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한 중이 조주에게 묻기를,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이오?(祖師西來意)”
“뜰 앞의 잣나무로다(庭前栢樹子).”

“잣나무 따위의 비유를 들어 말하지 마오.”
“나는 비유를 들어 말하지 않는다.”

“다시 묻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이오?”
“뜰 앞의 잣나무로다.”


조사는 왜 서쪽에서 왔을까?
과연 조사는 서쪽에서 왔을까? 빙글빙글 돌아가는 별 하나 있으니 동쪽은 어디이고 서쪽은 또 어디란 말인가? 동쪽이니 서쪽이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달마는 오지 않았다. 달마는 애초에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동쪽이고 서쪽이고 간에 혹은 ‘오거나 가거나’ 간에 다 헛된 분별심에 불과하다.

문제는 ‘과연 달마인가’이다. 묻노니 그는 과연 달마인가? 그가 바로 달마라고? 좋다. 보장은 없지만 뭐 그렇다치고 ..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다면 달마는 과연 달마일까?

달마가 달마라는 보장은 또 어디에 있더란 말인가?

묻노니 그대는 왜 이곳으로 왔는가? 아니 당신은 오지 않았다. 당신은 단지 마우스의 자판을 클릭했을 뿐이다. 당신은 개미당에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켠 것이다.

왜냐하면 개미당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미당은 전기신호로 제어되는 몇가지 규칙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올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다.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명명된 그것은 구태여 말한다면..  명목된 바 하나의 수학적 구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애초에 그대가 개미당으로 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묻노니 너는 너인가? 너를 너라고 말할 자는 또 누구인가? 너는 확실히 존재하는가? 너는 이 지구상의 어느 한 귀퉁이를 지배, 혹은 점유하고 그 확보된 개체에 독립성을 부여한 즉 명명하였는가?

뉘 있어서 인정한다는 말인가?

달마는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달마를 이룬 것이다. 보디 다르마(bodhi-dharma)란 이름을 가진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지구상의 한 귀퉁이에서 죽었다.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 된 데는 또한 우여곡절이 있고 드라마가 있다. 어쨌든 그는 달마를 이루었다. 즉 그는 조립하여 마침내 '달마'에 이르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 달마의 조립과정에 기여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를 달마당이라 한다. 혹 선종이라고도 불린다. 육조 혜능 등이 그 달마당의 일원이라 할 수 있다.

2500년 전에 먼저 온 자가 있었으니 그는 석가를 이루었다. 또한 무리들이 있었으니 석가당이다. 혹 불교라고도 하는데 개미당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

하여간 달마에 도달하기 쉽지 않고, 석가에 도달하기 또한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뜰 앞의 잣나무가 자라려면 아직 멀었다.

연역과 귀납의 차이 드러내기
이런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연역적 사고''귀납적 사고'의 차이를 드러내보이기 위함입니다. 사고의 방향이 다르지요. 예컨대.. 질문에 대꾸하면 귀납적 사고입니다. 어떻게 대꾸하든 대꾸한 즉 귀납적 사고입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부분(결과)에 대하여 전체(원인)는?
“뜰 앞의 잣나무로다.”
전체에 의하여 얻어진 부분이다.

“잣나무 따위의 비유를 들어 말하지 마오.” 특정한 부분을 말하지 마시오.
“나는 비유를 들어 말하지 않는다.”
나는 특정한 부분을 말하지 않는다.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부분에 대하여 전체는?
“뜰 앞의 잣나무로다.”
전체로 부터 비롯된 부분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며 원인은 전체에 상당한다. 결과는 그 전체를 쥐어짜서 그 전체로 부터 얻어낸 한 부분이다.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든 간에 그 질문은 그 얻어진 부분, 곧 기확보된 결과를 앞에 놓고 그 원인을, 곧 전체를 추적해 들어가는 귀납의 과정이다.

조주는 부분을 말하고 있다. 그 부분은 전체로 부터 비롯된 부분이다. 즉 연역이다. 결과를 말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원인으로 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원인을 말하고 있다. 곧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홍길동이란 작자는 상판이 어드렇게 생겨먹었습니까?”
“바로 저넘이다.”

“저넘은 홍길동의 아들이 아니오? 나는 홍길동에 대하여 질문하였소.”
“나는 홍길동에 대하여 답하고 있다.”

“다시 묻소. 홍길동이란 넘은 상판이 어드렇게 생겨먹었소?”
“저넘의 상판을 보라니깐.”

뭐 이쯤 하면 아 홍길동의 아들넘이나 홍길동이넘이나 상판이 붕어빵으로 똑같이 생겨먹었다는 사실은 알만한 것이 아닌가? 부분과 전체는 통한다. 결과는 원인과 통한다. 홍아빵은 홍아와 통한다.

‘통’ 하였느뇨? 아직 ‘통’ 하지 아니하였다면 얼른 ‘통’ 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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