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의 사마리아 이야기.. 이런거 안좋아하는 분 많지만 드물게 원하는 분도 있으신듯 하여 아까운 지면을 낭비하기로 합니다. 보시한 셈 치셔~
사마리아.. 통쾌한 영화입니다. 문제는 많은 관객들이 저처럼 통쾌해 하기는커녕 반대로 마음의 부담을 잔뜩 짊어지고.. 불편해 하며 극장문을 나선다는 점입니다.
하여간 사마리아를 보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1) 불편해 하며 보기. 2) 통쾌해 하며 보기.. 둘 중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2)번을 택하신 분은 계속 읽으셔도 좋습니다.
사마리아는 ‘배려’에 관한 영화입니다. ‘타인을 배려하기’..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예컨대 이런거죠. 두 친구가 길을 걷다가 그 중 한사람이 눈길에 쫄딱 미끄러지면 그걸 보고 깔깔거리며 웃어서 미끄러진 친구를 쪽팔리게 만들기보다는.. 일부러 미끄러져서 둘이 함께 눈구덩이에 뒹굴기.. 이걸 연출하려면 대단한 친구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친구가 눈길에 미끌어져서, 혹은 이와 비슷한 이유로 중인환시리에 개쪽을 까는 상황에서.. 1) 깔깔거리며 웃는다. 2) 같이 나뒹굴어주는 방법으로 친구의 창피를 덜어준다.
2)번이 정답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그런 사람이죠. 김기덕의 모든 영화는 ‘어떻게 하면 실수로 미끄러진 친구와 함께 고의로 미끄러져줄 수 있는가’에 관한 탐구입니다. 여기서 규칙은 친구가 그걸 눈치채면 안되는 겁니다. 물론 그래도 결국은 눈치채고 말겠지만.
어쨌든 친구가 미끄러지면, 혹은 실수를 하면, 혹은 개쪽을 까면 .. 깔깔거리며 웃는 자는 김기덕의 영화를 볼 자격도 없고, 제글을 읽을 자격도 없으니 여기서 스톱. 나가주세요.
극중의 재영과 여진은 친구입니다. 아니 동일인입니다. 재영=여진이죠. 모르는 사람이 극중 목욕신을 두고 동성애 코드라고 하는데 그것도 말은 되지만, ‘재영=여진’으로 보는게 더 자연스럽죠.
어쨌든 재영은 죽기 직전에 고통스럽게 웁니다. 울다가 죽어요. 근데 그 표정은 웃고 있어요. 그게 화두를 남긴거죠. 그 화두가 바수밀다이고 여진이 그 화두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사마리아입니다.
왜 재영은 죽으면서 미소를 지었을까요? 그는 죽기 직전에 고통스럽게 울었는데.. 왜 울다가 억지로 웃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여진이 그 재영이 사랑한(?) 남자들의 돈을 돌려주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설정을 두고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는데 그런 넘은 극장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그런 넘이 왜 주윤발의 6발들이 리볼버에서 100발의 총알이 발사되어도 트집잡지 않는지 몰것어요. 하여간 껍데기 현실성(?)을 넘는 진정성의 힘을 모르는 자 하고는 대화도 하지 맙시다.
어쨌든 이 영화의 핵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인데 ..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요. 재영과 여진이 동일인으로 본다면 재영은 여진의 과거입니다. 즉 재영이라는 사람이 매매춘을 하다가 그걸 그만두고 여진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과거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재영을 죽입니다.
즉 자신의 과거를 죽이는 거죠. 근데 보통 전과자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갱생을 시도하다가 곧 재범을 저지르고 맙니다. 왜? 여진이 돈을 돌려주는 과정은 점진적인 자살입니다. 이 부분은 극중에서 여진이 깔깔깔 웃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미친 여자 소리를 듣죠. 이건 죽음에 대한 예고에요.
무슨 이야기냐. 보통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인인 자기를 부정하고 정신적으로 살해합니다. 즉 자신의 과거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자기의 현재까지 죽이게 됩니다. 즉 어떤 매매춘의 여성이 그 일을 그만두었어도,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다가 현재까지 책망하게 되며, 그것은 자기파멸로 이어지고 그것이 대도 조세형이 일본에 까지 가서 도둑질을 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재범을 저지르는 거에요. 아니면 자살하거나.
어쨌든 극중의 여진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자살하게 되는데, 그 수첩에서 모든 남자의 이름을 지움과 동시에 자신의 목숨까지 지우게 됩니다. 그걸 눈치챈 아버지가 여진을 용서하는 과정.. 그 이야기가 이 영화의 내러티브죠.
문제는 친구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고 함께 나뒹굴어줄 때, 자신도 고의로 미끄러졌다는 사실을 친구가 알면 안되는데.. 그래도 결국은 알게 되는데.. 그 과정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처리하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죠. 극중에서는 아버지가 여진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여진에게 비밀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너 사고쳤지?’ 이렇게 물어도 안되고 ‘다시는 사고치지 마’ 이렇게 꾸짖어도 안되고 그걸 끝까지 모른척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 알거든요.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근데 그걸 끝까지 모른 척 해야 하거든요. 극중에서는 바퀴에 걸린 돌을 빼주는 암시로 처리되었는데 하여간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죠.
아버지의 알면서 모른 척 하기와 딸의 모른 척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척 하기의 대결.. 재밌죠.
김기덕이 자주 사용하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입니다. 여진의 죽음은 반복적으로 암시되죠. 부활도..
하여간 화두가 풀렸습니까? 재영은 왜 죽으면서 미소를 지었을까요? 그 미소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통쾌합니까?
사마리아.. 통쾌한 영화입니다. 문제는 많은 관객들이 저처럼 통쾌해 하기는커녕 반대로 마음의 부담을 잔뜩 짊어지고.. 불편해 하며 극장문을 나선다는 점입니다.
하여간 사마리아를 보는 방법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1) 불편해 하며 보기. 2) 통쾌해 하며 보기.. 둘 중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2)번을 택하신 분은 계속 읽으셔도 좋습니다.
사마리아는 ‘배려’에 관한 영화입니다. ‘타인을 배려하기’.. 김기덕의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예컨대 이런거죠. 두 친구가 길을 걷다가 그 중 한사람이 눈길에 쫄딱 미끄러지면 그걸 보고 깔깔거리며 웃어서 미끄러진 친구를 쪽팔리게 만들기보다는.. 일부러 미끄러져서 둘이 함께 눈구덩이에 뒹굴기.. 이걸 연출하려면 대단한 친구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친구가 눈길에 미끌어져서, 혹은 이와 비슷한 이유로 중인환시리에 개쪽을 까는 상황에서.. 1) 깔깔거리며 웃는다. 2) 같이 나뒹굴어주는 방법으로 친구의 창피를 덜어준다.
2)번이 정답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그런 사람이죠. 김기덕의 모든 영화는 ‘어떻게 하면 실수로 미끄러진 친구와 함께 고의로 미끄러져줄 수 있는가’에 관한 탐구입니다. 여기서 규칙은 친구가 그걸 눈치채면 안되는 겁니다. 물론 그래도 결국은 눈치채고 말겠지만.
어쨌든 친구가 미끄러지면, 혹은 실수를 하면, 혹은 개쪽을 까면 .. 깔깔거리며 웃는 자는 김기덕의 영화를 볼 자격도 없고, 제글을 읽을 자격도 없으니 여기서 스톱. 나가주세요.
극중의 재영과 여진은 친구입니다. 아니 동일인입니다. 재영=여진이죠. 모르는 사람이 극중 목욕신을 두고 동성애 코드라고 하는데 그것도 말은 되지만, ‘재영=여진’으로 보는게 더 자연스럽죠.
어쨌든 재영은 죽기 직전에 고통스럽게 웁니다. 울다가 죽어요. 근데 그 표정은 웃고 있어요. 그게 화두를 남긴거죠. 그 화두가 바수밀다이고 여진이 그 화두를 풀어가는 이야기가 사마리아입니다.
왜 재영은 죽으면서 미소를 지었을까요? 그는 죽기 직전에 고통스럽게 울었는데.. 왜 울다가 억지로 웃었을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여진이 그 재영이 사랑한(?) 남자들의 돈을 돌려주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설정을 두고 현실성이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는데 그런 넘은 극장에서 추방해야 합니다. 그런 넘이 왜 주윤발의 6발들이 리볼버에서 100발의 총알이 발사되어도 트집잡지 않는지 몰것어요. 하여간 껍데기 현실성(?)을 넘는 진정성의 힘을 모르는 자 하고는 대화도 하지 맙시다.
어쨌든 이 영화의 핵심은 타인에 대한 배려인데 ..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요. 재영과 여진이 동일인으로 본다면 재영은 여진의 과거입니다. 즉 재영이라는 사람이 매매춘을 하다가 그걸 그만두고 여진으로 이름을 바꾸는데 과거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재영을 죽입니다.
즉 자신의 과거를 죽이는 거죠. 근데 보통 전과자들이 그러한 방법으로 갱생을 시도하다가 곧 재범을 저지르고 맙니다. 왜? 여진이 돈을 돌려주는 과정은 점진적인 자살입니다. 이 부분은 극중에서 여진이 깔깔깔 웃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미친 여자 소리를 듣죠. 이건 죽음에 대한 예고에요.
무슨 이야기냐. 보통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인인 자기를 부정하고 정신적으로 살해합니다. 즉 자신의 과거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자기의 현재까지 죽이게 됩니다. 즉 어떤 매매춘의 여성이 그 일을 그만두었어도, 과거의 자신을 자책하다가 현재까지 책망하게 되며, 그것은 자기파멸로 이어지고 그것이 대도 조세형이 일본에 까지 가서 도둑질을 하는 이유입니다. 결국 재범을 저지르는 거에요. 아니면 자살하거나.
어쨌든 극중의 여진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자살하게 되는데, 그 수첩에서 모든 남자의 이름을 지움과 동시에 자신의 목숨까지 지우게 됩니다. 그걸 눈치챈 아버지가 여진을 용서하는 과정.. 그 이야기가 이 영화의 내러티브죠.
문제는 친구가 미끄러지는 것을 보고 함께 나뒹굴어줄 때, 자신도 고의로 미끄러졌다는 사실을 친구가 알면 안되는데.. 그래도 결국은 알게 되는데.. 그 과정을 어떻게 기술적으로 처리하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죠. 극중에서는 아버지가 여진의 행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여진에게 비밀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너 사고쳤지?’ 이렇게 물어도 안되고 ‘다시는 사고치지 마’ 이렇게 꾸짖어도 안되고 그걸 끝까지 모른척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래도 다 알거든요.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근데 그걸 끝까지 모른 척 해야 하거든요. 극중에서는 바퀴에 걸린 돌을 빼주는 암시로 처리되었는데 하여간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죠.
아버지의 알면서 모른 척 하기와 딸의 모른 척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모른 척 하기의 대결.. 재밌죠.
김기덕이 자주 사용하는 물의 이미지는 죽음과 부활의 이미지입니다. 여진의 죽음은 반복적으로 암시되죠. 부활도..
하여간 화두가 풀렸습니까? 재영은 왜 죽으면서 미소를 지었을까요? 그 미소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통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