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 세상 그리고 세상의 일부인 인간에 내재되어있는 완전성
이라고 완전히 치환해서 생각해도될까요? 아니면 너무 투박한 해석이 될까요?
그리고 얼마전에 게시판에서 이것과 관련해서 말씀하시는 것들을 보았는데요
꽤 많이 팔리기도 했던 '만들어진 신' 이라는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안 읽었습니다. 정말로요ㅋㅋ)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즉 사람들을 자신들의 사제적인 욕망에 종속시켜 집단을 만들고 또 그 집단에서 군림하기 위해
혹은 지배를 손쉽게 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간에 정치적 이득을 꾀하기 위해
기성종교에서의 '신'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그러니까 애초에 인간에게 완전성이 있었고 존엄이 있었고 신이 있었지만
신을 염원하는 인간의 마음은 정말 이용당하기 쉬운 것이었고
결국 신을 향한 염원이 발현된 형태인 종교라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지간에 목적이나 여타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변질되기 쉬운 것이라
차라리 부작용에 가까운 것이 아닌지 하고 생각해보았고
또 신을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이렇게 인류가 너무 많은 부작용을 떠안고 왔는데
신을 추구할 당위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제 생각이 맞는지 틀린지 알고 싶습니다.
짧게 말하자면
일단 신은 이미 있다. (완전성?)
그리고 인간은 신 혹은 신적인 상태를 추구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욕망이 종교라는 형태로 발현되는 동시에 종교는 권력이 되고, 악용당한다.
그래서 종교계의 깨달은 사람이 몇몇 있을지언정
구조론자인 우리가 기성종교 자체를 바라볼때에는
정치판 혹은 동물원 원숭이들의 권력투쟁을 쳐다보는 것처럼 차가운 입장을 취해야 한다.
두서 없는데 너무 당연한 말만 써놓지 않았나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대충 이렇습니당.
... 어떤 분이든 상호작용 부탁드립니다.
그렇다면 당위를 따지기 전에 이미 인간의 경향성에 내재되어있다는 뜻일까요
신을 만들어냈다는건 바보같은 소리입니다.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 종교적 본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인간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직접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집단에 떠넘깁니다.
스트레스, 불안정, 흥분 등의 형태로 그것은 나타납니다.
집단에 떠넘기는게 더 쉽게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 때문에 전쟁 등의 부작용도 있지만.
인간이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교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며 이걸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과학자들은 아직 인간에 대한 이해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그러한 공동체적 본성을 잘 제어합니다.
즉 종교가 더 쉽게 인간을 통제한다는 거지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면 정치인의 웅변과 종교인의 설교 중에서 누가 더 먹힐까요?
당연히 종교인이 더 잘 인간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원시시대부터 있었습니다.
즉 인간은 머리를 쓰는 어떤 판단이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복합적인 상황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인 것이며, 그것이 완전성 개념이며
종교가 인간의 그러한 반응점을 잘 알고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과학은 그 원리를 이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무식하기 때문에. 인간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거기다가 교리나 강령이나 계율이나 하는 것들을 집어넣어
교단을 조직하고 어떤 유형의 형태를 만든 것은 인간의 발명입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공동체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동체 전체에 스트레스를 가하는 방법으로 공동체와 소통하고 있으며
개인과 개인과의 대화에 의한 소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와 직접 반응, 상호작용 하는 것이며
그것이 완전성이고 이것을 발달시킨 것이 예술이며
예술의 목적은 공동체 전체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며
무당들은 그러한 인간의 본능을 잘 사용할줄 아는 기술자들이며
원래 과학자가 연구하고 분석한 것보다 한 차원 위에 하나의 구조가 더 있는 것이며
인간이 이를 완전히 이해한다면 종교를 버리고 예술로 나아가야 하며
종교를 대체할 공동체를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그러한 노력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논의를 발전시켜 보면
인간이 파악하고 있는 물질세계 위에 한 차원 더 높은 곳에 구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정보는 물질보다 빠르고 빛보다 빠릅니다.
물질구조 위에 구조가 하나 더 있으므로
신은 없다고 막연히 부정할 것이 아니라
있다 해도 그것이 인간이 원하는 어떤 할배는 아니라고 말하는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신을 추구하는 마음이라는 건 인간의 공동체적 본성 혹은 소통의 욕구이고
이것은 이미 인간 유전자단계에서 주어져있고 바꿀수 없으며
또 완전성이라는 것은 이런 시도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보는 방향이므로
인간에게 이미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는 걸까요.
그런데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신 혹은 완전성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본능 이라는 단어 자체와 별다를 것이 없어지는데 즉 유전자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신 혹은 완전성이라는 개념은 당연히 이런 물질세계를 초월해서
한 차원 더 높은 구조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할텐데 그럴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수컷이 죽으면 암컷중의 하나가 수컷으로 변합니다.
종교는 무당이 만들었는데 무당이 스스로 무당을 발명한게 아닙니다.
무병을 앓아서 무당이 된거죠.
집단에 스트레스를 가하면 누군가 무당이 됩니다.
갑자기 댓글을 보고 생각이 났는데요.
신들렸다고 하는 친구들 있잖아요
저도 귀신이 보인다는 친구도 보고, 예지력이 있다는 친구도 봤는데
걔네도 무병을 앓아서 무당 비스무리하게 된걸까요?
그 친구들 대개 조상들보면 무당조상 끼어있고 그러던데.
가족이라는 집단의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종의 무당이 된 것일까요?
아니면.. 걔네가 한 말은 모두 거짓인 걸까요.
귀면 귀(鬼)고, 신이면 신(神)일 것이지 왜 귀신이라고 하는 걸까요.
귀와 신은 한자가 다르고 개념이 다릅니다.
귀는 일종의 기운인데 생명의 엑기스가 어떤 물질에 달라붙은 겁니다.
주로 남자들의 힘이 들어간 장기알이나 빗자루 삽 등에 잘 들어가는데 세월이 흐르면 사라집니다.
신은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실체인데 천지신명을 말합니다.
결론
옛날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생명의 원소가 사물에 침투해 있다고 생각하여 귀 개념을 발전시켰다.
또 별이나 달의 운행을 지배하며 인간에게 계시하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신은 천신, 지신 등으로 만물의 질서라는
추상개념을 구체화시켜 의인화 한 겁니다. 의신화인가?
인간에게는 모두 무당유전자가 있습니다.
그 유전자가 어떤 방식으로 격발되느냐는
일단 집단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로 추정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신'이란 책은
무신론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며, 기독교의 창조론을 공격하는 형태입니다.
근데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그럼 기독교는 나쁘고, 불교는 괜찮다는 거냐?
기독교도 불교도 나쁘고, 무신론자의 집단적 편견은 괜찮다는거냐?
종합적인 비판이 필요한 겁니다.
무신론도 비판의 예외는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신이라는 개념이 진화해 왔다는 겁니다.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신이라는 개념의 진화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불교는 무신론이라 하지만
신이라는 개념을 다르게 쓸 뿐 불교 안에 이미 신이 있습니다.
단지 기독교의 신과 다를 뿐입니다.
결국 신이라는 것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같아서
각자 자기류의 신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각자 자신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신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자기소개지요.
누가 물어봤냐고요?
왜 자기 이야기 하냐고요?
'만들어진 신'의 저자 역시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속의 신을 비판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그딴거 만들어 내라고 했나요?
자기가 만들어낸 신 말고
자기가 만져본 코끼리다리 말고
그런 생각을 가능케 한 원초적인 소스를 보자는 겁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만들어진 신이 무신론자들에게 약간의 자부심을 줄 지언정
인간의 원초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문제는 '왜 사냐?' 입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무신론자들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위험한 겁니다.
왜?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역으로 그러한 통제의 필요성에 의해 신이라는 개념이 도출된 것입니다.
즉 인간은 그러한 유전자 통제형태로 진화해 왔다는 겁니다.
인간은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며
그 상호작용이 곧 통제입니다.
이상은 인간의 신에 대한 관념이
어떤 성직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당은 인간이 처음 지구상에 존재할 시점부터 있었다고 본다면
어떤 의미에서 예수 역시 무당이었다고 본다면
신이라는 개념은 진화해 온 것이며
그 소스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유태인의 신은 씨족장이고 그냥 할배였습니다.
할배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지요.
할배의 의미는 공동조상 곧 공동체입니다.
할배는 죽었지만 공동체의 연속성은 존재하니까.
즉 신은 인간이 공동체와 일대일로 상호작용할 때 기능하는 개념입니다.
원시 기독교가 그 공동체의 규모를 씨족으로 한정했다면
카톨릭은 보편이라는 의미인데
그 씨족집단의 의미를 세계, 우주 단위로 확대해 놓은 겁니다.
씨족장이었던 신을 우주족장으로 확대시킨 거지요.
어쨌든 인간에게는 공동체와 일대일 상호작용이 있듯이
우주전체와의 일대일 상호작용이 존재하고
그 문제를 무신론자들은 해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는데 해결못하면 큰소리칠 자격이 없다는 거지요.
그리고 신이라는 단어를 어떤 때 쓰는지 관찰해 보면
공동체 전체 혹은 인류와 우주 전체와 일대일 상호작용이 필요한 때 씁니다.
예컨대 자기 한명을 살리면 백명이 죽게 되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
'오 마이 갓' 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무신론자라면 간단히 자기가 살고 백명을 죽게 하겠지요.
왜냐하면 그걸 뒤집을 이론적 근거가 없으니까.
양심?
그건 입증된 건가?
무슨 말인가 하면
무신론자들의 만들어진 신과 같은 접근법으로는
종교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런 식이면 백년 후에도 미국 대통령은 보수 기독교 교회에서 낙점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건 문제의 해결방향이 아닙니다.
공동체와의 일대일 상황은 여전히 존재하니까.
여기까지는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냐
자연발생한 무당으로부터 진화한 신 개념이냐에 대한 이야기고
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의가 아닙니다.
있느냐 없느냐는 제가 예전에 많이 이야기 했지만
새삼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어떤 수염난 할배 남자 노인네 개인이 신일 가능성은 0퍼센트입니다.
그런 할배가 배꼽도 있고 꼬추도 있고 그건 아니잖아요.
신은 난생이라서 배꼽이 없냐 이런걸 논쟁하려면 너무 유치하잖아요.
구조론의 핵심은 상부구조가 있으며
상부구조는 질의 형태로 존재하고 질은 어떤 개체가 아닙니다.
물질은 입자이므로 물질 이전의 어떤 영역이 있고
빛보다 빠른게 있고 인간은 아직 그 세계에 대해서 충분한 이해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른다 그러나 포지션이 있다'가 정답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납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은 모두 떨어질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해도
야 일루와 봐 나랑 논쟁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은 어케 매달려 있간?
이런 식으로 논쟁해서 격파해 버린다고 해결됩니까?
중세 기독교회는 뭐든지 다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지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기네가 설명할 수 없는건 다 없다고 해버렸어요.
설명못한다고 말하면 쪽팔리니까.
구조론으로 말하면
완전성의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은 입자 단위의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며
질의 관점으로 볼때 물질 입자 위에 하나의 포지션이 더 필요하다는 겁니다.
있어야 한다는 당위가 있다는 거지요.
포지션이 있는 겁니다.
그 포지션에 어떤 넘이 있는지 구체적인건 모른다고 해야 맞지
없다고 하면 안 되지요.
네 접수했습니다.
신성에 대해 관념이나 감정에 물들지 않고 깨닫는 극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신이나 완전성에 대한 생각이 퍼져나가고,
이것이 세속에서 비판되고 조롱되면서 결국 신성모독적 신앙 혹은 반종교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립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발생적 현상이라고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순환주기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염두하고 현상을 바라보게 되면 신을 추구해야만 할 당위성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걸 알 수 있고,
오히려 근본에서의 신이나 완전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생겨난다는 것이 자명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