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죽지 않았다 '신은 죽지 않았다'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전혀 가치가 없는 썩은 영화지만 저예산 영화가 의외로 흥행해서 속편이 둘이나 나왔다고. 종교인이 논리에는 딸려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면 정신승리로는 이긴다는 내용이다. 종교인의 심리를 알 수 있는 영화다. 신은 죽었다 해도 신이 죽었을 뿐 종교인의 신은 죽지 않았다. 사실이다. 종교인의 신은 불사다. 그들의 신은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인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애초에 대화가 불가능하다. 언어를 비틀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귀찮게 자꾸 찾아오는 여호와의 증인과 몇 차례 대화해 본 적이 있다.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었다. 보험가입 권유전화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데이터를 믿는다. 고객의 나이가 50대면 천 번 통화에 몇 퍼센트 성공이라는 데이터를 손에 쥐고 있다. 데이터에 대한 확신이 있다. 믿음이 있다. 신앙이 있다. 나와 통화한다는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대화를 하고 있는데 그들은 낚시를 하고 있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다. 그런 전화는 빨리 끊어주는게 예의다. 예전에는 모르고 끝까지 인내심 있게 들어줬는데 그건 텔레마케터가 다른 고객과 통화할 기회를 빼앗는 거였다. 한 번은 보험에 가입하지도 않을 거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전화를 끊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푸념을 하는 것이었다. 뒤통수를 맞았다. 종교인은 전도활동으로 하느님께 점수 따면 그만이다. 그들은 전도에 실패했지만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어쨌든 강적을 만나서 최선을 다했고 하느님이 그 장면을 다 지켜보고 있을 테고. 그들은 희희낙락이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똥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가는 것은 그냥 본능이다. 종교가 마려워서 교회를 찾는 것은 본능이다. 무신론자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이성보다는 본능이다. 게임에 이기려고 할 뿐이다. 그래서 슬프다. 터놓고 대화할 만한 사람이 지구에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말한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 신앙을 조금이라도 흔들 수 있을 것 같으냐?' 맞다. 어떤 맞는 말로도 그들의 신앙을 조금도 흔들 수 없다. 무서운 일이다. 그들은 철벽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다. 낚시꾼은 물고기와 대화하지 않는다. 오직 낚을 뿐.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게임에 이기는 것으로 규칙을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승부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며 그것은 신앙심을 겨루는 게임이다. 과학자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끝까지 어깃장을 놓으며 대항하면 자신이 이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치킨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핸들을 용접해 놓는 것이다. 나는 핸들을 용접했으니 니가 알아서 해. 이 전술이 먹힌다. 그들은 마음을 용접해 놓았다. 마음을 용접해 놓은 자와의 대화는 필요 없다. 다른 목적이 있다. 그들은 과학가의 맞는 말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인 흔들리지 않음에 관심이 있다. 내가 맞는 말로 조목조목 논파하자 그들은 신이 났다. 상대의 완벽하게 맞는 말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인 자신을 관찰하고 신앙을 다지면서 행복한 것이었다. 마음을 용접해놓고 대화하지 않기를 참 잘했다고 의기양양해 하는 것이었다. 다만 낚시할 뿐. 대화는 절대로 없지. 그들은 영리하게도 과학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이면 패거리 권력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함께 온 추종자들은 나의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용접한 자의 변하지 않는 얼굴빛에 감탄하고 있었다. 이런 자들과는 대화하지 않는게 대접하는 것이다. 오직 권력을 탐할 뿐.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나의 권력을 꺾을 수는 없다네. 그러므로 지구 평면설과 같이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여야 패거리 권력은 더욱 단단해진다네. 왜냐하면 터무니없는 개소리로 천재 과학자들의 치열한 공격을 방어하려면 대단한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지. 나의 내공은 스무 갑자가 된다네. 종교인이 스스로 종교의 가르침이 참이라고 증명해야 한다. 종교가 거짓이라는 사실을 과학이 증명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참이라는 증거가 없으면 자동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애초부터 거짓으로 확정되어 있으며 종교의 교리가 참이라는 사실은 종교인들이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증명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믿음이 아니다. 논리와 믿음은 반대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용접해 놓았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야 권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시시콜콜 따지는건 불신자의 행동이다. 종교인이 무언가를 증명하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성경의 어느 페이지에도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써놓지 않았다. 왜냐하면 창조는 원래 없기 때문이다. 구조나 제조는 있어도 창조는 없다. 없는 것이 생길 수 없다. 창조는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없는 것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 구조론이다. 부분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전체로는 그렇다. 우주 전체로 보면 창조는 원리적으로 없다. 35억 년 전에 지구에 처음 생명이 출현한 후로 생명의 불은 단 한 번도 꺼지지 않았다. 있는 것이 모습을 바꿨을 뿐이다. 가을에 낙엽이 진다고 나무가 죽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후 죽은 적이 없다. 어떤 사람이 죽었지만 나뭇잎이 죽는 것과 같다. 나뭇잎은 죽어도 나무는 죽지 않으며 어떤 사람은 죽어도 사피엔스는 죽지 않고 계속 연결하여 간다. 옷을 갈아입었을 뿐 생명이 죽은 적이 없다. 진화는 그저 옷을 갈아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종이 창조될 일이 없다. 거죽이 달라졌을 뿐 생명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연결이 끊긴 적이 없다. 종교의 허점은 백만 가지나 있지만 과학자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성경은 누가 언제 썼을까? 질문하지 않는다, 애초에 창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구태여 추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근본이 거짓이므로 말단을 캐물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원래 증명은 말단이 쉽고 근본이 어렵다. 종교는 이 점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는 것이다. 종교인이 비겁한 이유는 그런 이득에 대해서 침묵하기 때문이다. 비겁한 자들과 대화할 수 없다. 자기네가 이득을 보는 유리한 지형에서만 싸우려고 하는 불공평한 게임을 즐기는 자들이다. 증명은 말단이 쉬운데 근본이 틀렸기 때문에 애초에 추궁되지 않는다. 종교인들이 지적한 진화론의 교과서 기술내용이 틀렸다는 것은 말단이다. 말단을 증명하기는 쉬우므로 종교가 진화론을 트집 잡아 공격하기는 쉬운 것이다. 종교인은 진화의 근본을 무시하고 쉬운 말단부의 표현을 공격한다. 몇몇 단어가 틀렸다는 식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과서를 진실에 맞게 엄격하게 쓰기는 어렵다. 자세한 설명이 따라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교과서가 너무 두꺼워진다. 반면 종교의 취약한 말단부를 공격하는 과학자는 없다. 그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엄청나게 유리한 토론지형을 가진다. 근본이 틀렸으므로 추궁되지 않는다. 원래 새빨간 거짓말은 추궁되지 않는다. 문재인의 99퍼센트 진실에 묻은 1퍼세트 거짓은 추궁되지만 이명박근혜의 99퍼센트 거짓은 추궁하기 어렵다. 근본이 거짓인데 근본은 희미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정확한 기록을 남긴 것도 아니다. 실존 인물인지도 불확실한데 말이다. 그 희미함 속에 숨는 것이다. 비겁하게도 말이다. 무신론도 같은 방법으로 진지한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창조가 없으면 빅뱅도 없다. 빅뱅도 일종의 플로지스톤이다. 잠정적으로 도입한 개념이자 원리다. 정확한 내막은 모른다. 생명은 진화한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생명이 있는것이다. 무신론은 종교가 거짓이므로 자기네가 참이라는 편리한 논리를 들이댄다. 종교가 거짓인 것과 무신론이 참인지는 상관이 없다. 종교는 본능이므로 당연히 거짓이고 무신론은 애초에 거짓을 공격했을 뿐 별도로 참을 제시하지 않았다. 근본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타진요는 논리가 궁하면 '네가 이겼다'고 선언한다.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승부의 문제이며 이 게임에서 이기는 방법은 에너지를 적게 투자하는 것이며 의혹의 제기는 1의 에너지로 가능하나 사실의 증명은 100의 에너지로 가능하다. 타진요가 1의 에너지를 투입할 때 타블로는 100의 에너지를 투입했다. 그러므로 타블로가 손해보는 장사를 했다. 타진요가 승리한 것이다. 네가 이겼다는 말은 사실 나는 적은 에너지로 너를 골려 먹었는데 너는 엄청난 에너지를 투자해서 겨우 방어했으니 에너지 소비 게임에서 내가 이겼고 네가 졌다고 타블로를 약 올리는 말이다. 진실의 게임은 타진요가 졌지만 상관없다. 애초에 진실에 관심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학력을 위조해 한국 들어오는 가짜는 많다. 동양대 최성해가 대표적이다. 미국에서 침례신학대학인지 얄궂은 학교를 졸업했다며 대학총장을 해먹고 있는데 타진요는 잠재적인 위조범들을 저격하려고 했다고 둘러대면 꽤 말이 되는 거다. 타진요는 그들에 대한 가슴 속의 증오를 배설하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증오를 배설했으니 성공이다. 화장실에는 갔다왔다. 배설은 본능이고 본능대로 한 것이다. 타블로가 진실이라 해도 타진요의 증오를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으므로 타블로가 졌다. 이런 것이 대화가 안 되는 장면이다. 이런 자와는 대화하지 않는다. 마음을 용접해 놓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썩은 자들이다. 따지자면 다들 이런 식으로 권력게임을 즐긴다. 종교인이든 무신론자든 죄다 자기 방식의 권력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룰로는 자기네가 이긴다. 종교인은 과학자가 맞는 말을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는 기술을 구사한다. 사탄의 시험을 극복했으니 하느님께 점수를 땄다. 좋을시고. 진지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무신론 역시 그러한 권력의 한 가지 형태에 불과하다. 신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다. 생명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부터 지금까지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한 연결이 근본이다. 신이 있든 없든 신이 알아서 고민할 일이다. 다만 연결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므로 그에 따라서 나의 행동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