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 안에 존재론과 인식론이 별도로 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원래 수학 안에 대수학과 기하학이 있듯이 같은 표현이 중복되는 경우는 흔하다. 구조론은 간단히 세상을 알갱이 입자가 아니라 구조 곧 관계로 보는 관점이다. 주파수가 대표적이다. 파동의 간격이 색깔을 결정한다.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이 관측대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알갱이나 혹은 고유한 무엇이 아니라 대칭된 둘 사이의 간격이다. 두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에 따라 부부가 되기도 하고 형제가 되기도 한다. 침실에서 만나면 부부요 거실에서 만나면 형제다. 그 간격은 상대적이며 고유하지 않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움직여도 결과는 같다. 부부 중에 어느 쪽이 외도를 하든 결과는 이혼이다. 그래서? 다양성이 있다. 구조론은 모든 것을 구조 하나로 설명하는 일원론이지만 오히려 그 안에 다양함을 감추고 있다. 둘이 만나는 간격을 조정하여 얼마든지 다양한 칼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구조론 안에 존재론과 인식론이 있다. 인식론은 인간이 어떤 대상을 관측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측되는 세계가 알갱이 입자로 되어 있으며 고유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는 인간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사과, 배, 감, 복숭아, 포도, 잣, 대추들이라면 각각 고유한 형태와 속성을 갖추었다. 금, 은, 구리, 납, 철, 주석, 아연이라도 마찬가지다. 굳기의 차이로 판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판별할 수 있는 입자는 많지 않다. 몇 종의 과일과 몇 가지 물질뿐이다. 소립자 단위 미시세계로 가면 이런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컴퓨터로 봐도 0과 1밖에 없어서 얻어낼만한 알맹이가 없다. 인간사회의 다양한 부분은 고유한 입자가 아니라 상대적 간격으로 존재한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예술이든 간격이 칼라를 결정한다. 고유함도 없고 입자도 없다. 인식론적 접근으로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별로 없다. 남녀구분이라도 입자와 고유성으로 보면 고작 성기형태 차이뿐이다. 인위적으로 표지를 달아 고유성을 강조하지만 가짜다.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차이가 없다. 고유성을 발견할 수 없다. 태극기니 일장기니 하며 깃발을 내걸어 차이를 말하지만 가짜다. 해부학적인 증거가 없다. 오장육부 외에 뭐가 없다. 그러나 상대적인 관계 곧 간격으로 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신분, 지위, 계급 등은 모두 상대적인 관계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엘리트와 비엘리트, 서울대와 지방대, 승자와 패자는 관계다. 그것은 사건 안에서 구분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대한 갈림길이다. 원래 고유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우연히 만나 상대적인 관계로 파악되는 사건을 일으켰는가? 아니면 원래 커다란 하나의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이 특정한 조건에서 교착되어 우리가 아는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가다. 구조론의 답은 원래부터 사건이 있었다는 거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돌아다니다가 여러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원래 사건이 있고 사건이 진행되며 존재로도 된다. 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류가 있고 그 인류가 번성하여 너와 내가 된 것이다. 가지와 가지가 붙어 나무가 된 것이 아니고 나무가 자라서 가지가 나누어진 것이다. 여기서 딜레마다. 인간은 나누어진 가지다. 나누어지기 전의 본체를 볼 수 없다. 진면목을 볼 수 없다. 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무의식의 형태로 집단의 조종을 받지만 자신이 집단의 일원이며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신이 가족과 부족과 국가의 일원임을 모른다. 국명을 내걸지 않아도 국가단위 의사결정은 존재한다. 타자성이 있는 거다. 국가는 없어도 단위는 있다. 집단이 있다.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세상은 고유성을 가진 입자 알갱이의 집합이 아니라 대칭구조 안에서 상대적인 관계와 간격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대칭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의 인식에 제한이 걸린 것이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우물 밖을 모른다. 사건의 전모를 볼 수 없다. 내가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소속한 집단을 모른다. 누가 자기를 조종하는지 모른다. 그것을 알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존재론과 인식론을 구분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인식의 메커니즘과 존재의 메커니즘이 별도로 있는 거다. 인식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인식은 인식 대로 가고 존재는 존재 대로 가야 한다. 인식은 나와 타자의 경계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존재로 보면 그 경계는 희미하다. 산모에게서 엄마와 아기의 정확한 경계를 정할 수 없다. 이익이 일치하면 가족은 내 일부이고 이익이 불일치하면 남이다. 나와 타자의 경계는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다. 인식에서 단서를 얻은 다음 존재로 재구성해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자동차를 분해해서 부품을 익힌 다음 재조립해봐야 한다. 세상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진행하지만 우리는 부분에서 전체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머리 속에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간 다음 다시 전체에서 부분으로 놓아봐야 한다. 바둑을 두어도 그렇다. 흑백의 대결은 부분에서 일어난다. 전체를 봐야 하지만 전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전체는 아직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석대로 두면 전체가 연출된다. 머리 속에서 전체로 갔다가 다시 부분으로 와야 한다. 나무는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는데 바둑은 가지에서 줄기가 나온다. 줄기는 없지만 있다치고 머리 속에 그려야 한다. 세상은 언제라도 전체에서 부분으로 간다. 벤처기업에 투자하더라도 투자가는 전체를 보고 투자하지 부분을 보고 투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전체를 보여줄 수 없다. 전체는 계획이다. 전체는 CEO의 서랍 속에 있는 것이다. 인식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 손정의가 내 마음 속에 이런 대담한 계획이 있노라 해봤자 믿어줄 사람 없다. 그러므로 인식론으로 가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존재론으로 틀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상한 아이디어로 유인하여 투자를 유치한다. 일단 투자를 받은 다음에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이상한 아이디어는 보여줄 수 있지만 진짜배기는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세돌 9단의 머리속에 있는 것이며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은 잘못된 것이지만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구조론은 철저히 존재론이다. 존재 그 자체가 스스로 대칭하고 관계하고 간격을 조정하는 방식이다. 인간과 관계없다. 인간을 떠나 독립적으로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보여줄 수 없다. 설명할 수 없다. 보여주려면 왜곡시켜야 한다. 인류는 원래 한 가족이다. 무의식이므로 보여줄 수 없다. 적이다 하고 외쳐야 알아듣는 것이다. 적을 때려죽여라고 선언하면 개라도 알아듣는다. 적을 제압하려면 우리편이 필요하고 우리편을 만들려면 한 가족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는 한가족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복잡하게 돌아오지 않고 그냥 원래 한 가족이라고 하면 먹히지 않는다. 찢어죽일 놈의 사탄이 없으면 하느님도 없다. 나쁜 것이 없으면 좋은 것이 없다. 악이 없으면 선을 납득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업은 처음부터 좋은 것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항상 나쁜 것을 거쳐 간다. 선을 가르치려면 악을 경험시켜야 하고 하느님을 가르치려면 사탄을 만들어와야 한다. 차별하고 배제하고 미워해야 통합되고 사랑한다.
그러나 진실로 말하면 악은 원래 없다. 선의 지체가 있을 뿐이다. 적은 원래 없다. 문제해결이 있을 뿐이다. 사탄은 원래 없다. 리더가 있다. 모든 차별되고 미워하는 것은 통합하고 사랑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어리석은 시행착오를 인간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누구도 진리로 바로가지는 못한다.
존재론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식론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존재는 양자적이다. 둘이 교착되어 하나가 된다. 처음부터 둘로 시작된다. 세상은 에너지다. 에너지는 원래 고유한 활동성은 가지고 있다. 인식은 원자적이다. 그냥 하나가 있는데 누가 외부에서 건드리면 사건이 일어난다. 틀렸다. 원래 사건은 일어나 있다. 137억년 전 빅뱅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사건은 일어나 있었다. 사건이 교착되어 에너지의 고유한 활동성을 감추면 존재가 포착된다. 그러나 속임수다. 드라마의 빌런은 원래 동적 존재다. 원래부터 돌아다니며 일을 벌인다. 주인공은 정적인 존재다. 주인공은 가만 있다. 주인공이 가만 있는데 빌런이 찾아와 일을 벌인게 아니라 반대로 주인공이 일을 벌이는 것이 구조론이다. 우주는 처음부터 일이 벌어져 있었다. 이브가 아담을 꼬셔서 사건이 일어난게 아니다. 원래부터 사건으로 시작했다. 사건 자체의 논리를 따라가는게 존재론이다. 그러나 사건을 볼 수 없다. 인간은 정지한 것만 볼 수 있다. 정지한 것은 애초에 잘못 본 것이니 눈을 다시 뜨고 에너지의 활동성을 봐야 하지만 인간은 그게 원래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정지한 것을 봤다가 다음 그 모순에서 사건을 유추하고 다시 정지한 것을 뇌에서 지우는 번거러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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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만나 국가를 결성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집단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무의식의 형태로 집단의 조종받지만 자신이 집단의 일원이며 조종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