주변과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관계가 증인이 되기 때문이다. 관계로 보면 보인다.   

흔히 ‘정의가 승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믿을 수 없다. 때로는 불의가 승리할 수도 있다. ‘라고 한다’를 붙여 본다. 정의의 승리일 경우에 한해서 승리를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게임의 룰이다. 사회의 약속이다. 논리구조의 작동이다. 만약 불의가 승리하면?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말은 ‘정의가 승리해야 싸움이 끝난다’는 의미다.

그렇다. 그것은 정의가 승리할 때 까지 싸움을 멈추지 말자는 사회적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제 수긍이 된다. 정의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테니까.

원리≫개념≫가치≫의미≫사실이 있다. 우리는 말단부인 사실의 세계에 살고 있다. 깨달음은 거기서 한 단계 상승하여 의미로 나아가는 것이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치로 상승하는 것이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 주어와 술어, 명사와 동사의 연속적인 대칭구조다. ‘라고 한다’를 붙인다는 것은 동사에 대해 그 이전단계인 명사를 공략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어를 공략하고 더 나아가 전제를 공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단계씩 나아갈 때 마다 의미로≫가치로≫개념으로≫원리로 상승한다. 사실은 드러난 것이고, 의미는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잇는 것이고, 가치는 상대와 짝짓는 것이고, 개념은 전체를 통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전제를 검토하지 않고 진술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1+1은 2인 이유는 2의 값을 1+1로 하기로 전제했기 때문이다. 룰이 전제다. 명사를 보고 주어를 보고 전제를 보면 보인다.

논쟁이 벌어지면 논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옳다.’ 이때 나는 ‘아냐. 틀렸어. 내가 옳아’ 하고 반격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너는 내가 옳다라고 말하는 역할을 맡은 거야.’

뭐든 게임으로 만든다. 역할극으로 만든다. ‘아냐 틀렸어’라고 반론하지 않는다. 대신 ‘그래 넌 여당이니까 네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래 넌 남편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역할인 거지.’

구조가 드러난다. 상대방이 정상에 서 있는지 기슭에 서 있는지, 혹은 주인의 입장에 서 있는지 손님의 입장에 서 있는지가 드러난다. 각자의 입각한 포지션이 드러나면 모든 논쟁은 불필요해진다.

선문답은 포지셔닝 게임이다. 조주가 ‘차나 한 잔 들게(喫茶去)’라고 하면 무슨 뜻인지 의미가 알쏭달쏭 하지만 ‘조주선사는 차나 한잔 들게라고 말하고 있네’라고 하면 눈 앞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진다.

조주가 상석에 앉아 있고 그 맞은 편에 손님이 앉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차 한 잔이 놓여진다. 거기서 서로의 역할이 드러난다. 주인은 권하고 손님은 받아들인다. 조주와 손님 사이에 성립한 게임의 룰이 관측된다.

거기에 포착해야 할 완전성이 있다. 그 완전성을 직관하여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조주는 누가 어떤 의도로 방문하더라도 그 한 폭의 그림을 순간에 완성시켜 내기에 성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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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얻는 것이다. 그것은 일체의 포지션의 우위에 서는 것이다. 행복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소통에 있어서도, 자유에 있어서도, 낳음에 있어서도 포지션의 우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행복해’ 하고 말들은 하지만 그 행복의 노예가 되어 있기 십상이다.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 안에 갇히어서 포로된 신세다. 자기 힘으로 그 행복의 길을 개척할 수 있어야 진짜다.

사랑에 있어서도 우위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수동적으로 사랑받기 원한다면 그것은 사랑의 소비에 불과하다. 능동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관계를 건축하여 그 사랑을 밀도를 높여가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자유롭다’고 선언하면 이미 자유에 종속된 몸이다. 자유의 필요충분 조건에 갇히어 예속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아가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며 그 자유의 길을 개척해야 진짜다.

포지션의 우위란 2층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정상에서 전모를 바라보기. 그럴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한 차원 위에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조정할 수 있다.

인생과 맞설 때도 그러하고, 사랑과 맞설 때도 그러하고, 운명과 맞설 때도 그러하고, 역사와 맞설 때도 그러하고, 세태와 맞설 때도 그러하고, 신과 대면할 때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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