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 가는 길 길을 찾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에 띄는 표지로 찾는 방법이고 둘은 방향감각으로 찾는 방법이다. 가까운 곳을 갈 때는 두드러진 표지를 기억해 두는 방법을 쓰면 되고, 먼 길을 갈 때는 방향감각으로 찾는 방법을 써야 한다. 인생의 길은 먼 길이다. 방향감각으로 찾아야 한다. 방향은 우주 안에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다. 엔트로피의 증대다. 상호작용 총량의 증대다. 인생의 여정에서 무수한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 잘 모르면 일단 자유를 선택해야 한다. 몇 푼 더 받으려고 자유를 양보하면 좋지 않다. 월급이 적어도 자유시간을 확보하여 투잡을 뛰는게 낫다. 돈이나 출세나 명성은 눈에 띄는 표지다. 그런 표지들은 도로아미타불 되기 십상이다. 돈을 벌었나 싶으면 어느새 빈털터리 되어 있고, 명성을 얻었나 싶으면 관종이 되어 있고, 사귀었나 싶으면 깨져 있다. MBN에서 하는 자연인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들 왕년에 한 가닥씩은 했다잖아. 엎어지고 자빠져도 뒤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자유다. 공부를 하면 지식이 쌓이는 만큼 자유롭다. 운동을 하면 힘이 세져서 그만큼 자유롭다. 인맥을 쌓아두면 활동하기 자유롭다. 진급을 해도 자유롭고 자식을 키워도 늘그막에 의지할 수 있다. 성공의 표지들은 조삼모사에 새옹지마라서 믿을 수 없지만 자유의 총량은 조금씩 증대된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난다. 물론 늙고 병들면 다 소용없지만 말이다. 자유 총량은 50대가 정점이다. 자유가 조금씩 감소하여 결국 죽는다. 자유를 뺏기기 싫어서 입으로는 자유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남의 자유를 약탈하는 보수꼴통이 되기 쉽다. 자유는 상호작용 중에 용해되는 복잡한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만 보는 것이다. 방향만 판단하기다. 어차피 중간은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 새옹지마에 조삼모사다. 이기는게 지는 것이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역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길을 찾을 때는 다섯 가지 매개변수를 추적해야 한다. 지도 위에 일단 세 개의 지점을 표시해야 한다. 하나는 목적지다. 둘은 현재 내 위치다. 셋은 비교판단의 기준이 되는 잣대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계속 변하므로 지도 위에 표시할 필요가 없지만 헷갈릴 때는 표시해야 한다. 네 번째는 내가 움직인 정도다. 다섯 번째는 나의 움직임에 연동되어 변하는 목적지와 잣대의 관계변화다. 목표지점과 기준점이 표시된 지도를 들고 거기에 나와 나의 변화와 나의 변화에 연동되어 변하는 잣대의 변화를 보고 인간은 길을 찾는다. 그것은 비율로 존재하며 화살표로 나타나므로 방향이다. 이걸로 완벽하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눈에 띄는 표지는 위험하다. 잣대가 없이 목적지만 보고 길을 찾으려 하다가는 길을 잃고 그 주위를 맴돌게 된다. 구조론은 다섯이다. 지도에는 두 점이 표시되어 있다. 거기에 나를 추가하여 지도에 세 점을 찍은 다음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매개변수를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플러스면 자유의 증대이고 마이너스면 자유의 손실이다. 플러스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기술이다. 사회와 맞물려 돌아가는 촉수의 숫자가 증대되었으면 플러스고 반대로 겉돌고 있으면 마이너스다. 노인은 건강의 악화와 기억력의 감퇴, 친구의 감소로 마이너스다. 이것 하나만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내가 움직이는 정도에 따라서 목적지와 잣대의 간격이 변한 정도를 보고 길을 찾아간다. 이것이 방향감각이다. 내가 움직일 때 주변의 산이나 별이 이동한 정도를 파악한다. 별들은 움직이므로 변하지 않는 북극성을 이용한다. 내가 움직였을 때 연동되어 일제히 움직이면 나의 자유가 커진 것이다. 내가 발언했을 때 메아리가 크면 자유가 커진 것이다. 아무 반응이 없으면 자유가 없는 거다. 감옥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다. 자유가 없다. 그런 거다. 세상과 긴밀하게 맞물려야 한다. 무엇인가? 성공이나 출세나 명성이나 평판이나 신분이나 돈이나 파트너는 내가 길을 찾는 과정에 필요한 표지들에 불과하다. 큰 사업을 할 때는 표지 보고 길 찾으면 안 된다. 가까운 길을 갈 때는 표지가 도움을 주지만 먼 길을 갈 때는 방향감각으로 찾아야 한다. 돈이나 출세나 명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만큼 왔어.’ 하고 자랑할 수 있다. 그뿐이다. 자유의 증대가 중요하다. 신체가 건강해져도 자유롭고, 친구가 늘어나도 자유롭고, 돈이 많아도 자유롭고, 결혼을 해도 자유롭다. 명절에 떳떳하게 고향 갈 수 있잖아. 표지는 잃어먹어도 괜찮지만 자유를 잃으면 안 된다. 건강을 잃으면 자유가 전혀 없다. 지식이 없으면 자유가 거의 없다. 돈은 빌릴 수 있지만 건강과 지식은 빌릴 수 없다. 신용도 빌릴 수 없다. 빌릴 수 없는게 자유다. 자유는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만 보는 것이다. 나머지는 인생의 무수한 상호작용 과정에 용해된다. 조삼모사에 새옹지마에 패러독스에 아이러니다. 얻었는가 하면 잃었고, 벌었는가 하면 밑졌다. 장사꾼이 돈을 벌었다고 즐거워하지만, 연말에 결산해 보면 남는게 없다. 국힘당 지지율 올라봤자 별로 의미 없다. 선거 때는 기울어진 축구장이 결정한다. 사람들은 눈에 띄는 표지로 길을 찾으려 한다. 자랑하기 쉽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랑하기 어렵다. 내 건강과 내 지식과 내 신용과 내 인맥이 나아졌다구. 이걸 보여주기가 어렵다. 눈에 띄는 표지와 나의 관계는 상대적이다. 표지로는 산속에서 길을 찾을 수 없다. 내가 움직였을 때의 상대적인 환경의 변화량이 포착되지 않는다. 목표지점 주변을 뱅글뱅글 돌게 된다. 우주 안에 이념은 오직 자유뿐이다. 평등이나 평화나 정의는 두드러진 표지다. 그것은 자유의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돈도 명성도 평판도 인기도 신분도 자유를 주지만, 대개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 평화를 구가하다 전쟁을 초래하기 다반사다. 정의가 불의 되는 일은 흔하다. 평등한 제도를 만들면 역차별이라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나 자유는 확실하다. 노예가 해방되면 자유다. 해방된 노예는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한 번 제대하면 그만이지 다시 군대 가지 않는다. 싸이는 뭐냐고?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왜 군대를 두 번 가냐고? 한 번 태어나면 그만이지 다시 엄마의 자궁으로 소환되지 않는다. 자유는 확실히 믿을 수가 있다. 다른 것은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오로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는 누구나 긍정한다. 인간끼리 다툴 때 문제가 된다. 먼저 자유를 먹은 기득권의 사다리 걷어차기 말이다. 자신의 몫을 챙기고 남의 몫을 방해한다. 김영삼이 익지도 않은 삼겹살을 먹고 남들이 먹으려고 하면 ‘많이 묵었제. 고마 일어서자.’ 이런다.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문제다. 이 문제를 조정하려고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유의 충돌해소가 정치다. 자유의 충돌이 자유의 문제지만 정치가 다스리면 되고 우리는 일단 자유를 늘려가면 된다. 골치 아픈 문제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풀라고 하고 시민은 각자 자기 자유를 늘려가다 보면 어느새 강해져 있다. 시장경제가 작동하는 원리다. 자유 총량을 늘리면 해결된다. 대한민국의 자유 총량, 상호작용 총량, 권력 총량, 의사결정 총량을 판단하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믿을 수 없다. 북한사람에게 물어보라. 부탄사람에게 물어보라. 다들 행복하다고 자랑한다. 행복은 눈에 띄는 표지에 불과하다. 앞으로 행복하고 뒤로 불행하다. 남들 앞에서 다정하게 웃다가 집에 가서 부부싸움 한다. GDP는 믿을 수 없다. 일본을 보라. 자유 총량과 상호작용 총량은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최대 다수의 의사결정 참여는 믿을 수 있다. 자유는 절대 되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라간다. 인간은 오로지 상호작용 총량이 양의 피드백이냐 음의 피드백이냐 이거 하나만 보면 된다. 자유는 양의 피드백이고 억압은 음의 피드백이다. 자유를 늘려놓으면 언젠가 이득이 따라온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생산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자유는 더 높은 생산력에 의해 달성된다. 우리는 오로지 생산력의 증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된다. 강단의 지적 생산력과 산업의 물적 생산력과 거리의 문화적 생산력이 다 같이 중요하다. 문제는 착시현상이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해결한 척하는 기술이다. 거리두기 수법이다. 나라를 잘게 쪼개서 띄엄띄엄 서 있으면 문제가 있어도 내게 전달되지 않는다. 왜구가 쳐들어와도 해안가 주민을 100리까지 소개시키고 모른척하면 된다. 명나라가 쓰는 기술이다. 노자의 도교사상이 명나라를 망쳤다. 왕과 신하가 대결한다. 신하가 왕보다 잘하면 실권을 신하에게 넘겨야 한다는게 민주당이다. 신하가 잘하면 신하도 왕을 하면 된다는게 공화당이다. 이순신이 잘하고 있다고? 그럼 오늘부터 이순신은 전라도의 왕이다. 이성계가 잘하고 있다고? 이성계는 함경도의 왕이다. 봉건주의다. 이런 식으로 갈라먹기를 하다 보니 일본은 다이묘가 300명이나 된다. 문제가 생겨도 1/300으로 물타기가 된다. 이쯤 되면 농부들은 화를 낸다. 니들끼리 왕 해먹기냐? 우린 뭐냐고? 왕은 말한다. 니들도 집에서는 왕이잖아. 너도 왕 하라고. 가부장 권력이 좋잖아. 놀부 봐. 흥부 거느리고 흥부 아들 스물네 명을 부하로 부려먹잖아. 아버지는 집에서 왕이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왕이다. 목사님은 교회에서 왕이다. 자 이제 됐지? 다들 불만 없지? ‘그럼 엄마도 왕이야?’ ‘닥쳐! 그 정도만 하라구. 둘이 부부싸움으로 결판내든지. 일이 이렇게 되면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에게 스트레스가 집중된다. 나라를 잘게 쪼개놔서 이들이 결집할 수 없으므로 불만을 외부로 표출할 수 없다. 안으로 썩어간다.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문제를 잘게 쪼개서 몰래 하수구로 버리는 기술이다. 위험한 짓이다. 후진국의 방법일 뿐 경쟁이 치열한 선진국에서 이러면 망한다. 명나라와 조선의 고립주의다. 전쟁이 치열한 유럽에서 이러면 바로 망한다. 생산력의 증대, 상호작용의 증대, 자유의 확대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 반대로도 해결은 되는데 가짜다. 문제해결 능력의 증대가 진짜다. 실용주의 문제해결은 목적지만 보고 길을 찾는 것과 같다. 두 명이 사는 무인도에서 소득을 두 배로 늘리는 방법은 한 명을 죽이는 것이다. 주체가 강해져야 진짜다. 문제해결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주체의 강화와 객체의 약화다. 왜 자유가 중요한가? 문제해결에는 객체의 약화라는 꼼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구를 줄이면 부자가 된다. 내가 발전해야 하는게 아니라 상대방을 주저앉히면 된다. 그러다가 망한다. 대립하던 상대방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 무인도에 해적이 쳐들어오기 때문이다. 문제해결에는 주체의 강화와 객체의 약화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고 주체가 강화되면 양의 피드백이고 객체가 약화되면 음의 피드백이며 겉보기로는 둘이 같으므로 인간이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는 주체의 강화다. 실용주의는 객체의 약화다. 방향이 다르다. 국회의원이 맨날 싸운다고? 내각제 하면 되잖아. 대통령제 하니까 싸우지. 내각제로 갈라먹기 하면 누가 싸워? 일본 자민당 봐. 고이즈미 해먹고 아베 해먹고 스가 해먹고 사이좋게 잘 해처먹잖아. 뭐가 문제야? 내각제는 국회의원 300명이 죄다 왕이다. 좋잖아. 그럼 국민은? 찬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