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손짓에 응답한 한 사람의 삶을 그린 영화 '변호인'이 장안의 화제다. 영화 '변호인'에 드러나는 1980년대는 거대한 힘이 짓누르고 있었지만 맞서는 패기가 있었고 격동의 시대에 그에 걸맞은 거인이 나왔다. 1990년대에 우리는 부동산 개발의 에너지를 갈아탔고 실패를 맛본 이후에 인터넷이라는 선물을 받고 사회 전체가 크게 반응했다. 수많은 신화가 만들어졌고 젊은이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는듯했다. 2002년은 그 흐름의 방점을 찍는 멋진 해였다.
언제부터 한국은 김빠지고 있다. 역동성이 줄어들고 서로 숨죽이고 있다. 신화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무거운 절망이 잿빛 하늘처럼 드리웠다.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달려갈 출구가 없이 고립돼 있다. 고립되면 내부에서 부패가 시작된다. 즉 욕망이 달려갈 출구가 막히면 그 힘이 서로를 밟고 해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저 안녕하냐고 물을 뿐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어디에 반응해야 하는가. 무엇을 향해 달려야 하는가.
소통은 상호작용의 밀도를 높이는 일이다. 친구들끼리 모여 말을 많이 하거나 같이 노는 일이 소통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안에서 백날 친분 쌓는 것보다 바깥에 '큰 일'이 벌어지면 비로소 공동체의 결속이 생겨나고 상호작용의 밀도가 높아진다. 적이 쳐들어오면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모여 대적하게 되지 않는가. 같은 편이라는 연대의식이 만들어지고 팀워크라는 개념이 실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영화 '변호인'의 송변은 전쟁터에서 각성한 사람이다. 무슨 전쟁인가. 인류의 배반자들과의 전쟁이다. 무슨 이유든 인간 존엄을 짓밟는 자들이 배반자들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엄청난 암초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진행방향이 있다. 인류호는 인간 존엄을 향하지 결코 특정 집단의 이익을 향하지 않는다. 암초는 존엄을 넘어서는 거대 권력·도그마·미신과 같은 것들이다.
대한민국이 세계호에 승선하려면 이러한 흐름에 올라타야 했다. 먹고살자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존엄성의 회복이 더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의 변호인은 이 방향을 거스르려는 적의 존재를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다. 시대의 절실한 부름에 응답한 영웅담인 것이다.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분노는 쉽더라. 하지만 그 분노를 성찰로 바꾸고 신념으로 변화시켜서 공감을 얻는 건 쉽지 않더라"고 했다. '80년대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 짧은 우리의 변호인은 분노로 일어섰지만 개인적인 분노에 멈추지 않고 시대에 응답했기에 공감을 끌어냈고 99명의 변호인을 시대의 법정으로 불러 함께 했으며 결국 수십만의 시민을 광장으로 불러내 결국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됐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언제부터 인가 짓눌려있다. 사회는 점차 어떤 조건을 요구했고 젊은 친구들은 순응하는데 익숙해져갔다. '스펙(specification)' 열풍이 생겼다. 자격증이나 시험점수·어학연수 같은 스펙으로 이력서를 아무리 가득 채워봐야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
스펙과 스펙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면 실패다. 그 사이를 스토리로 채워야 비로소 공감이라는 힘이 생겨난다. 실패마저 스펙으로 만드는 것이 스토리다. 낱낱의 사건과 만남, 실패의 기록까지 모두 엮어 하나로 이어져야 성공이다. 겉치장 스펙을 쫓아 가볍게 이리저리 날아다녀서는 공감 없는 이력서가 될 뿐이다.
세상을 향해 '대체 왜 아무도 이런 것을 하지 않지'라는 분노에서 출발해 수없는 도전과 좌절을 통해 신념이라는 굵은 선이 만들어져야 한다. 갇혀있는 대한민국, 출구는 어디인가. 안에서는아무리 서로 멱살 잡고 싸워봐야 힘만 뺄 뿐이다. 눈을 돌려 밖을 보고 세계를 봐야 한다. 인류호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고 그 응답을 들어야 한다. 거기에 드라마가 있고 창의가 있다. 비로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