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문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언어를 만들어 보급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모든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연역적 언어체계다. 반면 우리의 일상언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위주로 만든 귀납적 언어체계다. 대화를 통해서만 의미가 성립되도록 되어 있다면 불완전하다. 핵심은 대칭이다.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대칭이 아니라 언어 자체에서 대칭이 조달되어야 한다. 일상언어로는 인간의 경험 밖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언어로 나타낼 수 없다. 우리의 언어는 대화에 갇혀 있다. 대화를 극복해야 진리에 근접한다. 그래서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구조론에서 말하는 담론이다. 하나의 이야기 안에 사건이 둘이어야 한다. 둘 사이에 에너지 전달의 경로가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 언어가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반면 대화는 상대방이 말을 받아주므로 불완전하다. 바담풍 해도 바람풍으로 알아들으므로 언어가 발전하지 못한다. 진리와 언어를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에 진리를 한정시킨다. 바담풍해도 바람풍으로 알아듣는 구조에 진리를 가둔다. 낮은 레벨의 언어를 쓰게 된다. 언어를 업그레이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빛은 입자인지 파동인지 논할 필요는 없다. 파동은 무엇이고 입자는 무엇인가? 구조론으로 볼 때 빛은 파동이다. 모든 파동은 내부에 입자의 성질을 숨기고 있다. 파동이냐 입자냐 하는 논쟁은 구조론의 질이냐 입자냐와 같다. 질은 입자를 포함하지만 입자는 질을 포함하지 않는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다. 파동이 더 전체의 모습이며 입자는 파동의 일부성질이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입자와 파동으로 둘이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야 한다.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대칭이다. 입자는 내부에 대칭의 축이 있고 파동은 외부에 대칭의 축이 있다. 파동이 둘 충돌하면 입자가 만들어진다. 파도가 충돌하여 너울을 만드는 것과 같다. 파동을 구조론의 힘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헷갈리기 시작한다. 구조론의 힘 역시 외부로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빛을 입자로 본 사람은 파동을 힘으로 설정한 것이고, 빛을 파동으로 본 사람은 파동을 질로 설정한 것이다. 확실히 파동에는 구조론의 힘에 해당하는 성질이 있다. 그러나 원래 질 속에 입자가 있고 입자 속에 힘이 있다. 힘 속에 운동이 있고 운동 속에 량이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은 질이다. 파동의 여러 성질을 종합적으로 나타내려면 파동을 질로 놓아야 한다. 뭐든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숨은 변수를 쓰면 된다. 배후에 하나가 더 있다. 하나를 더 보태면 계급이 올라간다. 파동은 힘으로 관측되지만 그 힘을 전달하는 매개변수가 있어야 하므로 입자가 되고, 입자가 진행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하므로 질이 된다. 파동을 질로 보면 모든 문제가 해소된다. 단 파동의 의미를 확대했다는 점이 각별하다. 그 파동이 아니다. 구조론을 이해하는 방법은 납득될때까지 계급을 올리는 것이다. 매개 변수를 추가하면 된다. 최종 단계에서 구조가 복제되어 다른 사건으로 넘어간다. 에너지 입력부가 하나인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에너지에 의해 구조가 복제되는 단계에서 사건은 완전히 끝이 난다. 복제본이 원본에서 이탈하므로 거기서 더 나아갈 방법은 없다. 우리는 파동을 설명할 때 밭고랑을 그린다. 밭은 논하지 않는다.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하므로 헷갈리는 것이다. 바다를 보라는 말이다. 파동을 2차원 평면 위에다 지렁이처럼 꼬불꼬불하게 그려놓는다. 위아래로 그린다. 파동은 위와 아래의 관계로 표현된다. 4차원 밀도로 그려보라. 자연히 파동은 입자가 된다. 파도는 구슬과 모양이 정확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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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 물뱀, 뱀장어의 이동하는 모양이 떠오르네요.
얘네들의 몸은 본래 막대기 모양의 1자 I자이지만
얘네들 몸에 에너지가 흐르게 되면
몸을 s자 모양으로 유연하게 구부렸다 폈다하면서 파동모양을 이루면서
앞으로 나아가네요.
빛은 파동을 이루고 지렁이, 뱀, 뱀장어의 이동은 빛의 복제이고
사람이 브레이크 댄스 출때 자기 몸으로 만드는 웨이브는 무엇의 복제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