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나 깨닫는다는 것은 나의 경계를 깨닫는다는 것이며, 그 경계는 넓혀갈 수 있다. 처음에는 내 몸뚱이 하나가 내가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고유한 나의 영역에 속하지만, 내가 성장함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점차 확대된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몸뚱이 뿐만 아니라 나의 마음, 사상, 소유, 친구, 가족 그리고 나에 대한 사회의 신뢰, 타인의 마음 속으로 침투한 나에 대한 기억들이 모두 나의 통제권에 속하게 된다. 결국 너와 나의 경계도, 세상과 나의 경계도 사라진다. 그 지점에서 근원의 신을 만나게 된다. 신이라는 개념의 중핵은 구조론적 관점에서, 개인으로서의 내가 복제본임을 깨닫고 원본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나라는 것은 곧 나의 인격이며 그 인격은 인류의 역사 수만년 지혜의 총합으로서의 세계인격의 일부를 구성한다. 만약 인류의 역사가 없었다면 나의 인격은 아마존의 오지에 고립된 원주민과 같을 것이다. *** 여기서 인격은 독립적인 의사소통의 단위,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작은 단위가 모여 큰 단위를 이룬다. 개인의 인격이 모여 세계인격을 구성한다. 세계인격이 원본이며 개인의 인격은 그로부터 투사된 복제본이다. *** 고립된, 그러므로 소통하지 못하는 나의 인격은 왜소한 것이다. 반면 인류문명과 온전히 소통하는 나의 확대된 인격, 세계인격은 60억 인류가 가진 지혜의 총합일 수 있다. 그러므로 소통해야 한다. 그 인류의 지혜와 소통하고, 그 인류의 역사와 소통함으로써 그 문명의 주인 자격을 행사해야 한다. 그럴 때 세계인격은 나아가 인류의 현존재를 초월한 모든 것의 총괄개념으로서의 우주인격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신과 대면하게 된다. 세계인격의 대표자로서 우주인격의 대표자를 만나는 것이다. 세계를 대표하고 우주를 아우르는 그 단위에서의 가치판단과 의사소통을 가지는 것이다. 신은 경계가 없다. 경계가 없는 것은 큰 것이 아니라 점차 커지는 것이다. 본래 작았으므로 점점 커진다. 그러므로 신은 완전성을 의미하지만 그 안에는 일정한 정도의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다.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더 커질 수 없으며 커질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다. 역설이다. 먼저 완전성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아야 한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것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낳음이 있는 것이 완전하다. 단단한 것은 낳지 못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은 오히려 무른 성질을 가진다. 완전성이란 어딘가에 고착될 수 없는 것이다. 신의 신이라 할 신의 자궁에서 유도된 존재이며, 그것은 불완전한 많은 작은 조각들의 집합이며, 그 조각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의 성장에 의해 큰 신은 성립된다. 이러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의 일부를 구성하며 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너와 나는 불완전한 한 조각의 작은 퍼즐이며 합쳐서 신을 성립시킨다. 나라는 인격체 역시 내 몸을 구성하는 작은 세포들의 집합이듯이 신 역시 그러하다. 깨달음에 의해 가능하다. 깨달음은 최종적으로 미학이다. 미학은 삶의 스타일이며 그 삶은 매 순간의 작은 실천들의 집합이다. 깨달은 사람이 깨닫지 못한 사람을 일깨워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은 깨달은 이를 위한 공간이며, 깨달은 이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줄 목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미학을 완성할 것이며 그것을 삶 속에 녹여낼 것이며 그것으로 큰 흐름을 만들 것이다. 서구가 부흥한 것은 그 흐름을 주도한 영국과 프랑스 등이 보다 앞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느새 그들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앞서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교만해 졌다. 오늘날 서구인들에게 상층부문화는 거의 사라졌으며 그들이 자랑하는 오페라 따위는 껍데기의 화려함으로 시골사람을 위압하려는 유치한 것이며, 프랑스인이 자랑하는 와인문화 따위도 졸부들의 허세에 불과하다. 그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전통을 물려받은 오늘날의 미국은 천박하기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 미국이 세계사를 주도한다는 것이 인류의 실패다. 그 실패의 광경 한번 참혹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앞선다. 그러나 진실로 앞선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 그리 보일 뿐이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현재 서구인이 한국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서구의 그들에게 보는 눈이 있을 리 없고,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를 자각하지 못하니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기껏 드라마 대장금 따위로 그들에게 먹힐 리가 없다. 그들이 동양정신의 본류와 거리가 먼 달라이라마를 추종하여 붐을 일으킨다는 것은 과거 미국에서의 라즈니시 선풍과 마찬가지로 해프닝이 된다. 슬픈 희극이다. 우리 스스로 자각 못하는 동양정신의 정수가 무엇인가다. 그들이 모색하는 현대성의 돌파구는 실로 일본의 젠 스타일을 추종한 것이며 그 일본의 젠 스타일도 실은 껍데기 뿐이며, 원본은 따로 있으며, 그 수준은 한국의 선비 스타일에 못 미치는 것이다. 한국의 선비 스타일이 미의식에서 앞서 있지만 유교양식 그 자체는 아니며 혜능이 불러 일으킨 새바람이 고루한 유교주의를 일깨운 결과다. 정답은 추사선생의 결론에 나와 있지만 그 미의식의 정수를 아는 사람은 많아야 한국에서 다섯 명 이하다. 그 다섯 사람 정도가 지구 상에서 가장 앞서 있으며 내가 제안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스타일이다. 개인의 스타일이 모여 공동체의 스타일을 완성한다.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 스타일이 편한 옷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사람, 삶과 체화되어 있는 사람은 깨닫지 않아도 이미 깨달은 것이며, 반면 그렇지 않아서 그 스타일이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깨달아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을 어색하게 느끼겠지만 언젠가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이 이곳의 목표이며 우리의 존재 이유다. 그대는 어떠한가? 이곳이 자연스러운가 어색한가? 신의 스타일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사람, 그것이 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사람,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추사와 다산과 초의를 합쳐놓은 듯한 사람, 배울 필요도 없이 이미 삶 그 자체인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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