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나는 구조론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데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배는 강을 건너는 수단일 뿐이며.. 나의 진정한 관심은 강 건너 저 편에 있다. 강 건너 저 편에 무엇이 있나? 미학의 세계가 있다. 십우도는 입전수수로 끝난다. 돌아가 다시 저자거리에 손을 담근다. 문제는 원리의 측면에서 볼 때 입전수수가 그 이전의 모든 단계보다 앞선다는데 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 이곳은 스승과 제자가 따로 없는 곳이지만.. 좋은 팀에는 감독도 있고 코치도 있어야 한다. 팔짱끼고 지켜보는 사람이 감독이고, 그라운드에서 뛰는 사람이 선수고, 뒤에서 박수치는 사람이 관객이다. 가르치기 때문에 스승이 아니고.. 배울 것이 있기 때문에 스승이다. 7살 아이라도 이미 감독의 포지션에 가 있는 사람이 있고, 천 명의 제자를 두었어도 여전히 제자의 포지션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 감독은? 개입하지 않는다. 그라운드에서 뛰지 않는다. 논쟁하지 않고 대적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지점에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한다. 최종적인 것은 미학이며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다. 삶은 실천이다. 예수, 노자, 혜능, 소로우, 김기덕은 감독의 포지션에 가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석가는 뛰어난 논객에 불과하다. 석가 이전부터 있었던 인도사상이라는 위대한 자궁에서 배출된 특출난 한 명의 선수였던 것이다. 석가 이후 반야경을 일군의 사람들에 의해 석가의 모자란 부분이 채워졌고 최종적으로 육조 혜능에 의해 완성되었다. 무엇이 완성되었나? 미학이 완성되고 삶이 완성되었다. ‘깨달음’이라는 굴레 마저 초월한 것이다. ### 어떤 분야든 그렇다. 표면에서 기교로 노는 것과 내면의 깊은 경지에서 끌어내는 것은 다르다. 선수들은 기교로 풀어낸다. 기교도 가지가지다. 머리의 기교가 있는가 하면, 가슴의 기교도 있고, 몸의 기교도 있다. 머리로 아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구조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에 의존할수록 감이 죽는다. 어떤 단계에서 극한으로 밀어붙여 극적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더 높은 차원의 다음 단계로 수준을 높여서 면피하려 한다. 논객이 불리해지면 신자유주의 운운하며 유식한 사람들만 쓴다는 전문용어 속으로 도망가는 것과 같다. 사실관계에서 밀리면 진영논리 뒤에 숨고, 진영논리에서 밀리면 전문가의 팩트 속으로 도망가며 맴을 돈다. 가슴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발달된 감으로 밸런스를 포착할 줄 안다. 이 경우는 수준을 끌어올리지 못한다. 낮은 수준에서는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지만 더 높은 단계로 향상하지 않는다. 환경이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면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다. 젊어서 한 때는 신동 소리를 듣지만 같은 레파토리만 반복하다가 돌아온 서태지처럼 꼴이 우습게 된다. 그에게 재능은 있어도 시야는 없다. 몸으로 아는 사람이 있다. 반복훈련을 너끈히 소화해서 근육의 기억으로 아는 사람이다. 이 경우는 연주가 점점 춤으로 변한다. 마음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근육의 논리를 따르니 주객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운전자가 자기 취향을 버리고 자동차의 성능에 길들여지는 격이다. 점차 환경의존적이 되어 연장을 탓하게 된다. 더 좋은 무대, 좋은 악기, 좋은 관객이 자신을 보조해 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투덜댄다. 진짜는 따로 있다. 표면에서 헤엄치지 않고 밀도의 깊은 자궁에서 끌어내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머리의 기교도, 가슴의 기교도, 몸의 기교도 사용하지 않는다. 환경이라는 소품을 이용하지도 않는다. 대상으로부터 벗어나 삶으로 돌아가 몸으로 부딪힌다. 맨 땅에 부딪힐 때 소리가 난다. 밀도의 깊이를 가질 때 그 울림의 폭은 넓다. 그 반향의 넓이 만큼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법이다. 선수는 대적해야 할 상대가 정해져 있지만 감독은 그 상대가 늘 변한다. 그들은 어떠한 환경변화에도 적응해야 한다. 모든 기교의 위에 올라서서 언제라도 포지션의 우위를 점할 수 있어야 한다. 연주자가 새로운 무대에 서면 다른 별을 방문한 것과 같다. 그곳은 중력의 세기가 달라서 중력의 영향이 미치는 지구에서 연습한 것은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세팅해야 한다. 매 순간 백지상태에서 새롭게 세팅할 수 있는 사람이 스승이다. 기존의 세팅된 것을 불러와서 재활용하는 사람이 제자다. 결정적으로는 삶이다. 삶이 그 세팅된 무대가 되어야 일관되게 포지션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알아야 한다. 우리는 깨닫기 위해서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무대를 연출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인 것이라는 사실을. 공명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울림과 떨림은 전파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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