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방법 말 나온 김에 공자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공자가 인의를 가르쳤다는둥, 혹은 왕도정치를 주장했다는둥, 예절이 어떻다는둥 이런건 솔직히 매력없다. 고리타분한 소리가 아닌가? 그거 듣고 있으면 잠 온다. 예수의 사랑도 그렇다. 그래서 어쩌라고? 참 물정 모르는 답답한 아저씨가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콘텐츠가 빈곤하다. 당대에 명성을 떨쳤던 소피스트들 중에서 가장 고지식한 한 명의 소피스트에 불과하다. 그나마 콘텐츠가 좀 있어주는게 석가다. 사실 불교사상의 대부분은 석가와 상관없다. 윤회니 까르마니 환생이니 하는건 석가와 상관없는 인도의 전통이다. 계급을 부정한 것이 석가의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고집멸도 사성제는 확실히 느낌이 있다. 탈레스가 물 1원론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의 똑 부러지는 느낌이다. 완결성이다. 물을 말한게 중요한게 아니고 무려 1원론을 주장했다는게 중요하다. 통짜덩어리다. 이런건 반짝반짝 한다. 공자는? 없다. 가르친게 없네. 공자가 노상 하는 소리라곤 ‘나는 배움을 좋아한다네.’ 하는 자기자랑 뿐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한 명의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공자다. 일단 나이로 먹어준다. 시대로 봐서 공자가 가장 앞서 있다. 먼저 찜해놓는게 중요하다. 플라톤은 형이상학을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류학이다. 이런건 먹어주는 콘텐츠다. 그러나 공자는 그 이상의 것을 했다. 공자 외에 다른 사람을 들먹이는건 좀 모자라는 사람의 행동이다. 지식인이 아니다. 노자의 아이디어도 반짝반짝 하지만 그건 채워넣어야 할 콘텐츠다. 빈 칸을 만들어 놓으면 누가 와서 채워넣는게 콘텐츠다. 플라톤의 콘텐츠는 철학이다. 노자는 굳이 말하자면 플라톤과 짝지어야 격이 맞다. 노자, 석가, 플라톤은 확실히 자기 콘텐츠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콘텐츠가 있긴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건 다른 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대적 사유를 시범 보였다. 말하자면 작가는 아니고 편집장 비슷한 사람이다. 평론가로 해도 된다. 작가는 지어내고 편집장은 남이 지어낸걸 평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리하고 점수매겼다. 일본 만화가 번성한 이유는, 작가를 발굴하고 서포터하는 편집자들 덕분이다. 드래곤 볼의 토리야마 아키라보다 그를 발굴한 편집자 토리시마 카즈히코가 더 중요한 인물일 수 있다. 작가 위에 편집자가 있다. 그럼 편집자-평론가 위에는 누가 있지? 바둑을 처음 발명한 사람은 기력이 어느 정도 될까? 이창호와 두면 누가 이길까? 이런 실례되는 질문은 곤란하다. 바둑을 발명한 사람에게 국수 타이틀을 줄 수 없다. 격이 있는 거다. 격으로는 공자가 가장 높다. 예수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맹자, 퇴계, 혜능은 일종의 센스있는 편집자 혹은 평론가다. 격이 낮다. 주자, 플라톤, 석가, 율곡은 작가다. 이들은 킬러 콘텐츠가 있다. 독특한 아이디어가 있다. 작가는 편집자 위에 있을 수도 있고 아래일 수도 있다. 작가가 있고서야 편집자가 등장하는 수도 있고 반대도 있다. 예컨대 하루키가 중년남과 소녀 이야기로 대박을 냈다고 치자. 한국에도 꼭 따라하는 작가 나온다. 박범신의 은교. 은희경은 살짝 비틀어서 연하남과의 스토리로 가준다. ‘요즘 트렌드는 나이 차 있는 커플이야. 이런게 먹어주지.’ 하고 떠드는 편집자의 역할이 있는 거다.
◎ 위대한 설계가.. 공자, 뉴턴(진리와 인간의 연결.) 작가는 진리를 보고, 편집자는 인간을 본다. 둘을 동시에 보는 사람이 판을 설계한다. 비유하자면 공자는 처음 바둑을 발명한 사람이다. 석가는 바둑을 잘 둔 사람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설해준 사람이다. 공자는 무엇을 가르쳤는가? 가르치면 안 된다. 가르치는 사람은 편집자, 혹은 평론가다. 예수나 맹자나 혜능, 퇴계가 가르치는 사람이다. 공자에게 무언가를 배웠다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예禮는 그냥 공자의 직업이고, 인의는 그냥 중국적 전통이고, 왕도정치는 중국의 신화다. 그게 공자의 콘텐츠는 아니다. 원래 시장에 떠돌던 거다. 공자가게에서 파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공자의 진짜는? 세종대왕이라면 가장 빛나는 대목은 무엇인가? 한글이 자랑거리지만 그건 콘텐츠다. 집현전이 더 중요하다.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한글보다 집현전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열광해야 한다. 그게 학자다운 태도다. 이순신이라면? 거북선? 아니다. 학익진이다. 거북선은 사실 없어도 되는 거다. 명량해전은 거북선도 없이 한 거다. 학익진은 이순신 혼자 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위대한건 업적이 아니라 팀이다. 한글은 세종 혼자 창제한 것이고 집현전은 팀이다. 공자는 60명의 제자를 두었고 나중 3천명까지 세가 불어났다. 이후 공자그룹의 활약을 모방하여 식객 3천명을 거느리는 자들이 전국시대에 여러 명 나타났다. 여불위만 해도 3천명의 학자를 모아 백과사전의 원조격인 여씨춘추를 펴냈다. 죽간에 20만 단어를 기록한 것은 대단한 거다. ‘남아수독오거서’ 해봤자 죽간이라 요즘 국어사전 한 권 분량도 안되는 판에 말이다. 여불위는 명성을 얻기 위해 공자의 업적을 모방한 것이다. 이후 중국사에는 빈번하게 백과전서파들이 등장한다.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에서 대규모 학술사업을 벌여 일종의 아카데미즘을 일으킨 것이 그러하다. 말하자면 ‘집현전 운동’의 일환이다. 그래서 세종이 위대하다. 조선왕조는 왜 경국대전을 만들었고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었을까? 공자의 방법을 계승한 것이다. 이를 모방하여 볼테르가 백과전서운동을 한 것이다. 어느 면에서 근대 계몽주의 사상의 뿌리는 공자라 하겠다. 대규모 지식사업의 시초가 공자다. 공자는 모든 스승의 스승이다. 근대의 아이디어는 공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몰론 실제로 공자는 이것들을 하지 않았다. 하다보니 역사가 그렇게 된 거다. 한 알의 불씨를 당겼을 뿐인데 학문이라는 큰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공자의 빛나는 대목은 이런 거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재상을 맡았을 때 제나라가 침략하려고 꾀를 냈다. 두 나라 정상이 회담하는 자리다. 공자는 글만 아는 샌님에 불과하니 겁을 주면 제압된다. 제나라에서 칼춤을 추는 무사 10여명을 연회장에 불러들여 무술솜씨로 공자를 겁주려 했는데 공자는 전혀 쫄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간파하고 회담장에 대군을 끌고 가서 엄숙한 분위기로 위엄을 세웠다. 그리고 호통을 쳤다. ‘두 나라 왕이 정상회담을 하는 판에 칼춤 추는 잡배가 들어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이것이 될 말인가?’ 그러자 제나라에서 전술을 바꿔 이번에는 미인들을 대거 들여보냈다. 역시 공자는 유혹되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재주부리는 광대들을 들여보냈다. 호통을 쳐서 광대들을 쫓아버렸다. 이런게 멋진 거다. 공자를 제압하려다가 거꾸로 공자에게 제압되었다. 순식간에 갑을관계가 바뀌어 버렸다. 공자에게 배우려면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 본질은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가? 제압당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거다. 인의가 어떻고, 예절이 어떻고, 충효가 어떻고, 왕도가 어떻고 그런 초딩수준 찌질한 소리 좀 하지 마라. 제발. 그딴건 대부분 공자팔이 영업뛰는 제자들이 영업하려고 양념 친 가짜다. 그게 조미료 범벅이다. 공자가 들어도 기가 막힐 소리다. 공자의 진면목을 보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증자, 순자, 맹자가 왜곡한 가짜 공자를 진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방향을 제시하고 찌질한 짓을 못하게 한 거다. 근데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는 넘 있다. 증자다. 패줄 수도 없고. 공자의 방법은 존엄이다. 존엄은 여러 사람의 힘을 합치는 거다. 정상 대 정상의 만남으로 격을 높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천하를 움직였다. 세 가지 스타일이 있다. 처음 바둑을 발명한 사람, 기원을 운영하며 평론하는 사람, 기사로 나서서 바둑을 두는 사람. 겹치는 스타일도 있다. 기원도 운영하면서 기사로 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격이 다르다. 사실 작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도 중요하다. 편집자의 먹어주는 센스도 중요하다. 그러나 방향제시 하는 사람의 통합적인 사유가 더 윗길이다. 그래야 스승의 자격이 있다. 이 시대에 진정한 스승은 누구인가? 천하의 지식인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이 합의할 수 있는 것을 계속 합의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판짜기가 우선이다. 앞서서 방향을 제시하고 보편의 룰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진짜다. 율곡의 독창적 아이디어나 퇴계의 먹어주는 센스는 그 다음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바보냐? 누가 네 생각을 물어봤냐고?’ 자기 생각을 말하지 마라. 그건 하수들이 하는 짓이다. 팀의 건설이 우선한다. 예수가 사랑을 가르쳤다면 ‘저 고지식한 아저씨 또 나왔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저것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고 물으면 눈이 번쩍 떠집니다. 이건 격이 다른 겁니다. 운명의 한 순간에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진정한 리더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예수는 평론가의 관점이 있었습니다. |
저도 공자를 쬐끔 안다면 아는 사람인데,
생각지도 못한 이런 얘기는 두 손 두 발 다 들 내용입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공자를 언급한 예를 본 적이 없어요
제대로 준비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평가라 생각됩니다
13경중에 제일 어려운 해석이 바로 논어입니다
당연히 가장 엉터리로 해석된 책이 논어일 수 밖에 없죠
논어 텍스트 자체 내에서 문법을 추출해내야만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고,
또 그 추출이 가능합니다
확실한건 논어는 논어 자체의 문법을 갖고 있다고 전제해야할것입니다
논어를 제외한 12경의 문법을 갖고 논어를 해석하려하니 해석이 제대로 되겠읍니까
논어해석을 기도한 지식인들이 사실은 이러한 내적 고통을 갖고 있읍니다
하여간 이제껏 나온 논어 해석은 한마디로 과학(논리)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동렬님이 까뮈 해석에 대해서 논하신 적이 있지요
이 부분이 저를 깜짝 놀라게 했읍니다
이것이 맥락의 문제인가요?
아무리 각론 잘하면 뭐합니까
각론에서 어긋나더라도 총론에서 올바로 체계지을 수 있어야죠
오늘도 그것을 느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