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단상] 김헌식 문화평론가의 칼럼을 읽고

데일리 서프 김헌식의 ‘영화 ‘황진이’, 우직담백한 민중 리얼리즘의 잔영’이라는 칼럼을 읽고 짧게 리플을 달려고 했는데.. 알 수 없는 금지어가 있다며 글등록이 안되네요.

도대체.. 아래 본문에서 어떤 단어가 금지어일까? 한참을 끙끙댔으나 찾아낼 수가 없었소. ‘양아치’가 금지어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소. 리플달기를 포기하고 내용을 보강하여 단상을 쓰기로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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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도라면 영화를 보지 않고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성의가 없는 글이다. 영화와 무관하게 어떤 정치적(?) 의무감에서 쓴 글이라는 느낌. 글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이건 농담으로 받아들여주오.)

필자의 견해로는.. 황진이는 기녀영화도 아니고, 액션영화도 아니고, 팜므파탈도 아니고, 지식인의 위선을 폭로하는 영화도 아니고.. 놈이와의 사랑이야기도 역시 아니더라.

무슨 사랑이야기가 초반부터 기녀에 기둥으로 갈 때까지 가놓고.. 중간에 김새는 딴애기 잔뜩하다가.. 영화 끝날때 쯤 뒤늦게 남자주인공이 나타나서 곧 허무하게 죽어버리냐.

사랑이야기라면 러브스토리에 집중해야 할 터인데..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했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서야.. ‘어라? 순애보잖아. 이것이 감독이 생각해낸 뜬금 반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식인의 위선을 폭로하는 척 하고 폼을 잡다가 생뚱맞게 순정만화로 방향을 급선회한 것이다.

중간에 주인공이 실종되는 러브스토리도 있나? 참!(아주 실종은 아니다. 놈이가 잠깐 잠깐 얼굴을 내밀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지식인과 대결하는-과 무관하게 겉돌았다.)

이 영화의 실패는.. 황진이와 놈이가 둘 다 너무나 매력없는 인물, 별 볼일 없는 인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벽계수는 왕족 출신으로 신분이 높고 도덕군자로 장안에 평판이 자자한 유명인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벽계수의 고고함이 배우의 연기가 아닌 사또의 대사로만 처리된다. 벽계수가 대단한 지식인이라는 증거가 영화에 없다. 관객도 벽계수에서 엄격한 지식인의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사또가 말로 그렇다고 선언을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영화를 잘못 찍은 것이다. 영화는 그냥 말로 선언하지 않고 연기로 구체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게 영화다.

상식적으로.. 벽계수가 도덕군자다움을 과시하는 장면을 먼저 넣고 그 다음에 황진이가 벽계수를 물먹이는 방법으로 응수하는 것이 맞다. 물론 이걸 세밀하게 묘사하려면 그것만으로 드라마 1회분을 찍어야 한다. 애초에 대하드라마를 압축하여 두시간 반짜리 일대기를 만든게 잘못이다.

영화는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그림과 연기로 처리되어야 할 것을 대사로 처리하고 있다. 황진이의 많은 에피소드들을 140분 안에 우겨넣기는 물리적으로 불능이니까.(나라면 황진이가 기생이 되는 장면에서 끝내고 나머지는 속편에서 다룰 것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일대기는 망한다.)

놈이는 너무 하찮은 인물로 그려졌다. 놈이의 부하가 고작 몇이냐? 규모도 작고 세트도 초라하다. 얼마나 규모가 작은 화적떼인가 하면 관군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마을 안에 있을 정도이다. 망루에서 관군의 접근을 감시하려면 망루가 최소한 소굴에서 2키로는 떨어져 있어야 맞지. 소꿉장난 하자는 건가.

놈이의 부하들 중에 수호지의 108 두령과 같은 변변한 인물이 있기를 하나. 그들 진짜 민중들은 전혀 부각되지 못한 것이다. 영화 황진이는 전혀 민중적 리얼리즘이 아니었다. 눈을 씻고 봐도 민중은 없었다.

놈이의 능력을 ‘진정한 민중의 드라마’인 수호지의 호걸들에 비한다면? 급시우 송강, 탁탑천왕 조개, 청면수 양지, 표자두 임충, 지다성 오용, 입운룡 공손승이 1급이라고 보고.. 그 밑으로 흑선풍 이규, 화화상 노지심, 행자 무송, 한지홀률 주귀, 구문룡 사진, 적발귀 유당 들이 2급이 된다.

놈이는? 완소이 완소오 형제 밑에 완소칠 쯤 되겠다. 완소칠이면 많이 쳐준거다. 영화에 묘사된 놈이의 무공으로는 수호지의 108 두령 중에.. 50번째 두령 되기도 간당간당이다. 주인공을 너무 비참하게 묘사했다. 좀 멋지게 그리지. 에휴~

주인공을 화적패 중에도 임꺽정 발가락에 때만도 못한 변방 양아치 화적으로 묘사해놓고 관객이 들기를 기대해? 주인공 놈이가 기껏해야 이방이나 호방 따위 아전들과 대결하고?

아전은 양반계급에 미치지 못하는 중인계급이다. 영화 ‘왕의 남자’는 적어도 왕과 대결하고 있다. 수호지의 임충이 혼내준 고태위는 고관대작이다. 천하의 황진이가 사모한 남자가 겨우 이방이나 호방을 혼내줘? 에구 쪽팔려. 보는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전은 민중을 지배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민중과 같은 계급에 속한다. 왜 놈이는 힘센 강자에 도전하지 않고 힘없는 아전과 대결하는가? 국회의원 놔두고 보좌관을 혼내주기 있나. 황진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폭싹 망한 것이다.

영화에서 놈이의 활약장면은 없다. 그래놓고 조연급의 대사로만 억지로 ‘장안의 모든 기녀들이 사모하는 호걸’이란다. 웃기고 있어. 영화에 그런 내용의 묘사가 없는뎅?

관군과 싸우는 장면도 소박하고 화적으로 활약하는 장면도 조잡하고 사또와 대결하는 장면도 불쌍하다. 그게 제대로 된 대결이냐?

결정적으로 놈이는 사또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못했다. 대신 황진이가 한바탕 말로 쏘아붙여주기는 했지만.. 그걸로 응수가 되겠나. 봉건시대의 사또라면 황진이의 ‘당신이야말로 진짜 위선자야’ 하는 비난에 눈이나 꿈쩍 하겠는가? 황진이의 도발에 얼굴이 벌겋게 되기는 커녕 코웃음을 흘릴 것이다.

영화에서는

황진이 “사또 당신이야말로 위선자야”
사또 “음메 기죽어!”

실제로는

황진이 “사또 당신이야말로 위선자야”
사또 “푸하하 그래그래! 됐다. 술이나 한 잔 따라라.”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건 너무나 리얼리티가 없다. 순진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위선자라는 폭로에 기죽으면 그게 위선자냐?

조잡한 80년대 홍콩식 액션이 우직한 민중적 리얼리즘이냐? 황진이에는 민중이 없었고 우직함도 없었다. 영웅도 없었고 논두렁깡패만 있었다.

민중을 말하기에는 너무 잡다한 에피소드가 많았고-황진이와 놈이의 러브스토리와 동떨어진- 우직함을 논하기에는 정신없는 볼거리가 황학동 만물상을 연상시켰다. 그것은 마치 술집만 늘어선 인사동 거리를 30분만에 정신없이 둘러보는 듯한 어색함.. 몰입을 방해하는 잡다한 눈요깃거리들.

황진이를 보러 왔는데 뜬금 액션으로 가다가 황당 순정만화로 끝나다니. 황진이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우직하게 밀어붙이지 못한 것이다.

민중의 영웅으로 밀어붙이지도 못했고, 리얼리즘으로 밀어붙이지도 못했고 러브스토리도 팜므파탈도 판타지도 자아실현도 지식인의 위선폭로도 전혀 없었다. 대신 그 모든 것을 조금식 집적거리고 넘어가는 짬봉잡채양장피비빔밥이 있었다.

황진이는 철저하게 실패했다. ‘왕의 남자’가 잘난 왕과 대결한데 비해 놈이는 불쌍한 하층민 아전과 대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폼이 안 나서 망한 것이다.

진정한 민중적 리얼리즘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중의 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짜다. 결을 보여주지 않고 그냥 말로 선언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민중의 결을 보여준다는 것은? 수호지에 잘 드러나듯이 송강, 조개, 임충, 양지 등의 리더급 인물과 유당, 노지심, 이규 등 힘자랑 잘 하는 문제아들이 자기 내부에 스스로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호지는 이규, 노지심, 유당 등 말썽을 일으키는 조와 송강, 양지, 임충, 조개 등 문제를 수습하는 조로 나뉘어져 있다. 민중이 곧잘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국가제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민중이 지식인의 통제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자기 내부에 질서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민중적 리얼리즘이다.

영화 황진이는 진정한 민중적 시선이 없는.. 여전히 먹물 위주의 계몽주의 시선을 버리지 못한..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민중을 가르치려고 드는.. 민중에 대한 편견에 가득찬.. 가짜 민중에 가짜 리얼리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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