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냐 주인이냐? 탈레스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 했고 노자는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고 했다. 이는 창조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물처럼 부드러운 재료가 주어져야 무엇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뉴턴이래 결정론적 사고가 유행하면서 딱딱한 것을 쳐주게 되었다. 원자론적 사고의 등장이다. 원래 인류는 부드러운 것을 높이 쳐주었는데 갑자기 딱딱한 것으로 퇴행하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종교의 득세로 자신을 약자로 놓는 노예의 관점이 도입된 것이다. 또 하나는 수학에 대한 편견이다. 수학이라는게 원래 딱딱하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수학은 딱딱한 것인가? 인류는 수학적 사유에 힘입어 근대과학을 열어젖히게 된 것이다. 그 수학이 딱딱하다보니 진리는 딱딱한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수학도 깊이 들어가면 부드러운 것으로 되어 있다. 우선 무한대 개념이 그렇다. 무한대를 표시하는 ∞ 기호부터 부드러운 꽈배기 도너츠가 아닌가? 수학의 깊은 곳에 부드러운 무한대가 도사리고 있다. 근대를 열어젖힌 미분적분도 무한대를 쓰는 극한개념에서 출발한다. ‘무한히 가까워진다’는 극한 개념은 어떻게 보면 반수학적이다. 수학은 똑부러져야 하는데 똑부러지지 않는다. 그런데 신은 이 방법으로 세상을 창조했다. 발상의 전환이다. 무한은 한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수라는 것은 한을 정한 것이다. 수는 유한이다. 그러나 구조론의 대칭개념으로 보면 한이 없는 한도 있을 수 있다. 0과 같다. 크기가 없는 크기도 있을 수 있다. 허수와 같다. 그런데 이게 없으면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세상을 마이너스로 보면 답이 보인다. 노예의 관점은 플러스로 보는 것이다. 노예의 자산은 제로다. 뭔가 플러스 되어야 한다. 노력하면 플러스 된다. 그러나 창조자의 관점에서 보라. 마이너스는 있어도 플러스는 없다. 있는 재료를 쓰는 것이다. 창조자의 마이너스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마땅히 부드러운 것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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