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완전을 지향한다. 각자 나름대로 자기 삶의 주제를 정해놓고, 자기만의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완전을 꿈꾼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과는 별개로 자연의 완전성 그 자체는 존재한다. 곧 진리다. 진리의 이름으로 완전성이 존재하는 법이며 인간이 그 완전을 지향하는 것이다.
매트릭스 .. 어떤 소설이든, 작품이든, 음악이든, 혹은 영화든 혹은 드라마든 혹은 인생이든.. 그대의 삶 그 자체 까지도 .. 마찬가지다.
완전이 100이라면 인간이 처음 50으로 그 대상에 안티를 걸어 신발끈을 고쳐매고 출발할 때.. 혹은 갈등을 풀어 70으로 나아갈 때.. 혹은 90에 근접하여 더욱 가속도를 느낄 때 ..
거기까지다. 인간이 만약 그 완전의 100, 곧 연역과정에 도달한다면 그러한 전체과정은, 곧 각자의 삶의 주제어로서의 동그라미는 온전히 소멸하고 만다.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즉 그 완전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게임과정은 오로지 귀납과정이며, 극적인 반전에 이르러 귀납에서 연역으로의 반전이 일어나고 그 순간에 게임은 확실히 소멸한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무엇인가? 매트릭스는 언제나 미완성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완전성의 노출이 그 게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성에 근접할 수 있을 뿐 도달할 수는 없다. 또는 설사 도달했다 해도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치기로 약속해야만 게임은 반복된다.
컴퓨터가 인간을 대리하여 바둑을 두게 되면 그 즈음 바둑은 소멸한다. 바둑은 그 완전에 도달하지 않으므로써 살아남는 것이다. 실제로 바둑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컴퓨터도 그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드라마든 소설이든 작품이든 완전은 ‘암시’로만 표현된다. 마지막에는 길이 등장하고 그 길 끝에서 완전을 만날 것이 암시되는 것이다.
물론 태작의 경우 주인공 커플이 웨딩마치를 울리는 것으로 막이 오르기도 하지만 이건 어이없는 설정이 된다. 예컨대 김기덕의 나쁜남자의 결말은 행복한 결혼이 아니라 계속되는 고난으로 처리된다. 김기덕의 사마리아에서 여주인공은 차가 흙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모나리자의 모델 곧 상복을 입은 비운의 여주인공은 원래 절대로 웃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본질에서 실패이며, 그 실패한 99가 100에 근접할수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그 간절함을 담아 인간은 노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간절함의 정도를 판단하여, 완전성의 100에 근접함을 느끼고 궁극적 완전성의 존재를 인지하는데 성공해내곤 한다.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간과는 별개로 자연의 완전성 그 자체는 존재한다. 곧 진리다. 진리의 이름으로 완전성이 존재하는 법이며 인간이 그 완전을 지향하는 것이다.
매트릭스 .. 어떤 소설이든, 작품이든, 음악이든, 혹은 영화든 혹은 드라마든 혹은 인생이든.. 그대의 삶 그 자체 까지도 .. 마찬가지다.
완전이 100이라면 인간이 처음 50으로 그 대상에 안티를 걸어 신발끈을 고쳐매고 출발할 때.. 혹은 갈등을 풀어 70으로 나아갈 때.. 혹은 90에 근접하여 더욱 가속도를 느낄 때 ..
거기까지다. 인간이 만약 그 완전의 100, 곧 연역과정에 도달한다면 그러한 전체과정은, 곧 각자의 삶의 주제어로서의 동그라미는 온전히 소멸하고 만다.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즉 그 완전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게임과정은 오로지 귀납과정이며, 극적인 반전에 이르러 귀납에서 연역으로의 반전이 일어나고 그 순간에 게임은 확실히 소멸한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이다.
무엇인가? 매트릭스는 언제나 미완성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완전성의 노출이 그 게임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성에 근접할 수 있을 뿐 도달할 수는 없다. 또는 설사 도달했다 해도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치기로 약속해야만 게임은 반복된다.
컴퓨터가 인간을 대리하여 바둑을 두게 되면 그 즈음 바둑은 소멸한다. 바둑은 그 완전에 도달하지 않으므로써 살아남는 것이다. 실제로 바둑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컴퓨터도 그 완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드라마든 소설이든 작품이든 완전은 ‘암시’로만 표현된다. 마지막에는 길이 등장하고 그 길 끝에서 완전을 만날 것이 암시되는 것이다.
물론 태작의 경우 주인공 커플이 웨딩마치를 울리는 것으로 막이 오르기도 하지만 이건 어이없는 설정이 된다. 예컨대 김기덕의 나쁜남자의 결말은 행복한 결혼이 아니라 계속되는 고난으로 처리된다. 김기덕의 사마리아에서 여주인공은 차가 흙탕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처리된다.
모나리자의 모델 곧 상복을 입은 비운의 여주인공은 원래 절대로 웃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본질에서 실패이며, 그 실패한 99가 100에 근접할수록 간절해지는 것이며, 그 간절함을 담아 인간은 노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간절함의 정도를 판단하여, 완전성의 100에 근접함을 느끼고 궁극적 완전성의 존재를 인지하는데 성공해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