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에 대하여 >
/모시는 글/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그대 내면의 부처에게 인사합니다. 여기 하나의 비워둔 자리 있으니 내 마음의 안뜰이랍니다. 저는 그대를 이곳으로 초대하였고 그대는 이렇게 방문하였습니다. 그대를 초대한 뜻은 저 또한 그대의 초대를 받아 그대 내면의 부처를 방문하고 싶어서입니다.
서로는 이렇게 만날 수 있고 대화할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주인이고 그대가 손님입니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그대가 주인이고 제가 손님이어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의 정원은 넓고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마음대로 산책할수 있고 파티라서 흥겨울수도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정원의 일부를 이렇게 비워둡니다. 함께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참! 먼저 와 있는 일행을 잊었군요. 그대에게 소개합니다. 자연의 정원수와 진리의 설계가를 소개합니다. 아하 모든 것의 주인인 신에게도 인사하세요. 저의 정원가꾸기를 도와주시는 분들입니다.
자 이 아름다운 정원에 다섯 사람이 모였습니다. 손님인 그대와 주인인 나 그리고 저를 도와 정원을 가꾸어준 자연과, 법을 가르쳐 준 진리와, 대지를 빌려준 신입니다. 서로는 이렇게 만났습니다. 인사하였으니 이제 대화할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즐거울수 있을 정경입니다.
이곳에서 그대는 자유입니다. 거닐수도 있고 뒹굴을수도 있습니다. 비난할수도 있고 칭찬할수도 있습니다. 잠들수도 있고 쉬어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다음번에는 제가 손님의 자격으로 그대의 정원을 방문할 차례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내게 다섯 친구가 있다. 첫 번째 친구는 <이끄는 사람>인데 신이라 이름한다. 두 번째 친구는 <찾는 사람>인데 진리라 하고, 세째 친구는 <만나는 사람>인데 자연이 되며, 네째 친구 <사귀는 사람>이 바로 그대이다. 마지막 하나는 나 자신이다.
처음 이곳에 이르렀을 때 어둡고 무서웠다. 나는 울었는데 누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누가 우는가 하고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 내가 있었다. 나는 나를 만났고 나와 악수하였다. 문득 밝아지더니 무서움은 사라져버렸다.
무척 즐거웠다. 웃고 소리지르며 마구 뒹굴었다. 그러나 흥겨움은 잠깐이어서 점점 어색해졌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파묻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일일까? 보았으니 아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가족으로 물러서더니 나를 떠나 먼 타인이 되어버렸다.
웃어서 안되고 소리질러도 안되고 뒹굴어서도 안된다. 타인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수줍어하니 그대 <사귀는 사람>들이다. 나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들과 악수하였을 때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마냥 떳떳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자랐고 자랄수록 어려워졌다. 내가 다가가면 그들은 물러났고 그들이 다가오면 내가 힘들어졌다. 나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나의 실수를 그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하나를 사귀면 하나가 적으로 돌아서고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내주어야 했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때 부르는 소리 있으니 <만나는 사람> 곧 자연이었다. 자연과는 쉽게 친구가 되어 밤새도록 대화할수 있었다. 그것은 긴 여행, 내가 어디론가 멀리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었을때는 이미 돌아갈수 없을 만큼 멀어져버렸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아차 너무 멀리 왔다. 길은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다. 길찾아 허둥대며 돌아보니 <찾는 사람> 진리가 길을 가리켜 서 있다. 도무지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일이 우연이었을까? 아니어서 어떤 이끌림을 느꼈으니 누가 나를 이리로 이끌었을까? <이끄는 사람> 신이다.
내 마음의 뜰에 다섯 친구가 모이었다. 서로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그것이 인생, 우리는 대화할수 있으니 얼마든지 즐거우리라. 웃고 노래해도 좋다. 흥겨우면 춤추고 신나면 뒹굴으라. 사랑이거든 행복이리라.
나는 선생이 아니고 그대는 학생이 아니다. 나 가르치지 않으니 그대는 배우려 들지 말라. 비교하지도 말고 차별하지도 말라. 다만 마음껏 누리고 흥겨워하라. 그러나 그대 약간은 긴장하여도 좋으리라. 다음번에는 내가 그대 마음의 안뜰을 방문할 차례이니까.
/내면의 부처에게 인사하자/
누구나 자기안의 부처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하늘이고 땅이다. 신천지요 신대륙이다. 다가갈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대화할수 있으며 아름답게 가꿀수도 있다. 대자의 세계가 아닌 즉자의 세계, 영의 세계에서 상승과 초극을 체험하자.
우리 내면의 부처로 여행을 떠나자. 다섯 친구 만나려 모험여행을 나서보자. 내 마음의 안뜰에서 하늘이 새로 열리고 땅이 새로이 솟아난다. 거기 모험이 있고 낭만이 있으니 또한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명상이라는 이름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수행이라는 이름의 대화와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는 하나다. 나는 깨달았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뜻이다.
나의 친구들을 그대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친구를 얻었듯이 그대도 얻을수 있다. 내가 내안의 부처를 가꾸었듯이 그대도 가꿀수 있다. 내가 깨달았듯이 그대도 깨달을수 있다. 그것은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더욱 진전된 관계에 지나지 않느니 누구나 이를수 있다.
아하 오해하지는 말라. 내 깨달아서 그대보다 더 높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먼저 이렇게 그대를 초대할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 또한 그대 안의 부처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이다. 모두가 부처가 아니라면 아무도 부처가 아닌 법이니까.
예로부터 많은 현자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속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왜 명상을 하는지, 도무지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지, 거기 어떤 이익이 있다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 말한다. 명상은 자기 내면의 부처를 가꾸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아와 사회, 자연, 진리, 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과학가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스포츠맨은 신기록을 달성하며 음악가는 신곡을 발표한다. 명상가는 무엇을 하는가?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는 법, 이 사회와 참된 우정을 나누는 법, 자연과 일체가 되는 법, 진리와 소통하는 법, 신과 대화하는 법, 그 모든 것과 가장 친한 사람이 되는 법을 끝없이 만들어간다.
/세상에 보내는 메세지/
산이 크면 골도 깊은 법이다. 으례히 큰 폭포와 높은 절벽이 하나쯤 있고 또 오래된 전설과 조용한 암자도 두어개씩은 있다. 그런 것들이 갖추어 있음으로 해서 산은 더욱 산답게 보이는 것이다.
지구라 불리는 행성에 석가와 예수라 일컬어지는 성자가 있어 지구가 더욱 지구다와진다면 좋은 일이다. 어떤 현자가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여 대중을 옳게 인도하였기로 평가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가 옳은지 석가가 옳은가를 논쟁하지 말자. 그들이 존재했기로 우리 마음은 더 풍요해지고 지구는 더 빛나는 별이 된 것 아닌가?
세상에는 순수와 진실로 보석처럼 빛나는 영혼들이 우리네 생각보다 더 많이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늘 하는 이야기들은 "세상은 요지경" 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타락을 변호하기 위하여 속속들이 파헤쳐 남의 약점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편에서 더 많은 순수와 진실을 찾아내고자 한다.
수락산 도사는 8년 째 토굴에 칩거하고 있다. 그가 특별한 문파를 연 것은 아니지만 그가 존재하므로서 수락산은 더욱 큰 산이 되었다. 여기 한 사람 있어 순수의 극한, 진실의 극한, 삶의 극한, 깨달음의 극한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가 이 세상을 옳게 인도하고 말고를 떠나 그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더 풍요로운 별이 될 것이다.
소년시절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른 이상형의 여인이 있을까 생각했다. 첫 번째 절망은 그런 사람 없다는 깨침이었다. 두 번째 절망은 있다해도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세 번째 절망은 있지만 세상은 결코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네 번째 절망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내곁에 머무르다 떠나갔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상형의 여인은 존재한다. 내가 다가갈 때 그 이상은 깨어진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세상은 더 빛나는 별이 되고 나는 얼마든지 행복할수 있다. 그대는 석가가 옳은지 예수가 옳은지 논쟁하려는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나 말하련다. 그른 것을 그르다 하고 바른 것을 바르다 하련다. 그러나 이어가는 대화일 뿐이다. 이 세상에 대해 전하려는 메세지는 그것이 아니다. 부처는 존재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그가 존재하므로서 세상이 더욱 세상다와진다.
/명상적 보편주의 원칙/
참된 것은 몇몇사람이 아닌 세상전체와 상대하는 법이다. 명상가들은 봉건적 도제식 전수방법으로 깨달음을 전하려 한다. 삿된 길이다. 나는 보편주의원칙을 고수한다.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20세기를 지배해온 사상은 과학지향적 합리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계몽주의 혹은 물질주의가 20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정신사적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과학지향적 사고방식과 과학지향적 인식체계와 생활태도를 지켜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북한사람이나 혹은 정글족 원주민들과 대화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뭔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벽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기자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과학지향적, 물질지향적 사고체계로 모든 현상을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가 과지향학적 인식체계와 생활태도를 어느날 문득 깨달아 터득한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중독되어온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바꾸려 한다.
이제 우리는 명상적 인식체계와 명상적 생활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는 간단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하면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어떤 문제를 문제삼지 않으므로서 해소하겠다는 <안해도된다>는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다.
우리는 자녀교육이나 일상생활이나 정치나 경제나 사교나 그 모든 면에서 명상적 인식패턴과 가치기준과 생활양식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은 거대한 전복이며 진정한 혁명이다. 나는 몇몇 사람을 깨닫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를 상대로 과학의 세기를 종식하고 정신의 세기로 전복하겠다는 것이다.
명상에 대해서 말하면 아직도 문득 깨달아 부처나 초인이 되겠다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봉건적 도제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먼저 과학적 합리주의부터 배우고 그 다음에 비로소 명상적 보편주의를 배울수 있다.
나는 사람들을 직업적명상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앞서 세상의 변화를 눈치채게 하고 거기에 누구보다 먼저 적응하게 하려할 뿐이다. 과학은 하나의 끌이다. 끌로 쪼아서 필요한 것을 만들어낸다. 명상은 하나의 그릇이다. 모든 것을 담아버린다.
/모시는 글/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그대 내면의 부처에게 인사합니다. 여기 하나의 비워둔 자리 있으니 내 마음의 안뜰이랍니다. 저는 그대를 이곳으로 초대하였고 그대는 이렇게 방문하였습니다. 그대를 초대한 뜻은 저 또한 그대의 초대를 받아 그대 내면의 부처를 방문하고 싶어서입니다.
서로는 이렇게 만날 수 있고 대화할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주인이고 그대가 손님입니다. 그러나 다음번에는 그대가 주인이고 제가 손님이어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의 정원은 넓고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마음대로 산책할수 있고 파티라서 흥겨울수도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정원의 일부를 이렇게 비워둡니다. 함께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참! 먼저 와 있는 일행을 잊었군요. 그대에게 소개합니다. 자연의 정원수와 진리의 설계가를 소개합니다. 아하 모든 것의 주인인 신에게도 인사하세요. 저의 정원가꾸기를 도와주시는 분들입니다.
자 이 아름다운 정원에 다섯 사람이 모였습니다. 손님인 그대와 주인인 나 그리고 저를 도와 정원을 가꾸어준 자연과, 법을 가르쳐 준 진리와, 대지를 빌려준 신입니다. 서로는 이렇게 만났습니다. 인사하였으니 이제 대화할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즐거울수 있을 정경입니다.
이곳에서 그대는 자유입니다. 거닐수도 있고 뒹굴을수도 있습니다. 비난할수도 있고 칭찬할수도 있습니다. 잠들수도 있고 쉬어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다음번에는 제가 손님의 자격으로 그대의 정원을 방문할 차례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내게 다섯 친구가 있다. 첫 번째 친구는 <이끄는 사람>인데 신이라 이름한다. 두 번째 친구는 <찾는 사람>인데 진리라 하고, 세째 친구는 <만나는 사람>인데 자연이 되며, 네째 친구 <사귀는 사람>이 바로 그대이다. 마지막 하나는 나 자신이다.
처음 이곳에 이르렀을 때 어둡고 무서웠다. 나는 울었는데 누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누가 우는가 하고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 내가 있었다. 나는 나를 만났고 나와 악수하였다. 문득 밝아지더니 무서움은 사라져버렸다.
무척 즐거웠다. 웃고 소리지르며 마구 뒹굴었다. 그러나 흥겨움은 잠깐이어서 점점 어색해졌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파묻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일일까? 보았으니 아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가족으로 물러서더니 나를 떠나 먼 타인이 되어버렸다.
웃어서 안되고 소리질러도 안되고 뒹굴어서도 안된다. 타인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수줍어하니 그대 <사귀는 사람>들이다. 나 용기를 내어 다가갔다. 그들과 악수하였을 때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마냥 떳떳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자랐고 자랄수록 어려워졌다. 내가 다가가면 그들은 물러났고 그들이 다가오면 내가 힘들어졌다. 나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었고 나의 실수를 그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하나를 사귀면 하나가 적으로 돌아서고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내주어야 했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해졌다. 모두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때 부르는 소리 있으니 <만나는 사람> 곧 자연이었다. 자연과는 쉽게 친구가 되어 밤새도록 대화할수 있었다. 그것은 긴 여행, 내가 어디론가 멀리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었을때는 이미 돌아갈수 없을 만큼 멀어져버렸다.
이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아차 너무 멀리 왔다. 길은 아득하여 보이지 않는다. 길찾아 허둥대며 돌아보니 <찾는 사람> 진리가 길을 가리켜 서 있다. 도무지 그동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일이 우연이었을까? 아니어서 어떤 이끌림을 느꼈으니 누가 나를 이리로 이끌었을까? <이끄는 사람> 신이다.
내 마음의 뜰에 다섯 친구가 모이었다. 서로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니 그것이 인생, 우리는 대화할수 있으니 얼마든지 즐거우리라. 웃고 노래해도 좋다. 흥겨우면 춤추고 신나면 뒹굴으라. 사랑이거든 행복이리라.
나는 선생이 아니고 그대는 학생이 아니다. 나 가르치지 않으니 그대는 배우려 들지 말라. 비교하지도 말고 차별하지도 말라. 다만 마음껏 누리고 흥겨워하라. 그러나 그대 약간은 긴장하여도 좋으리라. 다음번에는 내가 그대 마음의 안뜰을 방문할 차례이니까.
/내면의 부처에게 인사하자/
누구나 자기안의 부처를 가지고 있다. 하나의 하늘이고 땅이다. 신천지요 신대륙이다. 다가갈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대화할수 있으며 아름답게 가꿀수도 있다. 대자의 세계가 아닌 즉자의 세계, 영의 세계에서 상승과 초극을 체험하자.
우리 내면의 부처로 여행을 떠나자. 다섯 친구 만나려 모험여행을 나서보자. 내 마음의 안뜰에서 하늘이 새로 열리고 땅이 새로이 솟아난다. 거기 모험이 있고 낭만이 있으니 또한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나는 명상이라는 이름의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수행이라는 이름의 대화와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는 하나다. 나는 깨달았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나만의 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뜻이다.
나의 친구들을 그대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친구를 얻었듯이 그대도 얻을수 있다. 내가 내안의 부처를 가꾸었듯이 그대도 가꿀수 있다. 내가 깨달았듯이 그대도 깨달을수 있다. 그것은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더욱 진전된 관계에 지나지 않느니 누구나 이를수 있다.
아하 오해하지는 말라. 내 깨달아서 그대보다 더 높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먼저 이렇게 그대를 초대할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대단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 또한 그대 안의 부처를 방문하고 싶다는 뜻이다. 모두가 부처가 아니라면 아무도 부처가 아닌 법이니까.
예로부터 많은 현자들이 있었으나 누구도 속시원하게 말해주지 않았다. 왜 명상을 하는지, 도무지 무엇을 깨달았다는 말인지, 거기 어떤 이익이 있다는 것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이제 말한다. 명상은 자기 내면의 부처를 가꾸는 것이며 그리하여 자아와 사회, 자연, 진리, 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과학가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스포츠맨은 신기록을 달성하며 음악가는 신곡을 발표한다. 명상가는 무엇을 하는가? 자기 자신과 친구가 되는 법, 이 사회와 참된 우정을 나누는 법, 자연과 일체가 되는 법, 진리와 소통하는 법, 신과 대화하는 법, 그 모든 것과 가장 친한 사람이 되는 법을 끝없이 만들어간다.
/세상에 보내는 메세지/
산이 크면 골도 깊은 법이다. 으례히 큰 폭포와 높은 절벽이 하나쯤 있고 또 오래된 전설과 조용한 암자도 두어개씩은 있다. 그런 것들이 갖추어 있음으로 해서 산은 더욱 산답게 보이는 것이다.
지구라 불리는 행성에 석가와 예수라 일컬어지는 성자가 있어 지구가 더욱 지구다와진다면 좋은 일이다. 어떤 현자가 어떤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여 대중을 옳게 인도하였기로 평가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가 옳은지 석가가 옳은가를 논쟁하지 말자. 그들이 존재했기로 우리 마음은 더 풍요해지고 지구는 더 빛나는 별이 된 것 아닌가?
세상에는 순수와 진실로 보석처럼 빛나는 영혼들이 우리네 생각보다 더 많이 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늘 하는 이야기들은 "세상은 요지경" 이다. 그들은 자기네의 타락을 변호하기 위하여 속속들이 파헤쳐 남의 약점을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편에서 더 많은 순수와 진실을 찾아내고자 한다.
수락산 도사는 8년 째 토굴에 칩거하고 있다. 그가 특별한 문파를 연 것은 아니지만 그가 존재하므로서 수락산은 더욱 큰 산이 되었다. 여기 한 사람 있어 순수의 극한, 진실의 극한, 삶의 극한, 깨달음의 극한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가 이 세상을 옳게 인도하고 말고를 떠나 그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더 풍요로운 별이 될 것이다.
소년시절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른 이상형의 여인이 있을까 생각했다. 첫 번째 절망은 그런 사람 없다는 깨침이었다. 두 번째 절망은 있다해도 내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세 번째 절망은 있지만 세상은 결코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네 번째 절망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내곁에 머무르다 떠나갔다는 깨달음이었다.
이상형의 여인은 존재한다. 내가 다가갈 때 그 이상은 깨어진다. 그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세상은 더 빛나는 별이 되고 나는 얼마든지 행복할수 있다. 그대는 석가가 옳은지 예수가 옳은지 논쟁하려는가?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나 말하련다. 그른 것을 그르다 하고 바른 것을 바르다 하련다. 그러나 이어가는 대화일 뿐이다. 이 세상에 대해 전하려는 메세지는 그것이 아니다. 부처는 존재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다. 그가 존재하므로서 세상이 더욱 세상다와진다.
/명상적 보편주의 원칙/
참된 것은 몇몇사람이 아닌 세상전체와 상대하는 법이다. 명상가들은 봉건적 도제식 전수방법으로 깨달음을 전하려 한다. 삿된 길이다. 나는 보편주의원칙을 고수한다. 모든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20세기를 지배해온 사상은 과학지향적 합리주의이다. 마르크스주의나 자본주의를 막론하고 계몽주의 혹은 물질주의가 20세기의 가장 두드러진 정신사적 특징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과학지향적 사고방식과 과학지향적 인식체계와 생활태도를 지켜가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북한사람이나 혹은 정글족 원주민들과 대화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뭔가 대화가 통하지 않고 벽같은 것이 느껴진다. 자기자신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과학지향적, 물질지향적 사고체계로 모든 현상을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우리가 과지향학적 인식체계와 생활태도를 어느날 문득 깨달아 터득한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중독되어온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바꾸려 한다.
이제 우리는 명상적 인식체계와 명상적 생활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는 간단히 어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하면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어떤 문제를 문제삼지 않으므로서 해소하겠다는 <안해도된다>는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이다.
우리는 자녀교육이나 일상생활이나 정치나 경제나 사교나 그 모든 면에서 명상적 인식패턴과 가치기준과 생활양식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은 거대한 전복이며 진정한 혁명이다. 나는 몇몇 사람을 깨닫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를 상대로 과학의 세기를 종식하고 정신의 세기로 전복하겠다는 것이다.
명상에 대해서 말하면 아직도 문득 깨달아 부처나 초인이 되겠다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봉건적 도제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먼저 과학적 합리주의부터 배우고 그 다음에 비로소 명상적 보편주의를 배울수 있다.
나는 사람들을 직업적명상가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앞서 세상의 변화를 눈치채게 하고 거기에 누구보다 먼저 적응하게 하려할 뿐이다. 과학은 하나의 끌이다. 끌로 쪼아서 필요한 것을 만들어낸다. 명상은 하나의 그릇이다. 모든 것을 담아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