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깨달음 세가지 깨달음이 있다. 세가지 의사결정이 있다. 하나는 에너지의 동적균형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의 물질적 의사결정이다. 둘은 권한의 동적균형에 의해 작동하는 사회의 정치적 의사결정이다. 셋은 존엄의 동적균형에 의해 작동하는 내면의 심리적 의사결정이다. 중요한 것은 답이 있다는 것이다. 답은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세팅하는 것이다. 그것은 팀플레이를 하는 것이다. 아시아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그 편견을 보기좋게 깨주었다. 중국은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제 3 세계는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도 하고도 시크교도는 인도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 뿐 아니라 미국에 진출하여 세계 IT업계를 흔들고 있다. 세계경제의 모범답안을 찾고자 한다면 시크교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인도인들이 내세중심적 사고를 가진데 비해 현세중심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교리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벌고, 열심히 가족을 챙기고, 열심히 고기를 먹고, 열심히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다. 일본도 이와 유사하게 노동을 권면하는 불교전통이 있다. 어느 분야든 한 분야에 정진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으로 통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인도인들은 왜 답이 없을까? 너무 많은 의식 때문이다. 힌두교의 논리는 더럽다/깨끗하다 논리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정화의식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루에도 여러번 제단을 찾야 향을 사르고 정화의식을 한다. 일상생활이 의식에 지배되다 보니 의사결정을 못한다. 회교의 폐해나 일부 기독교와 불교의 문제점도 비슷하다. 문화 상대주의 곤란하다. 잘못된건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유태인은 특별한 의사결정구조를 갖추고 있다. 일본의 일부 불교사상이나 인도의 시크교도 비슷하다. 케말 파샤는 놀라운 의사결정능력으로 잠든 투르크를 깨웠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자 개인의 업적이었다. 유태교와 일본불교와 시크교는 그것이 정밀하게 시스템화 되어 있다. 특히 시크교는 재미있는 의사결정구조가 있다. 그들은 신을 믿지 않고, 지도자를 믿지 않고 진리 그 자체를 따른다. 그래서 자유롭다. 성경에 집착하여 각종 폐해를 저지르는 한국의 개신교와 다르다. 구조론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동물은 확실히 입자의 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식물은 입자의 형태가 애매하다. 사건은 식물보다 동물에게서 촉발된다. 늑대가 울타리를 넘어와서 새끼양을 물어갔다거나, 수말이 발정한 암말을 보고 흥분하여 돌진하다가 마차를 개울에 쳐박았다거나 간에 모두 동물의 동에서 비롯하여 사건은 일어난다. 식물은 사건을 잘 일으키지 않는다. 기껏해야 잡초가 웃자라서 채소밭을 망쳤다는 정도다. 그러므로 막연히 우리는 입자로부터 사건이 일어난다고 착각하게 된다. 모든 사건은 동의 형태로 일어나며 입자는 동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건은 질에서 촉발된다. 버섯은 입자의 형태가 모호하다. 땅속에서 균사체가 자라다가 어느 순간에 송이버섯처럼 갓을 불쑥 내민다. 이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갑자기 후다닥 튀어나오는 것이다. 표고버섯이든 송이버섯이든 갓을 내민 것은 하나의 개체이지만 땅 속의 균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하나라고 하는 개체가 없다. 팽이버섯만 봐도 알 수 있다. 균사들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뭉치다가 갑자기 형태를 불쑥 내민다. 이는 물이 100도에 이르러 끓듯이 일정한 조건이 되면 무질서하게 각개약진하던 구성소들이 일정한 조건에서 독수리 오형제가 합체하듯이 갑자기 합체하여 입자의 형태를 도출하는 것이다. 버섯이나 이끼에서 특히 이를 잘 관찰할 수 있다. 의사결정구조가 갑자기 도출된다. 동물은 뇌라는 의사결정구조를 갖추고 있다. 식물은 계절따라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는 의사결정을 해낸다. 그것은 바깥 환경과의 교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버섯이나 이끼는 팝콘이 터지듯이 내부적인 불만에 의해 갑자기 아우성이 터져나온다. 만원버스가 일정한 한도를 넘으면 비명소리가 터지는 것과 같다. 인간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3.1만세처럼 갑자기 터져나온다. 419의거처럼 일제히 터져나온다. 5월항쟁처럼 뜨겁게 타오른다. 그해의 6월처럼 화려하게 꽃 피운다. 거기에는 의사결정하는 동물의 뇌가 없다. 그 의사결정은 버섯이나 이끼처럼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식물이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맺듯이 환경과 교감하여 정해진 코스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노무현 같은 뛰어난 리더가 나타나면 동물처럼 머리를 쓰기 시작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밑바닥에 분노가 쌓였다가 돌연 폭발하는 버섯단계에서, 때가 되면 꽃 피우는 식물단계로, 그리고 유능한 지도자를 만나 제법 전략을 쓰는 동물단계로 나아가기를 몇 십년 주기로 반복한다. 큰 주기 안에 몇 년짜리 작은 주기도 작동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자연에 버섯≫식물≫동물로 가는 주기가 있을 뿐 아니라, 사회에 버섯의 폭발≫식물의 개화≫동물의 밀당으로 가는 주기가 있을 뿐 아니라, 내면에도 1인칭의 존엄≫2인칭의 자유≫3인칭의 성취로 가는 주기가 있다. 이러한 주기를 잘 컨트롤 하는 방법으로 걸맞는 답을 찾아낼 수 있다.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주의는 확실한 답을 내지 못했지만 유태인이나 시크교도 같은 독특한 의사결정구조는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의사결정구조가 잘못되면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잘못되고 만다. 정답은 동적균형이며 그것은 경쟁의 단위가 바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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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은 합리적인 의사결정구조를 세팅하는 것이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