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쪽엔 Let's Make a Deal 이라는가족오락관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몬티홀 패러독스라는것은 그 쇼의 진행자였던 몬티 홀 씨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음.....허참 아저씨랑 조금 닮은거 같기도 하고...
이건 60년대 사진이고 지금은 많이 늙으셨죠
몬티홀 패러독스는 상당히 유명한 문제(이자 떡밥)이지만 혹시 접해보시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소개해 보겠어요
1.세개의 문이 있습니다
세개의 문중 하나의 문 뒤에는 고급 자동차가....그리고 나머지 두개의 문 뒤에는 염소가 있습니다
제가 자동차가 있는 문을 정확히 고른다면 고급 자동차는 제 차지가 될겁니다
아니면 염소만이 절 반겨 주겠죠
2.그리고 제가 하나의 문을 선택했을때
몬티홀 아저씨가 제가 고른 문이 아닌 다른 두 문 중에서 염소가 있는 문을 열어 보여줍니다
그리고는 제안합니다
"여기서 당신에게 문을 바꿀수 있는 찬스를 드리죠 어쩌시겠습니까? 바꾸시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과연 바꾸는게 유리할까 바꾸지 않는게 유리할까
1.바꾸든 안바꾸는 확률은 33%로 똑같다
2.아니다 바꾸면 두개의 문 중에 하나를 고르는 셈이니 50%의 확률로써 바꾸는것이 유리하다
3.아니다 무조건 바꿔야하고 바꿨을때 자동차가 있을 확률은 66%이다
정답은 3번입니다.....이유는 각자 생각해보시길^^;
P.S : 마릴린 사반트라는 기네스북 역대 최고 I.Q 기록 아주머니가
이 답을 발표했을때 엄청난 항의와 반박을 받았다는데
그 항의와 반박편지를 보낸 사람들 중엔 수학자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한 포스트 링크
http://www.herohan.pe.kr/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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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주제 같아서 퍼온 글입니다.
요약하자면
선택의 기회가 주어질 경우 그 선택의 기회를
살리는 방법, 즉 선택을 바꾸는 것이 유리하다는 말입니다.
즉 선택을 바꿀 수록 당첨될 확률이 높다는 말이죠.
하지만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동차의 위치를 모르는 제가 3가지
문 중 어느 하나를 고른 들 자동차를 고를 확률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죠.
물론 사회자가 문 하나를 열어 두가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할 경우로 좁혀져 그 확률이 쉽게 말해 50%가
될 테지만 이미 한 가지 부정확률을 제거한 상태에서
아직 부정되지 않은 선택을 다시 재고한다는 것은
확률 이상의 문제입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죠.
'놓친 고기가 더 커보인다.'
즉 확률이 50/50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이미 결정한
선택을 포기할 경우 감당해야할 심리적 리스크는 50/50의
균형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한 쪽으로 치우친 상태에서의
재선택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수학계에서도 이같은 논리에 대해
상당한 반발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선택을 바꾸든 바꾸지 않든 확률은 동일하다"라는 주장이었죠.
하지만 이 몬티홀의 딜레마를 이런 식으로 치환한다면
어떨까요? (물론 제 생각은 아닙니다요^^)
사회자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보죠.
이 세개의 문을 두고 선택할 수 있다.
다만 당신이 선택한 문 하나를 열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선택하지 않은 문 두개를 열 것인지 결정하라.
과연 무엇이 유리할까요?
자명하지 않나요^^ 설사 사회자가 내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염소가 들어있는 문을
열어 보여줬다하더라도 그 확률은 변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선택을 바꾸는 확률은 제가
처음에 생각했던 50%의 확률 즉 대칭이 아니라
66.7%의 비대칭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문을 더 많이 여는 선택 즉 선택을 바꾸는 것이
더 유리한 것이죠.
그런데 지금 여기서 포인트!!
어차피 50/50 즉 대칭이다라고 말하던 저의 말과
선택을 하지 않아도 확률은 같다고 주장하는 수학자의
발언이 어디서 많이 듣던 뉘앙스같진 않으신가요?
- 어차피 찍어봐야 거기서 거기야.
- 그럴거면 그냥 하던 놈이 하던 게 낫지 않아?
다 비슷한 녀석들이면 말이야.
이 말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죠?
바로 이 땅에 보수라고 일컫어지는 이 땅의 어르신
들이 많이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몬티홀의 딜레마를 빌어 말씀드리자면
이 땅의 보수의 선택의 전제란
"어차피 답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확률은 똑같다.
그러므로 내 맘대로 하겠다.' 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란 원효대사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목이 마를 경우 해골에 든 썪은 물을
마시더라도 시원함을 느낄 정도로 참, 거짓을 가리
는 기준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의 보수의 선택이란
문 하나를 열 기회를 포기하는 방향 즉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을 포기하는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이땅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모든 확률은 다 똑같다고 보시니까요. 어느것이
일어나도 감흥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정말 비참한 말입니다. 우리가 선조의 피로
세운 이 나라도 또한 후세의 피로 세운 이 나라의
성장도 그리고 그 자식들의 피로 세운 이 나라의
민주주의도 모두 우리의 선택이 아닌 우연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의 진보의 전제란
"확률을 높이는 선택으로 가야한다. 이 땅의 모든
것은 필연이다. 즉 비대칭이다."
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기회가 된다면 문을 하나라도 더 열 수 있는
방향으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설사 답을 모르더라도 또한 문을 열면 열수록 리스크가
커지더라도 확률을 높여가는 것이 우리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포기한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문이 있다면 열어야 합니다.
결코 닫힌 문이 우리의 선택이 되어선 안됩니다.
이럴 때마다 저를 괴롭히는 말.
희망이 없다는 말. 두렵다는 말.
하지만 희망이란 끊임없는 상호작용이자 생존의
상부구조입니다.
제가 이 말을 절실히 느끼게 된 전제란 바로 이것입니다.
"난 이미 죽은 것이다. 다만 지금 죽음 속에서
삶을 지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입니다.
마치 영화 '베리드'에서 땅 속에 묻혀 휴대폰을
들고 2시간이나 살아남았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즉 내 삶이 하얀 캔버스 위에서 색을 칠하고 있다는
전제가 거짓이라는 것을 느낀 거죠.
내 앞에 있는 캔버스는 아무 것도 칠해지지 않은
하얀 캔버스가 아니라 새까맣게 죽음으로 덧칠된
까만 캔버스인 것이란 생각입니다.
결국 내 삶이란 그 까만 캔버스를 조금 끍어내며
하얀 삶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식으로 '세상은 마이너스다'라는 구조론의 전제를
이해했습니다.
때문에 리스크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거죠.
이미 난 죽어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삶이란
내가 능동적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죠.
결국 희망이란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제 손에
쥐어진 휴대폰을 눌러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입니다.
제 앞에 문이 있다면 끊임없이 열어 젖히는 것입니다.
그런 내 앞에 우연으로 점철된 답없는 막막한 세상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확률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확률이란 대칭이 아닌 비대칭을 엿보는 것이자
우연이 아닌 통제 가능성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문명을 잉태한 인간의 방향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너무 말이 길었네요^^
자, 이제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바꾸시겠습니까?
불현듯 생각이 나 끄적거린 메모입니다.
기회를 가졌을 때 선택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의 전제란 대다수
'이거 바꿨다가 실패하면 어쩌지'라고
생각됩니다.
즉 성공이 아닌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한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선택을 하지 않는 선택은 50/50의
대칭을 이루지 못합니다. 도리어
비대칭의 관계에서 불리한 포지션을
점유할 뿐입니다. 즉 성공확률이
불리해지는 거죠.
결국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패와 동의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좀더 면밀히 보자면
실패란 질을 장악하지 못한
단절된 과정에 가깝고
성공이란 질을 장악한
연결된 시작에 가깝다고 보입니다.
다만 현시점에서 실패로 규정된 단절된 과정이
시간이 지나 연결된 시작으로 거듭날 때 그 실패는
성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때를 잘못 만난
천재들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겠죠.
때문에 엄밀히 말해 실패는 실패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욕구란 말이 하다+하다의
동어반복으로써 가짜언어라고 보듯 실패란 가능성이
잠재된 씨앗과 같아 시간과 장소를 두고 본다면
언제든지 싹을 티울 수 있는 잠재된 성공이므로
실패란 말은 본디 가짜언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란 없는 것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 되므로 이는 가짜 선택이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실패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 진짜 실패?인
셈이고 이는 단절된 과정이 아닌 결을 기로 환치한 뒤
거꾸로 과정을 거슬러 가는 오류를 범한 연어와 같은
선택이므로
이는 질이 아닌 양에 집착한 것이고
즉 귀납적인 판단이라는 생각입니다.
결국 기회를 가졌을 때 자신의 선택을
바꾼다는 것은 확률 및 통제가능성을
찾는 선택 즉 성공을 전제로 한 판단이고
성공을 연결된 새로운 시작점 즉 기라고 본다면
이는 질에 의거한 판단이므로 연역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단절된 과정 즉 실패하더라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하여야할 태도란 실패 자체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실패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진짜 실패란 실패하지 않으려는
귀납적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감이란 연역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갖는 자신의 사고모듈의 확률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문에 긍정적인 사고를 갖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사람이 되어 연역의 사고를
하는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좋은 배우란 자신의 배역을 잘 분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그 배역인 양
몰입을 잘 하는 사람이듯 말입니다.
법칙은 절대성이지만, 해석은 각자 할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맞는 조합을 만들어 내면 그것이 창의라고 생각되며, 이는 다시 또 메뉴얼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보임. 이것을 하나로 꿰면 그 사람의 인생 항로라고 여겨짐.
인생의 문제로 놓고 볼때 무조건 바꾸는 것이 정답입니다.
사람들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살고 있는데, 그것은 본인들이 살아있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물은 죽은 겁니다. 아이히만은 애초에 태어난 적이 없는 겁니다.
까만 캔버스를 긁어 하얀 바탕을 찾아낼때 비로소 태어나는 겁니다. 사건으로 비약하는 거지요.
모르겠다에서 철학이 출발하듯이, 이미 죽어있음을 아셨으니 이제 태어나시겠네요.
이미 실패(죽음) 상태이므로 안바꾸면 영원한 실패이고 바꾸면 성공확율이 조금 올라갑니다.
그 성공확율을 높이기 위해 서로 만나고 상호작용해야 하는 거구요.
구조론연구소가 가장 높은 확율을 제시합니다. ^^
근데 수학자들이 속아넘어갔다는게 안 믿기오.
이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1과 2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오.
1과 2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2를 선택해야하는 거.
셋이 있는데
그 중에서 둘을 가질래 하나를 가질래 하면 당연히 둘을 가져야지.
처음에 3지 선택문제 였습니다. 1:1:1
그 것을 진행자가 2지 선택문제로 바꿔줬는데, 2:1
그 바뀐 사실을 못보고 해매는거죠..선입견에 빠져서...
참고로...저 영화는 <21>이네요....
상황에따라 현명한 선택이 다른것 같은데요
동렬님의 책이나 동영상에서 단기전에선 꼼수가 통하고 장기전에서는 꼼수가 안 통한다는 내용을
배운것 같습니다 이를 적용하면 만약 이 퀴즈가 마지막 문제라면 위의 반심리학을 고려해 처음선택을 고수하고
만약 같은 문제가 계속 있다면 선택을 바꾸는것이 현명할거라 봅니다..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보자면 야구하고도 비슷하게 풀어낼 수 있을 것. 9회말 동점상황에서 2아웃에 주자 1루 상황이라면, 감독은 대타를 쓸 것인가? 의 의사결정을 해야하는 상황과 잠시 후 1루주자가 2루로 도루를 성공했을 때의 대타를 쓸 것인가?의 의사결정은 다를 것이오.
물론 야구는 퀴즈쇼와 다르게 투수가 우투수인지, 좌투수인지, 대타자의 상대전적이라거나, 그 날의 컨디션, 팀케미스트리 등을 고려해서 의사결정을 해야겠지만...
요는 변수가 등장했을 때,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 의 문제. 김성근 감독은 경기중 엄청나게 많은 의사결정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중에 엄청나게 많은 의사결정을 했소. 민주주의는 적극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국가가 무조건 이기는 게임. 독재나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뒤쳐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함.
http://www.grand-illusions.com/simulator/montysim.htm
몬티홀의 딜레마를 체험할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참고삼아 올립니다.
저는 100번을 기준으로 선택을 바꿔보았는데
승: 65% 패: 35% 의 확률로 나왔습니다.
========
웹서핑을 돌아다니며 몬티홀의 딜레마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엿보았는데요.
몬티홀의 딜레마에 대해 수용적인 입장에 대해선
패스하구요.
흥미로운 점은 이 딜레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의 태도였습니다.
이분들의 요점은 대다수 사회자입니다.
하지만 사회자를 고려한 논리의 경향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는 대칭의 주장과 다른 하나는 비대칭의 주장이죠.
* 대칭의 주장은 사회자의 선택도 경우의 수에 포함시켜
야 한다입니다. 즉 (정답이 1번일 경우를 전제)
- 출연자가 정답인 1번을 선택한 경우 사회자는 2번과 3번 중
랜덤으로 열어준다 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출처] 몬티홀의 딜레마에 대한 결론|작성자 하두고
[출처] 몬티홀의 딜레마에 대한 결론|작성자 하두고
멋진 글이네요.
써먹어야 하겠는데.
처음에 확률이 1/3이었는데
사회자가 개입해서 아닌 것 중의 하나를 제거했으므로
매우 유리해졌는데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으면
그 유리함을 내가 챙겨먹는 절차가 빵꾸났으니까 이상하잖아요.
이상함을 느껴야 정상.
세놈이 각자 33퍼센트를 가졌다.
둘 중 한놈이 자폭을 했다. 33퍼센트를 던져버린 것이다.
그 33퍼센트는 어디로 갔을까?
내게로 오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사회자는 어떤 경우에도
내가 선택한 문을 열고 염소를 보여주지는 않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