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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8420 vote 0 2014.06.05 (17:43:45)

 

    신과의 일대일


    철학이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의미란 무엇인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치는 또 무엇인가? 이렇게 계속 사색해 들어가면? 최종적으로 허무주의라는 통곡의 벽을 만나게 된다.


    ‘인생은 허무하다.’ 이 절대명제에 동의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아닌데? 인생은 의미가 있는데?’ 하는 놈과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닥쳐! 아무 의미없다. 등신아! 그딴게 있을 리 있나?’


    위키백과를 참고하면 철학은, ‘세계와 인간과 사물과 현상의 가치와 궁극적인 뜻을 향한 본질적이고 총체스러운 천착’이라고 참 등신스럽게 써놓았지만 정말 바보같은 소리다. 궁시렁대기는!


    하여간 여기서 건질 단어는 ‘가치’와 ‘뜻’이다. 그러니까 가치와 의미가 철학이다. 알것냐? 세계, 인간, 사물, 현상, 본질, 총체, 천착은 그냥 좀 있어보이려고 나열해놓은 수식어에 불과한 거다.


    가치와 뜻이 본론인데 같은 말이다. 가치=뜻이다. 그런데 뜻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게 허무주의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밤을 까봐도 속알맹이가 있고, 잣을 까도 건질게 있는 법이다.


    인간을 까면 무엇이 나올까? 인간 알맹이가 나온다. 그게 영혼이다. 근데 인간을 까보면 과연 영혼이 나와줄까? 직접 까보셔. 인간을 까도 영혼을 찾을 수 없고 단 새끼를 까면 2세가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단어들이 결국 의사결정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가? 과연 내게 의사결정권이 있는가이다. 예컨대 왕이라면 왕노릇을 하면 된다.


    가치와 의미가 주어져 있다. 고유한 역할이 있다. 소는 밭을 갈면 되고, 개는 집을 지키면 되고, 닭은 알을 낳으면 되고,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대로 하면 되고 그게 가치고 뜻이다. 그게 철학이다.


    소의 밭갈기철학, 개의 집지키기철학, 닭의 알낳기철학, 노예의 복종철학이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밤을 까면 밤 알맹이가 나오듯 인간을 까면 역할이 나와주는 거다. 그런데 그 의미가 없다.


    그 어떤 의미도 없다. 내게 주어진 고유한 역할 따위는 없다. 이 지점에서 진정 철학은 시작된다. 이 점을 인정한 사람과는 어른들의 대화가 되는 것이며 아닌 사람은 닥쳐! 꺼져! 교회나 가봐.


    일찍이 위아설의 양주가 갈파한 바 ‘내 몸의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에 이익이 된다해도 마침내 그 터럭을 뽑지 않겠다.’는 정도의 기개가 있어야 한다. 이는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의 포착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베고, 달마를 만나면 달마를 베고, 신을 만나면 신을 죽이고, 완벽한 의식의 표백 위에서 본론 들어갈 수 있다. 희망과 야심을 말소하고 일체의 의미를 부정하고 시작하기다.


    그림을 그릴 때는 깨끗한 도화지를 준비해야 하는 것과 같다. 거기에 이미 밑그림이 그려져 있다면? 버려야 한다. 깨끗한 백지가 아니면 점 하나도 찍을 수 없다. 그렇지 않나? 그런데 훼손되었다.


    너는 흑인이니까. 너는 여자니까. 너는 귀족이니까. 너는 한국인이니까 하는 식으로 도화지는 이미 덧칠되어 있다. 이미 많은 의미와 가치가 주어져 있다. 이는 모두 타인으로부터 강요된 가짜다.


    이런 식이라면 내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깨끗하게 지워버려야 한다. 내 몸에 터럭 하나라도 안 뽑겠다는 호방한 기개가 있어야 타자로부터 주어진 거짓 의미와 가치를 완전히 초기화시킬 수 있다.


    물론 양주의 위아설은 현장에서 바로 박살이 난다. 몸 아끼느라 터럭을 안 뽑다가 이웃사람들에게 몰매맞아 죽는다. 천하에 이익이 되는데도 그 터럭을 뽑지 않으면 천하가 가만이 있겠는가?


    천하녀석이 방문해서 매우 구타한다. ‘양주? 너 뭐야? 어쭈 이것이 아직 멍성말이 매서운 맛을 모르는구나.’ 이렇게 된다. 양주가 터럭 하나를 안 뽑히려고 버티는 이유는 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함부로 까불다가는 나를 보존하기는 커녕 멍석말이나 당하는 거다. 그렇다. 노자의 무아설은 양주처럼 섣불리 나를 앞세우다가 동네 형님들께 몰매맞지 말고, 나대지 말라는 거다.


    나를 뒤로 감추는 것이 도리어 그 터럭 하나를 약탈당하지 않고, 몽둥이 찜질을 당하지 않고 나를 보존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 노자 선생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중요한건 의사결정이다.


    실제로 털을 뽑든 안뽑든 상관없다. 갈림길에서 의사결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지점을 들이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의사결정은 시작된다. 그럼 이 괴상한 논의를 불필요하게 여기는 것들은?


    1) 영혼설.. 너 그러다가 지옥가는 수 있다.
    2) 이성설.. 칸트가 기독교의 영혼설을 슬쩍 변조.
    3) 권력의지설.. 영혼과 이성을 부정하고 인간 안에서 찾아보기.
    4) 실존설.. 인간 안에 말고 사회관계 안에서 찾아보기.
    5) 위아설/무아설.. 사회를 넘어 우주를 넘어 신과의 일대일.


    나의 의사결정권리를 무엇으로부터 도출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냥 찐빵에 팥소가 있듯이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 천국에 좋은 자리 알아봐놨다’고 하면 간단히 해결되나 이는 종교의 방법.


    종교가 아닌 과학으로 와서, 인간의 영혼이 부정될 때 이성설>권력의지설>실존설>위아무아설로 진화하는데 여기서 사고의 범위가 점점 확장된다는데 주목할 일이다. 나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칸트의 이성설은 영혼의 대체재가 있다는 구라고, 니체의 권력의지설은 의사결정권을 찾되 나를 중심에 두고 사회로 확대하며, 샤르트르의 실존설은 반대로 나를 배제하고 사회관계에서 찾는다.


    엄밀히 말하면 칸트나 니체는 영혼이 없다면 대신 뭐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게 아닌가 해서 적당히 둘러댄 거다. 까뮈의 이방인은 니체와 달리 나를 제거했을 때 사회의 권력의지가 포착된 거다.


    내 안에 고유한 권력의지라는게 있을까? 없다. 영혼이 없고 이성이 없는데 권력의지가 어딨어? 그딴 것은 모두 외부로부터 호출되었을때 내가 반응한 것이다. 그 상호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내 안에서 갑자기 사랑의지가 툭 튀어나와서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아니고 미녀를 보았기 때문에 내가 반응하는 것이다. 세상이 없고, 사람도 없고, 남녀도 없다면 내 안에 사랑도 없는 것이다.


    노자가 위아설을 무아설로 바꾸듯이, 니체의 권력의지를 까뮈의 허무의지로 바꿔버린 거다. 인간의 의사결정권의 궁극적인 출처가 어디냐다. 나와 피아와의 대결구도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므로 달마를 베고, 부처를 베고, 예수를 베고, 신을 베어야 비로소 본론이 나와준다. 신과의 일대일 개념은 여기서 영혼>이성>권력의지>실존>위아무아가 갈수록 의사결정단위가 커지는 만큼 거꾸로 가장 큰 범위에서 출발하여 좁혀오는 방법으로 탐색해야 답이 찾아진다는 거다.


    나 개인의 몸뚱이에서 출발하여 이웃, 사회, 국가, 세계로 범위를 확대해가면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다. 그 끝은 절절한 허무다. 아무 것도 업다. 그 경우는 순수한 허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 반대로 세계, 사회, 이웃, 나, 나 안의 의사결정으로 좁혀오면 거기서 맥락이 발견되는 것이며, 뚜렷한 인간의 행위동기가 포착된다. 말하자면 영혼? 이성? 족까고 있네 구라치지 마! 우주의 권력의지가 먼저 있고 그것이 사회의 권력의지로 전개하며, 사회의 권력의지가 개인의 권력의지로 좁혀지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도 되고 영혼도 된다.


    내 안에서 사랑이 갑툭튀 하는게 아니고 천하의 사랑이 내게로 깃든다. 그러므로 미처 천하를 발견하지 못한 자에게는 진정한 사랑이 없다. 고승덕의 딸사랑은 가짜다. 그런 사랑은 도야지에게도 있는 싸구려다. 안 쳐준다.


    결론적으로 나의 권력의지는 노자의 무아설을 받아들여 나 안에 없고 우주의 권력의지, 신의 권력의지가 내게로 넘어왔다는 거다. 그러려면 먼저 신을 때려죽여야 이야기가 되는데 그래서 일대일이다.


    ◎ 엄마가 그려준 밑그림에 색을 칠한다.
    ◎ 어느 순간 내 그림이 아님을 깨닫고 백지를 찾는다.
    ◎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든 그것은 진정한 내 그림이 아니다.
    ◎ 신의 그림, 천하의 그림을 내 그림으로 삼을 때 진짜가 그려진다.
    ◎ 그러므로 신과 정직하게 대면해야 본론이 나와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철학은 인생의 의미찾기이며, 인생의 의미는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의사결정권이며, 의사결정권이 내 안에는 없고 천하에 있으며, 이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엄마가 평생 엄마인줄 안다. 어느 순간 쫓겨난다. 독립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도 같다. 태어날 때부터 고유한 의미가 정해져 있는줄 안다. 주변에서 오냐오냐 하고 도련님 대접을 받으면, 원래부터 고유한 자기 역할이 정해져 있는줄 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백지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아무 의미도 없다. 역할도 없고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다. 희망도 없고 야심도 없다.


    제로 상태에서 자신의 게임을 새로 설계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의지, 욕구, 야심은 완전히 무시된다. 당신의 피부색이나, 신분이나, 부모나, 외모나, 상속된 재산이나 이런건 완전히 지워진다.


    당신은 흑인도 아니고 백인도 아니며,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며, 귀족도 아니고 노예도 아니며, 부자도 아니고 노숙자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희망과 야심과 가치의 재료들은 백지상태에서 외부로부터 새로 조달해야 한다.


    진리가 나의 영토가 되고, 자연이 나의 둥지가 되고, 역사가 나의 타고갈 배가 되고, 진보가 나의 이불이 된다. 오직 환경과의 상호작용만이 진실하다. 세상과 한 편이 되는 수 밖에 없다. 다른 모든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영혼을 잃고 천하를 얻는 것이 철학이다. 천하가 내 영혼이 된다. 천하의 의지가 나의 의지가 된다. 개인의 야망, 욕망, 희망, 권력의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천하의 기운이 나를 통해 표현된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겐가 전달하고 게임종료다.


   


[레벨:10]다원이

2014.06.05 (21:13:20)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겐가 전달하고 게임종료다. ...!!
[레벨:1]invictus

2014.06.06 (00:25:56)

전달 할 만한 것을 깨달치 못했거나 전달하지 못했으면 게임은 어떻게 되나요?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2014.06.06 (08:50:03)

확률 속에 묻어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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