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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9085 vote 0 2010.08.05 (00:15:47)


 

 

진선미에 대해서

 

(다른 게시판의 질문에 대한 리플을 정리한 것입니다.)

 

 

http://media.daum.net/economic/estate/view.html?cateid=100019&newsid=20100803085116931&p=akn

 

  먼저 위 링크를 참고해 주기 바란다. 이 기사에 달린 리플들 중 다수는 기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좌측과 우측을 판단하는 기준을 차도 기준으로 해석해서 일어난 혼선이다.

 

  추천수 1위인 리플을 보면

 

  ◎ 완전 쇼를 하는 구먼.. [23] *****님  

  우리나라는 차가 우측통행을 하기 때문에 차를 마주볼수 있게끔 좌측통행을 해야 오히려 사고를 줄일수 있다. 어떤 미친놈이 우측통행안을 내놨는지. 그놈 뇌구조를 한번 분석해 보고 싶다. 그리고, 이걸 기사라고 써댄 아시아경제 황준호기자 이놈도 참 개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우측보행에 관한 기사가 가끔 나오는데, 기사가 뜰때마다 이런 식의 혼선이 반복하여 일어나고, 아직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해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여간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인들은 당연한듯이 차도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며 자신의 판단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려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 리플을 쓴 분이나 거기에 찬성을 한 많은 독자들 중에 기사가 옳고, 자신의 해석이 틀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이 없는듯 하다. 왜 자신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차도기준으로 판단할까?(도로는 논외, 내 몸의 오른쪽이냐 왼쪽이냐다.)

 

  왜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모를까? 오랜 봉건왕조에 길들여지고, 식민지에 주눅들고, 독재에 순치되어 인간 본래의 건강한 정신을 잃고 노예가 되고 만 것일까? 당연히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는것 아닐까?

 

  이런건 누가 지적해줘야 아는 거다. 나는 지적하고 싶다. 왜 당연하다는듯이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기준으로 삼지? 노예는 항상 주인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서 그렇다치고 당신은? 아직도 노예인가? 깨어나라!

 

  ###

 

  ◎ 보통 사회에서 말하는 진선미와 구조론에서 말하는 성≫주≫미≫선≫진이 다른 이유는?

 

  성속(聖俗 - 낳아내기) - 창조인가 모방인가?

  주종(主從 - 하나되기) - 주도하는가 종속되는가?

  미추(美醜 - 짝짓기)   - 서로 보완하는가 충돌하는가?

  선악(善惡 - 맞물리기) -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진위(眞僞 - 만나기)   - 보이는가 감춰지는가?

 

  흔히 말하는 진선미는 고대나 중세에 논의되던 것을 칸트가 정리한 거라고 하는데 그건 칸트가 이성(진) 다음에 의지(선) 다음에 감성(미)를 놓았기 때문에 그런거고 그걸 truth, good, beauty라고 쓰는 모양인데 이걸 한국에서 진선미라고 쓰게 된 것은 아마 독일어를 번역한 개화시대 어떤 일본인이 그렇게 쓰니까 따라서 쓴 것일테고 하여간 칸트의 맥락과 구조론의 맥락은 다른 거다.

 

  구조론으로 보면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이다. 여기서 용어는 다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본질은 같다. 칸트가 truth라고 한 것이 내가 정신이라고 한 것이고, 내가 의지라고 한 것이 칸트가 good이라고 한 것이고 칸트가 beauty라고 한 것을 나는 감정이라고 쓴 것이며 칸트는 셋으로 나누고 나는 다섯으로 나누었다.

 

  문제는 언어라는 것이 포지션에 따라서 의미가 다르다는 거다. 즉 넓은 의미로 쓰일 수 있고 좁은 의미로 쓰일 수도 있는 거다. ‘정신>의식>의지>의사>감정’은 뇌의 작동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미(美)에 있어서는 성≫주≫미≫선≫진이다.

 

  진선미라면 미를 꼴찌로 돌렸는데 보통 감성(beauty)을 얕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건 아마 서양 마초아저씨들이 여성들이 더 관심을 두는 beauty를 경멸하여 뒤로 돌린 거다. 중세의 남자들은 직업이 전사라서 전쟁을 하려고 하고 전쟁을 하려면 세력을 모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과 14범은 곤란하므로 truth가 필요한 거다.

 

  인간의 깨달음이나 직관력, 통찰력은 대부분 미에 대한 판단으로 작동한다. 깨달음이 이성에 앞선다. 미에 관한 통찰력이 이성적 판단에 앞서는 거다. 그러므로 미학이야말로 철학의 출발점이라 하겠다.

 

  문제는 미라는 개념이 광범위하다는 거다. 어떤 수학자는 수(數)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 질서 - beauty 상태

  ◎ 무질서 - beauty가 아닌 상태

 

  이는 미의 개념을 확장한 것이다. 여자들이 beauty를 좋아하는 것은 질서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남자들이 beauty를 truth 뒤로 돌려놓는 것은 자기들이 당장 전쟁해서 무질서를 만들 작정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성단체들이 미인대회를 비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주의 잔재로 미의 추구를 죄악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미가 앞에 온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가 있는 거다. 편견이다.

 

  어쨌든 신라시대에 화랑은 다 미인이었고 그 당시엔 미인=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성인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구조론의 성≫주≫미≫선≫진과 같이 성을 앞세우는 태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비슷한데 비너스의 어원은 ‘받는다’는 뜻이다. 받는 것은 복이므로 비너스 신에게 빌면 복을 받는다고 믿어 많이 숭배되었는데, 비너스가 아름다운 이유는 복을 받아서 그렇다고 여긴 것이다. 이는 옛사람의 순수한 생각이다.

 

  그런데 당시는 그리스나 신라나 모계사회의 전통이 남아있었다. 서구의 성모신앙이나 기사도 같은 것에도 모계사회의 전통신앙이 반영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마초남자들이 끼어들어 전쟁논리로 설명하려 들면서 왜곡된 것이다. 미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진정한 미는 예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예술의 작품성을 논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 좋고 귀로 듣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영혼을 긴장시킬 수 있느냐로 논하는 거다. 그게 성(聖)이다.

 

  성(聖)은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정도, 곧 낯선 이방의 상대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낸다. 성(聖)이 높은 예수님은 창녀와도 공존할 수 있으니까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것이고, 성(聖)이 낮은 사람은 창녀와 공존할 수 없으니 돌로 치려 하는 것이다.

 

  백인이 ‘나는 흑인과 공존못해’ 하거나 수구꼴통이 ‘나는 좌파와 공존못해’ 하거나 혹은 동성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 악플을 달아서 ‘꺼져라’고 쓰거나 (오늘도 야후 홍석천 기사에는 악플이 수두룩.) 이런 자들은 성(聖)이 낮은 것이다. 타자와의 공존능력이 떨어지는 것이며, 인간이 예술을 추구함은 그 공존능력, 소통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배워야 하는 것이며 ‘나는 공존못해. 더러워!’하고 소리치는 자들은 못배워먹은 것이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관습이 다른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현대인의 필수적인 교양이며 지성 그 자체인 것이며 만약 그것이 없다면 성인은 물론이거니와 지성인이 못되는 것이다.

 

  남녀의 결합도 자기와 다른 것과의 공존이며, 사랑이 그러한 것이며, 남녀가 결합하여 아기를 맹글 뿐 아니라 모든 창조는 자기와 다른 이질적인 것과 공존할 때 일어난다. 비슷한 것은 모아놔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신통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음악가는 어떤 음과 다른 음을 공존시켜 화음을 끌어내고, 화가는 어떤 색과 다른 색을 공존시켜 작품을 창조하고, 소설가는 자기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조직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며, 이문열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견디지 못하고 쌍욕을 해대므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혀 작가로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성≫주≫미≫선≫진의 첫 번째 성(聖)이다. 그 다음에 오는 주(主)는 자기 안에서 내부를 통제할 수 있느냐다. 자기와 다른것과의 관계, 곧 외부와의 소통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속하는 것 안에서 자기식구들을 잘 데불고 있느냐다.

 

  주가 약한 사람은 가족과 마찰을 일으킨다. 가정이라면 부부간에 싸움이요 회사라면 노조와 마찰하며, 정치인이라면 야당을 탄압하며, 내부에서 말썽을 일으킨다. 소설이라면 에피소드가 자기가 정한 주제를 벗어나 삼천포로 유람가지 않았느냐로 작품성을 논하고, 음악이라면 엉뚱한 음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깨지 않았느냐를 따지는 거다. 이발소 그림을 낮게 치는 이유는 그림 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불편하게 공존하고, 아침과 대낮과 저녁이 어색하게 공존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한 편의 그림이 아니라 여러 편의 모듬그림이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생선회도 모듬회를 안 먹는다. 물론 모듬회도 나름의 맛이 있지만, 특히 음식평론가들 중에 그런 이유로 모르고 비빔밥을 폄하하는 일이 있는데 일본의 망언전문 구로다 아저씨가 대표적이다. 무조건 재료들이 섞여 있으면 안된다고 말해야 좀 아는 사람 대접을 받는 그런 풍조가 있는 거다.

 

  뭐든 모듬이면 격이 떨어진다고 믿는 풍조가 있다. 하여간 자기 주장을 앞세워서 선명하고 심플하게 가지 않고 남의 것을 이것저것 끌어모으는 과정에서 추해지기 때문이다.

 

 세번째 오는 미(美)는, 사실은 성>주>미>선>진이 다 미(美)에 속하지만 보통 인간들이 미를 얕잡아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세간에서 보통 말하는 미는, 성이 외부와의 소통인데 비해 미는 내부에서 어울리느냐 즉 내부소통이다. 자기식구들 간에 대화가 되느냐다.

 

(성-외부소통, 주-내부통합, 미-내부대화)

 

  내부를 구성하는 요소들 간에 밸런스가 맞느냐. 앙상블을 이루느냐다. 판소리라면 소리꾼과 북치는 고수 사이에 호흡치 척척 맞아떨어지느냐다. 소설이라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호흡이 맞느냐다. 주인공이 훌륭하면 악역도 뭔가 포스가 있어야 한다. 그냥 악역은 다 주인공 총 한 방에 열명씩 우르르 쓰러지는 멍청이들이고, 주인공은 열방 맞아도 안 죽는 무적이면 이야기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거다. 고도의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인공과 악역이 평행선을 그리고 가야 한다.

 

  그 다음에 오는 선(善)은 서양인들이 good이라고 하는 건데 영어 good와 한국인들의 선(善)은 뉘앙스가 다르다. 우리가 말하는 선은 사회의 윤리, 도덕을 말하는 거다. good의 어원은 ‘가득’인데 충만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충성이라든가, 열정이라든가, 뜨거운 사랑이라든가 뭔가 펄펄 끓어넘치는, 목숨걸겠다는, 하여간 세고 대단한 것을 good이라고 한다. 반면 한국인의 선(善)은 뭔가 신중하고, 조신하고, 겸허하며, 조용하고, 참하고 그런 거다.

 

  서양의 선은 펄펄 끓어넘치고 한국의 선은 은인자중하니 느낌이 다르다. 그런데 중국인이 쓰는 한자어 선(善)은 원래 지고지선의 의미가 있어서 지극한 것이니 오히려 서구의 good과 통한다. 우리 조상들도 선(善)을 가득이라는 의미로 많이 썼다. 요즘 와서 이상해졌을 뿐. 최선이라거나 차선이라거나 하는 거 말이다.

 

  결론적으로 서양의 진선미 개념과 한국인의 진선미 개념은 번역이 잘못된건지 모르지만 상당히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구조론의 선은 영어의 good과 비슷한 건데, 상대적인 비교가 가능한 것 중에서 상대적인 비교우위다.

 

  OX 판단이 있고, 점수로 90점이나 80점 하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진위판단은 OX라 아닌 것을 배척한다. 아예 점수를 안 준다. 예컨대 충성이면 더 뜨거운 충성이 있고, 열정이면 더 지독한 열정이 있고, 사랑이면 더 맹렬한 사랑이 있듯이 항상 더한 것이 있는게 good이다.

 

  그런데 여자축구 월드컵을 하는데 남자선수가 그라운드에 뛰려고 하면 비교하는게 아니고 쫒아내는 거다. 남자니까 감점 10점 패널티가 아니고 추방이다. 자동차 경주를 하는데 자전거를 타고 출전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면, 비교해서 3등이나 4등을 주는게 아니라 그라운드 밖으로 쫓아낸다. 그게 진이다.

 

 

  ###

 

  어떤 것을 논쟁하고 경쟁하면 점점 좁아지고 비루해지는 경향이 있다. 진실에서 벗어나 속임수를 쓰는 사람이 이긴다. 원래의 미는 건강한 미였는데 그것은 순수하게 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이 들어가면서 점점 왜곡되어서, 허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어야 하고, 엉덩이는 어째야 하고 등등 점차 왜곡이 되기 시작했다.

 

  이는 미를 주체적인 시각이 아니라 어떤 수단, 용도, 기능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쟁하면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을 내세우는 쪽이 이긴다. 진정한 것은 대부분 입증할 수 없으므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만 가지고 평가한다는 거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말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빼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1초만에 증명이 되는 표피만 가지고 따지게 되며, 그것은 하잘것 없는 기능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점점 허리를 졸라매거나 발을 묶거나 목을 늘이게 된다.

 

  진정한 미란 인간의 통찰력을 키워주는데 의미가 있지만, 통찰력은 입증되지 않으니까 입증되는 부분만 논하자 이렇게 되어, 그냥 발 길이를 재보자, 허리둘레를 재보자, 목 길이를 재보자.. 자꾸만 왜곡이 되어가는 거다.

 

  진이 뒤로 가는 이유는 진위판단이 입증가능한 부분을 위주로 하기 때문이며, 옛날에 진선미 할때 진을 앞세운 이유는, 의미를 확대하여 진리 즉 입증되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말할 때도 두가지 태도가 있다.

 

  진(眞)이라는 말이 입증가능한 부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참되다거나 참사람이 되어라거나 참정치 하겠다 할 때의 참은 반대로 나중에 언젠가는 입증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또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참된 것은 당장 입증되는 측면도 있고, 오랜 세월이 흘러야 입증되는 측면도 있다.

 

  예를 들면 앞날을 미래라고 하거나 훗날이라고 하는데, 미래를 앞이라고 했다가 뒤라고 했다가 헛갈리는 거다. 어원을 따져보면 before와 after 둘 다 앞이라는 뜻이 있다. before는 바로 앞이라는 뜻이고 after는 앞+term이다. 그래서 post-를 번역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모더니즘이라고 하다가 탈모더니즘이라고 하다가 하며 혼선이 있는 거다. 후(後)라는 단어가 과거가 되기도 하고 미래가 되기도 하니까. 하여간 천년앞과 천년후가 같은 날이다. 진 개념도 이런 식의 혼선이 있다.

 

 

  시대마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다 해도 미 자체의 기준이 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의 기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미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미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이나 대상으로 보는 거다.

 

  앞에서 자기 몸을 기준으로 하느냐 도로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좌측보행과 우측보행을 헛갈리듯이 헛갈리는게 있다.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가 틀린 거다. 미라는 단어를 좁은 의미로 쓰는 거다.

 

  미를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타자를 위한 봉사 차원의 기능 개념으로 낮게 받아들이는 거다. 옛날에는 순수하게 미를 그대로 보았는데 미를 논쟁하기 시작하면서 게임의 법칙이 작용하여 점점 저급해진 것이며, 결국 진정한 미를 찾기 보다는 당장 타인을 이길 수 있는 미, 써먹을 수 있는 미를 찾게 되고, 이길 수 있는 것은 당장 표시가 나는 것이며 점점 미가 조잡해진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실용주의자 똥쓰레기들이 나타나서 미를 ‘써먹는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내한테 어떤 이득이 되느냐는 식이다. 옛날에는 미인을 주인으로 보았기 때문에 미를 판단하되 대화할만 하냐, 소통할만 하냐, 격이 맞느냐, 내게 영감을 주느냐, 가치판단의 기준점이 되느냐는 관점에서 본 것이며 세월이 흐를수록 아닌 쥐들이 물을 흐려서, 미를 종놈으로 보고, 저 종놈이 내게 어떤 시중을 들어주느냐는 관점으로 보게 되어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예컨대 작품을 보되, 저 작품을 사놓으면 가격이 오르느냐는 식이다. 가격 올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작가를 죽이면 된다. 작가가 죽으면 작품이 희소해지고 신문에 보도가 나가면서 시장에서 가격이 배로 뛴다. 그래서 이제는 ‘저 작품이 좋다’는 말이 ‘저 작품을 그린 작가는 곧 죽는다’는 뜻으로 변질되었다.(이건 과장) 말하자면 그런 식이다. 주체적으로 보느냐 대상으로 보느냐다. 미를 주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획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식으로 보면 영원히 노예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여간 미는 변한 적이 없고 상대적인 미란 없으며 인간의 언어가 변한 것이다. 아프리카에 어떤 일자무식 소년이 있었는데(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 주인 나리를 찾아와서 베토벤 몇악장 무슨 곡을 축음기로 틀어달라고 주문한다. 그 소년은 진정한 무식인이었지만 베토벤 음악이 자기 귀에 맞았던 거다. 문제는 베토벤을 알 리가 없는 그 소년이 주인 나리에게, 자신이 한번 우연히 들었던 그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서 손짓발짓하느라 한참동안 애를 먹었다는 거다.

 

  만약 한국이라면 어떨까? 50년 쯤 전에 어떤 부자가 축음기를 사서 이런 저런 음악을 틀어놓으면 한국소년이 지나다가 우연히 듣고 와서 베토벤을 틀어달라고 할까? 죽어도 그 말은 안 한다. 왜? 그 아프리카 소년은 순수하기 때문에 베토벤을 원하는 것이고, 한국소년은 좀 아니까 당장 써먹을 수 있는 것을 원하며, 친구들 앞에서 써먹을건 유행가니까 무조건 최신유행가를 틀어달라고 한다. 이건 한국인 수준이 낮아서 그런게 아니고, 느끼는게 없어서가 아니고, 명백히 의도와 목적이 개입한 불순한 것이다. 소비시장의 법칙이 작용한 거다. 이건 예술의 문제가 아니고 시장의 문제다.

 

  하여간 좋은 것일수록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써먹을 데가 없다. 허접한 것은 써먹을 데는 많은데 도움이 안 된다. 알아주는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봄에 나는 향긋한 죽순의 향을 음미하기 위해여 담양까지 운전해 갈 용의가 있지만, 그런 친구가 없다면 그냥 짜장면 시켜먹는게 맞다. 내가 지금은 짜장면의 푸짐함에 만족하고 있지만, 그 죽순의 진정한 맛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고, 같이 먹을 제대로 된 친구가 없어서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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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를 통째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진>선>미>주>성의 순으로 단계적으로 인식하느냐? 또 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도 못하는가?

 

 이런 문제들은 진실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인간의 문제는 자신이 인식한 것을 순수하게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다는 거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언어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문명화 되어 언어의존이 심해질수록 그 경향도 심해진다. 언어가 인류의 큰 병이다.

 

  아프리카 부족민들이 셈을 안 하는 이유는 숫자가 없기 때문이듯이, 배우지 못하면 아는 것도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상황을 통째로 인식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언어로 설명할 때는, 그것을 설명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포기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미다 하고 깨우쳐주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성(聖)이라고 써놨지만 적당한 단어는 없다. 성(聖)의 개념을 옳게 아는 사람이 지구 상에 몇이나 될까? 대부분 직관으로 느낄 뿐, 확실히 아는게 아니다. 예컨대 장발장 소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지만, 자신이 그 신부님의 상황이 되어 장발장을 만나면 절대 신부님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직관적으로는 진선미주성을 다 알지만, 실제 그 상황에서는 연습된, 익숙한, 해본 짓만 한다. 즉 인간은 성(聖)의 상황을 경험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 상황을 당해도 연습한 사람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은 머리로만 알아서는 부족하고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옆에서 부추기면 한다. 명박도 한때는 운동권이었다. 그래서 보통 영웅들은 떼로 출현한다. 무리들 중 한 명의 선지자가 시범을 보이면, 다들 따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에도 붐이 있다. 르네상스도 붐이고 그 핵심인물은 미켈란젤로다. 다빈치는 좀 아니다. 물론 이 양반도 상당히 아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현대인들도 90프로는 미(美)를 어떤 기술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자기가 안 그려 봤으니까. art의 어원도 ‘잇다’인데 실로 구슬을 꿰는 따위의 기술을 뜻한다. 매너리즘이라는 말도 손기술이라는 뜻이고, 재래의 아카데미파들이 인상주의를 반대한 것도 거기에 신통한 기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완고하게 예술=기술이라고 믿고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동양의 심미안이 오히려 앞서는 바가 있었다.

 

  문제는 현대인들도 예술이 기술이 아니라고 들어서 알기는 아는데, 실제로 미술관에 데려가서 작품을 보여주면 다들 기술을 살피고 있다. 심지어 평론가들도 그림을 보여주면 본질을 떠나서 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왜냐하면 평론에도 평론의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익숙한 평론기술을 구사하여 딴 이야기를 하는 거다. 한국의 평론가들 대부분은 그렇다. 진짜 평론가는 없다시피 하다. 심지어는 칼럼도 기술로 찍어내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항상 모두에 신문기사를 인용하고, 다음 자기집단의 강령을 열거하고, 막판에 호통을 한번 쳐주고 끝맺는 식의 판에 박힌 칼럼을 복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도를 아는 것은 노자가 도를 말했기 때문이고, 덕을 아는 것은 또한 노자가 덕을 말했기 때문이고, 인을 아는 것은 공자가 인을 말했기 때문이며, 철학을 아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말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개념화 시켜 주지 않으면 아는 것도 써먹지 못한다.  

 

  이제 내가 성(聖)을 말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성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생기겠지만, 지금까지는 성(聖)을 말해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미에 있어서 성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물론 이심전심으로 아는 사람은 많이 있었다.

 

   미에 대한 느낌 자체는 달라지지 않지만 그것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옛날 시골농부들도 저녁에 멋진 저녁놀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지만 그걸 절대 입밖에 내지 않는다. 도시의 시인이 찾아와서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고 감격해 하면 ‘저 자슥 미쳤구나’하고 흉본다. 농부가 느끼지 못하는게 아니라 느껴도 표현하지 않는다. 왜? 써먹지 못하니까. 물론 시인은 시에 써먹는다. 시집이 대박나서 부자된다. 그리고는 농부를 흉본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지도 못하는 농부의 삭막한 가슴이라니 하고 통탄하면서. 착각이다. 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이나 부시맨을 감옥에 가둬두면 석달 안에 죽는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추한 감옥을 견디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끼지만 그 느낌을 표현하고 그 느낌으로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왜?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실연당한 사람도 꽃을 보면 예쁘게 느끼지만 고개를 돌린다. 꽃을 피한다. 연애하는 사람이 꽃을 보면 다가가서 향기를 맡는다. 느끼는건 같지만 연애하는 사람과 실연한 사람의 행동은 다르다. 미의 기준은 시대를 떠나 절대적이지만 그 미에 다한 사람의 태도와 행동은 다른 거다. 미의 기준이 상대적으로 변한게 아니라 미를 수요로 하는 시장이 다른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진선미주성을 다 느끼지만 초등학생을 만나면 진에 대하여 대화하고, 중학생을 만나면 선에 대해서 대화하며, 고등학생은 미, 대학생은 주, 좀 아는 사람을 만나고서야 성에 대해서 대화를 한다. 이문열류를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않고 피한다. 백안시다. 왜? 안 통하니까.

 

  즉 인간이 성(聖)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첫째 그것을 표현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 스스로 명확하게 개념화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셋째 그것을 함께 나눌만큼 수준이 맞는 대화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것을 당장 써먹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언어를 만들어줘야 하고, 개념화시켜 줘야 하며, 용도를 발명해야 하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철학자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노자와 공자가 그 일을 했다. 죽림칠현이 했고, 소동파가 했고, 율곡이 했고, 화담이 했고, 추사가 했다. 사교를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었고 그 사교의 수단은 언제나 미다. 미는 사람의 가치, 사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척도로 기능한다. 철학자의 미는 동양에서 크게 발달했다. 동양인의 사교는 서원아집도에서 묘사되는 지성인의 사교인데 비해 서양인의 사교는 귀족들의 댄스파티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의 미학에는 콘텐츠가 없다. 미학은 있는데 그 안에 텅 비어있다.

 

  우리가 사는 한옥도 모양이 원래 그랬던게 아니고, 고려때만 해도 직선을 많이 써서 바로크식으로 장중하게 지었는데, 조선시대 유림들이 유교미학을 퍼뜨려서 ‘집은 똑 이렇게 지으렸다’ 해서 그렇게 된 거다. 집에 색칠을 하지 않고 흰색 회만 쓰는게 유림들이 심플한 것을 강조해서 그렇게 된 거고 고려 때는 사찰처럼 화려했고 신라때는 아주 집에 기둥마다 금칠을 해서 집이 번쩍번쩍 했다. 한국인이 백의민족이 된 것도 그렇다. 고려때는 원래 흑의민족이었는데(신라때는 백성들이 개가죽옷을 즐겨 입었음) 조선후기에 유림들이 유행시켜서 백의로 변한 거다. 조선 중기만 해도 흰옷은 적었다. 이는 박물관만 가봐도 알 수 있다. 요즘 간간이 발견되는 회곽미이라도 그렇고.

 

  미라는 것은 양식이 있어서 절대적으로 누군가가 시범을 보여주고 세팅을 시켜주지 않으면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혼자 미를 찾아봤자 장단 맞춰주는 이 없으면 재미 없으니까. 그러므로 느끼기는 똑같이 느끼는데 어렷품히 느낄 뿐 언어로 표현하고 행동하지 못한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가 처음 나왔을 때 보통 아무 생각없는 꼬맹이들은 다 알았지만 TV프로에 나온 유명 음악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혹평을 했는데, 임백천이 홀로 알아주었다. 임백천을 제외하고 나머지 전문가들은 초등학생보다 안목이 낮았던 거다. 전문가일수록 더하다.

 

  ‘평가할 수 있는 것만을 평가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평가하기 곤란한게 나오면 배제하는 거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그런 것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보는 초등학생도 심판석에 앉혀서 완장 채워놓고 ‘니가 함 평가해봐라’ 하면 유인촌병이 발생하여 평가능력이 퇴행해서 제대로된 평가를 못한다. 본능은 평가하는데 이성은 못한다. 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뭘 보고 평가했는지 자신이 모른다. 그러므로 개념화 시켜줄 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며, 한국의 낙후된 미의식은 제대로 된 평론가의 부재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누구나 진선미주성을 통짜덩어리로 느끼지만, 그것을 사회적으로 사용함에 있어서는 자신이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사용하며, 초등학생은 진에 집착하고(진에만 능숙하니까), 중학생은 선에, 고등학생은 미에, 대학생은 주에 집착하며, 성은 이심전심 아는 사람이나 아는 거다.

 

  미에 대한 기준은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하지만, 사회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변한다. 이때 유통과 소비가 변하는 거지 본질이 변하는건 아니다. 상대적인 미가 있는게 아니라 소비시장의 트렌드가 있고, 유행이 있고, 패션이 있는 거다. 그것은 시장의 문제이지 미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독일에 가면 집을 지어도 다들 다르게 독창적으로 짓는다. 근데 한국인들은 아파트처럼 획일화된 집을 짓는다. 한국인이라고 독일처럼 짓고 싶지 않아서 그런게 아니고, 첫째 돈이 없어서, 둘째 디자이너가 없어서, 셋째 평론가들이 그 점을 떠들어주지 않아서, 넷째 남들이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런 것이며 결정적으로 한국의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 때문이기도 하다. 날씨 때문에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편한게 사실이다. 한국인은 집에 풀장이나 잔디밭이 있어도 일광욕을 안 한다. 살이 타면 보기 흉하니까.

 

  한국인들도 독일식으로 다양하게 지으면 좋다는거 머리로는 다 알고 있다. 어쨌든 독일인이 한국에 와서 눈으로 보고 다닥다닥 달라붙은 답답한 성냥갑 아파트 보면 한국인들은 파시스트에 전체주의라서, 미에 대한 감각이라곤 없어서, 독재자에 세뇌되어서 바보같이 획일화된 집을 좋아하는군 하고 착각한다.

 

  어쨌든 일본인들은 경차를 많이 소비하는데 작은차를 좋아해서 그런게 아니고 도로와 주차장이 비좁아서 그렇다고 한다. ‘일본인은 원래 작은차를 좋아해! 왜냐하면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니까 그렇지’ 하고 이어령이 떠들면 그게 다 맞는 말은 아니다.

 

  미는 양식이며 양식은 어느 기준에 맞추는 건데 주변에 띨빵한 양반이 있어서 맞춰주다 보면 전체적으로 띨빵해진다. 만약 그 나라에 띨빵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 기준에 맞추다가 국민 전체가 띨빵해진다. 양식을 잘못 세팅해서 그렇지 미의식 자체가 소멸한 것은 아니다. 느끼는건 같지만 그것을 표현하는건 다르다.

 

  한국의 자동차 업체가 후진 차를 만드는 것도 소비자의 요구에 뒤처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동차 생산자들은 한국인들은 대가족에 껍데기만 크고 엔진은 후진 엉터리 차를 좋아한다고 여기는 편견이 있다. 한국인을 아주 우습게 보는 거다. 그래서 좋은 차를 만들 기술이 있어도 안 만들고, 그걸 만들어도 비싸다는 이유로 국내시장에 내지 않으며, 그래서 세계시장에도 뒤처진다. '한국인들은 미의식이 없기 때문에 디자인 구려도 팔려' 하는 식이다. 그러니 영영 이류에 머무르는 거다. 몽구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몽구가 띨빵하니 현대가 전체적으로 띨빵해진 거다. 현대가 띨빵하니 한국이 덩달아서 전체적으로 격이 떨어진다. 가격은 불문하고 최고엔진에 도전하여 최고성능부터 끌어내놓고 생각해야 대화가 통하는 거다.

 

  결론적으로 상대적인 미라는 것은 미를 주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대상화 시켜 보는 것이며 그 자체로 이미 상품화 된 것이며 이는 미에 대한 모독이다. 미는 그 자체적으로 완성됨으로써 가치있는 것이지 누구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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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22]id: ░담░담

2010.08.05 (13:59:09)

시원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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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5 (15:06:00)

맛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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