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read 4462 vote 0 2002.09.09 (15:05:36)

정신차렷


[정신차렷-재정렬의 명상법]

冥想의 일반적 의미는 고도의 집중상태에서의 깊은 사색이다. 국어사전에는 '고요히 눈을 감고 생각함'으로 나와 있다. 정신에는 의식이 흐르는 일정한 경로가 있으므로 적절한 방법론을 따르고서야 깊은 사색이 가능하다. 더욱 깨달은 이는 순간적으로 직관할수 있어 눈감을 필요도 없다.

재정렬의 명상법은 정신의 심층구조를 파악하므로서 자기정신에서 의식의 흐름을 관조하고 언제든지 마음의 동작그만-정신의 재정렬을 통하여 정보처리의 1사이클을 새로이 시작하므로서 최고도의 정신적 고조상태에서 순간적으로 깨닫고 순간적으로 삼매의 경지에 드는 방법이다.

기존의 명상법들은 정신집중에 대한 방법론이다. 그러나 집중하기 어렵다. 의식의 항상성과 의식의 유동성에 의해 마음은 끝없이 어딘가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집중하기 앞서 정신차렷 해야하고 그에 앞서 마음의 동작그만 해야한다. 이 순서를 지킬 때 바로 깨닫고 바로 삼매의 경지에 들게된다.

정신의 재정렬 순서 - (동작그만->차렷->경례->열중셔->편히쉬어)

재정렬의 명상법은 넓은 운동장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군중들을 한번의 구령으로 질서를 잡는 것과 같다. 정신은 거대한 바다와 같고 의식은 제멋대로 뛰어노는 아이들과 같다. 순서에 맞는 구령을 불러주어야 한다.

[귀납과 연역]

깨달은 사람은 직관력과 창의력을 사용하여 연역적 사고를 한다. 일반적인 귀납적사고와 다르다. 먼저 내부적인 사전정보를 가지고 있어 사전에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문제를 맞추어보고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방법으로 생각을 진행한다.

귀납적사고는 내부정보 없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어떤 단서를 통해 문제를 발견하고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반복하며 확률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명상가는 이와 달리 언제나 사전에 정답을 정해놓고 있다.

이를 그림조각 퍼즐맞추기에 비유하면 귀납적 접근은 먼저 하나의 퍼즐조각을 들고 아무거나 거기에 맞는 부분을 우연히 찾아내며 이를 점차 넓혀가서 언젠가는 전체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연역적접근은 먼저 전체 퍼즐그림을 사전에 알고 우선으로 퍼즐판을 확보하고 그림순서대로 맞추어나가는 것이다.

귀납적접근 : 부분 -> 전체 ※ 점점 넓혀간다.
연역적접근 : 전체 -> 부분 ※ 점점 좁혀간다.

정신집중에 앞서 정신차렷이 필요한 것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지향하기 때문이다. 정신차렷은 정신환경 전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동작그만의 구령에서 들고있던 퍼즐조각을 놓고 정신차렷의 구령에서 먼저 퍼즐그림 전체를 확인한다. 맞추기는 그 다음이다. 정신집중은 하나하나 맞추어가는 과정이며 정신차렷은 가진 것을 놓아버리고 퍼즐그림 전체를 보는 것이다.

퍼즐그림이 코끼리라면 귀납은 흩어진 퍼즐조각을 다 맞추고서야 코끼리인지 안다. 연역은 처음부터 코끼리임을 알아 코끼리머리부터 맞추기 시작한다. 명상가는 언제나 연역한다.

[정신집중과 정신차렷]

[차렷]하고 구령을 부르면 하던 동작을 멈추고 연단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만 연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伍와 列을 바로 맞추어야 한다. 伍와 列은 대오 전체이다. 전체를 먼저 맞추고 다음 자기를 바로한다.

整列-정신집중이 아닌 정신차렷은 단서가 되는 대상을 두고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끊고 대상과 나, 그 사이에서 伍와 列을 보는 것이다.

장인이 열심히 공예품을 제조할 때에는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판매원이 손님을 맞을 때는 정신차렷. 피아니스트가 열심히 연주할 때에는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주를 마치고 객석의 환호에 답할 때에는 정신차렷. 운전사가 핸들을 조작할 때에는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그러나 전방을 주시하고 보행자를 살필 때에는 정신차렷.

명상에는 정신집중도 정신차렷도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명상법들은 정신집중을 강조한 나머지 정신차렷을 잊었다. 정신차렷을 하지 않으면 정신집중 할수 없다. 한번 정신차림이 열번 정신집중보다 낫다.

정신집중을 강조하는 명상법들은 먼저 정신차렷 하지 않으므로 집중되지 않고 억지로 집중하기 위해 특별한 자세, 특별한 호흡법, 특별한 음악, 특별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거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한다. 참되지 않다.

인간정신에는 본능의 방어기제가 있어 외부의 어떤 대상이 개입하면 무의식적으로 심리적 차단선을 치고 마음의 저항을 하게 되는데 이를 깨닫지 못하므로 먼저 이를 타파하지 않고 따라서 어색함, 거북함이 느껴지며 어를 희석하기 위해 특별한 분위기나 장소, 호흡법 따위를 고안해내는데 헛되다.

동작그만은 임제의 할이나 덕산의 방처럼 이를 이러한 심리적 차단선을 일순간에 깨부셔버리기며 정신차렷은 그러한 상태에서 정신환경 전반을 일시장악하는 것이다. 먼저 놓아버려야 하고 다음 전체를 장악해야 한다. 집중은 저절로 된다.

[명상에서 의식의 흐름]

명상에서 정신의 재정렬은 (동작그만-차렷-경례-열중셔-편히쉬어)의 순서로 진행된다. 여기서 출발점과 귀결점을 혼동하지 않으려면 정교한 접근이 필요하다.

정신차렷 <----- -----> 정신집중
< 동작그만 - 차렷 - 경례 - 열중셔 - 편히쉬어 >
마음비우기, 대상의 포착, 대상과 맞서기, 대상에 집중, 대상에 몰입

혹자는 무아의 경지에서 고도의 몰입상태를 깨달음으로 잘못 아는데 이는 위험하다. 이때 연역이 아닌 귀납하고 있기 십상이다. 귀납의 몰입은 정신차린 것이 아니라 정신나간 것이다.

의식은 가만있지 않고 끝없이 흐른다. 명상하기 위해 정신의 재정렬을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차렷에서 집중으로, 몰입으로 빠져드는데 차렷을 거친 몰입과 차렷하지 않은 산만한 상태에서의 몰입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정신이상자는 늘 무아의 상태에 빠져있다. 마약이나 술에 취한 상태, 극도의 흥분상태, 어딘가에 홀린 상태에서의 엑스터시의 몰입은 거짓된 것이다. 얼빠진 것과 얼차린 것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정신차렷은 마음의 부동자세이다. 그러나 그 상태로 가만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장악하고 대상을 포착하고 대상에 집중하고 몰입한다. 단계를 바꾸어가며 정신의 대상에 대한 침투이입의 정도는 증가한다.

명상은 자기가 자기마음을 읽는 것이어서 몰입하면서도 자신이 몰입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자기자신의 100프로를 완전히 확보하고 장악한 상태에서의 몰입이며 이는 그 전단계를 차례대로 거친 경우이다. 이 순서를 지키지 않아 차렷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몰입은 정신나간 것이며 명상이 아니다.

[無我의 경지]

무아의 경지를 곧 깨달음으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얼마든지 착각할수 있다. 정신이상자의 자아상실도 無我이며 엑스터시의 신체적 고조상태도 無我이며 명상에서 동작그만도 無我이며 편히쉬어도 無我이나 이는 전혀 다른 것이다.

명상에서 무아는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의해 100프로 장악되는 것이며 그것은 一如의 경지이다. 자기정신과 우주정신이 梵我一如의 하나로 소통하는 것이어서 자아상실의 무아와 다르며 엑스터시의 신체적 고조상태와 깨달음의 영적 고조상태에서 느껴지는 법열은 전혀 다른 것이다.

동작그만에서 無我는 정신의 자기가 마음의 자기를 관찰하는 즉 관측자로서의 자기는 있고 피측자로서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이다. 자기에서 자아를 분리하여 자기객관화 상태에서의 무아이다. 정신은 있고 마음은 없다.

정신차렷에서의 無我는 자아를 정신에 종속시킨다. 이때의 무아는 정신도 있고 마음도 있되 마음은 정신 안에 정렬해 있다. 정신에 의해 장악된 마음이다. 자기가 자기를 관찰하되 관찰되는 나가 관찰되는 나에 종속되어 있다.

경례에서의 무아는 범아일여의 하나로 있다. 관찰자로서의 정신의 나와 피측자로서의 마음의 나는 50 대 50으로 맞서되 어느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부동자세로서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상태이다.

열중셔에서 무아는 관측되는 자아가 관측하는 자아의 영역한도 내에서 해방되어 있다. 마음이 자유로이 활동하되 정신이 정해놓은 경계선 안에서만 움직이므로 전혀 방해받지 않는 것이다. 고도의 정신집중은 이 상태에서 시작된다.

편히쉬어에서 무아는 관측하는 자아와 관측되는 자아가 하나의 리듬에 맞추어 같이 춤추므로 둘 다 움직이되 전혀 마찰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평상심에 가깝다. 그러나 산만한 상태에서의 평상적인 정신상태와는 다르다.

관측하는 자기를 신으로 볼 때 동작그만은 신 앞에서의 완전항복으로 무장해제이며 정신차렷은 자기가 인정되대 신에게 사로잡힌 상황이며 경례는 신과 1대 1로 맞서 기울지 않는 것이며 열중셔에서는 신이 지켜보는 시야 안에서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며 편히쉬어는 신과 내가 하나가 되어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정보처리) (자기객관화) (범아일여)
동작그만-마음비우기 -정신은 있고 마음은 없다.-신은 있고 나는 없다.
차렷 -대상의 포착 -마음은 정신안에 있다.-나는 신 안에 있다.
경례 -대상과 맞서기-정신과 마음은 대등하다.-나는 신과 일대일이다.
열중셔 -대상에 집중 -정신은 지키고 마음은 활동.-신 안에서 자유롭다.
편히쉬어-대상에 몰입-정신과 마음이 같이 활동.-신과 나는 같이 움직인다.

나라고 할 때의 나는 마음의 나이다. 무아의 경지는 마음이 정신에 제어되는 즉 마음을 마음대로 할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이 산만한 상태나 무언가에 홀린상태, 신체적 엑스터시상태에서의 느낌은 저급한 것으로서 이를 깨달음으로 착각해서 안된다. 삿된 명상법에서 흔히 극도의 흥분이나 신체적 고조상태를 무아의 경지로 강변하곤 한다.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마음대로 제어된다. 마음의 규율자인 정신과 자유의지로서의 마음이 호흡을 맞추어 혼연일체의 하나가 된다. 또한 진리의 보편성에 기초하여 신과 인간, 진리와 인간, 자연과 인간, 사회와 개인의 하나됨으로 확대된다. 무아는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므로서 마찰하지 않는 것이다.

명상은 다섯가지 하나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나와 하나됨, 곧 정신과 마음의 하나됨으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와, 자연과, 진리와, 신과 하나될수 있다. 또한 대화할수 있다. 친구가 될 수 있다. 명상은 하나되기 위하여 인사하는 것이며 수행은 하나되어 대화하는 것이며 무아의 경지는 하나되어 춤추는 것이다.

내면의 호흡에 귀기울이라. 우주의 호흡에 귀기울이라. 그 울림과 떨림을 읽을수 있게 되거든 춤출수 있다. 정신차렷 하여서만 내면의 호흡과 우주의 호흡리듬이 느껴진다. 둘은 일치할수 있다. 비로소 춤출수 있다.

[정신차렷을 위한 잠언]

명상의 요체는 귀납이 아닌 연역적사고를 하는데 있다. 귀납은 마음이 먼저 외부단서를 포착하고 그 단서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이다. 마음은 늘 단서의 뒤를 따라다닌다. 마음이 정신의 경계를 벗어나니 홀린것이고 얼빠진 것이다.

여러가지 명상법들이 있다. 모든 명상법의 공통점은 외부단서를 끊어버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는 것이나 노자가 무위를 강조하는 것이나 불가에서 無나 空을 말하는 것이나 선가에서 화두를 들고 禪하는 것이나 공통점은 마음의 동작그만이다.

1) 동작그만
우리는 의식의 항상성에 의해 항상 무언가를 하고있다는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동작그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현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오래전에 죽었다' '나는 나의 그림자이다' '나는 없다' '넌 누구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 이런 마음이다.

동작그만 상태에서 의식의 흐름은 멈추어지고 정신은 피드백하여 정보처리 1사이클의 출발점인 오성의 각성상태로 돌아간다. 그 상황에서 정신환경은 하부구조를 백프로 장악한다. 정신차렷이다.

2) 정신차렷
마음의 정신차렷은 정신의 재정렬이다. 이때 정신은 자기 내부를 관조하며 伍와 列을 맞추어야 한다. 마음은 단 하나의 대상을 포착하며 그것은 상황전체이어야 한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나, 하나의 우주전체, 하나의 신, 총체적 상황만 의식에 남기고 나머지 구체화된 모든 것의 뒤로 물러선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방금 어떤 일을 저지른거야?'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거지?' '왜 하필이면 바로 이 자리에서인가?'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왜 하필이면 바로 내게인가?' '어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이런 마음이다.

자기가 개입한 상황의 뒤로 한발짝 물러나 상황전체를 본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보고 위상관계를 본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흐름을 보고 좌중을 한바퀴 둘러본다. 주제파악이며 분위기파악이다.

3) 마음의 경례
마음의 경례는 신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다. 정신과 마음이 일대 일로 맞서 균형을 유지한다. 순간 완전히 호흡을 정지한다. 절대의 靜寂과 절대적 긴장상태, 모든 것이 스톱된 상태, 시간과 공간이 정지한 상태에 이른다. 이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다. 이 상황을 오래 끌 필요는 없다.

'어랍쇼 이건 또 머야?' '어쭈구리 한번 해보겠다는거야?' '하느님 안녕하세요' '하하 바로 너였구나'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지금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한다' '그래 어디 한번 덤벼 봐' 이런 마음이다.

4) 마음의 열중셔
이때부터 마음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신이 지켜보며 자기마음을 읽고 있는 가운데 비로소 숨을 쉰다. 동작그만이나 차렷, 경례 상황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고 호흡을 멈추게 되는데 여기서부터는 힘을 빼고 숨을 쉬게 된다.

정신차렸으니 이제 정신집중이다. 마음이 설레고 흥분이 느껴진다. 이미 마음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의 잠언은 없다. 마음은 움직이고 있지만 정신은 칼날같은 경계상태를 유지하며 자기마음을 지속적으로 읽고 있다.

5) 마음의 편히쉬어
이때 마음은 대상에 완전히 몰입한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차리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외부에서 변동상황이 발생하면 무의식상태에서 조건반사로 대응한다.

능숙한 운전기사는 몰입상태에서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 잊고있지만 외부에서 어떤 이상이 발견되면 조건반사로 대응한다는 점에서 정신나간 것과 다르다. 산만한 상태에서의 몰입은 조건반사가 안된다.

무의식 상태에서 조건반사가 되는 경지에 이르면 마음은 평상심으로 되어 콧노래가 절로 나오며 마음이 춤을 춘다. 그러나 외부의 상황변동에는 언제든 조건반사로 대처하므로 걱정할 필요없다.

[참된 무아의 경지]

어린아기의 넋나간 몰입상태와 유능한 연기자의 신들린 연기는 다르다. 정신차리지 못한 아기의 몰입상태에서 외부상황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정신차리는 코스를 거친 몰입상태에서는 정신이 경계를 서기 때문에 상황의 변화에는 반사적으로 대응할수 있다. 이때 완전해지는 것이다.

신들린연기와 넋빠진 상태는 외견상 비슷하지만 애드립이 되는가에 차이가 있다. 참된 경지는 몰입하고 있으면서도 각성되어 있어 외부상황의 변화에 조건반사적으로 임기응변한다. 애드립이 된다. 넋빠진 몰입은 애드립이 불가능하다.

스포츠든 예술이든 장인의 작업이든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평상심의 아무 생각없는 상태가 된다. 얼빠진 것과 비슷해보이지만 실은 180도로 다르다. 정신은 그 상황에서도 자기행동의 100프로를 관리한다.

정신과 마음이 완전히 호흡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몰입해 있으면서도 외부충격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는다. 외부에서 자극을 가해서 깜짝 놀란다면 얼빠진 것이며 전혀 놀라지 않는다면 그는 참된 경지에 든 것이다.

삿된 명상법들은 특정장소나 신비한 분위기, 이상한 자세, 억지호흡으로 몰입을 유도하려 한다. 이때 정신에 명령된 외부의 단서들이 마음을 끌고가기 때문에 정신은 마음을 관리하지 못하며 따라서 무의식은 의식을 보호하지 못한다.

신체적고조를 정신적고조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삿된 명상의 몰입은 마음이 외부단서를 따라간 것이며 삿된 명상법들이 제시하는 여러가지 특이한 환경조성들은 그 단서가 된다. 이때 느껴지는 엑스터시나 전율감들은 정신적 고조가 아닌 신체적긴장에서 유발된 아드레날린과다 근육경직현상일 뿐이다.

[양치기 목동의 비유]

정신과 마음의 관계는 곧 양치기목동과 길잃은 양에 비유될수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 사회와 개인의 관계, 역사와 실천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해방을 꿈꾸고 정신은 마음을 지배한다. 둘은 하나되어 춤출수 있다.

심우도는 사찰에 벽화로 그려져 있다. 소를 찾는 아이는 정신이고 소는 마음이다. 아이는 소를 찾아야 하지만 소를 구속해서는 안된다. 되려 소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소를 잃어버려서도 안된다.
동작그만은 목동이 붙잡고 있던 황소의 고삐를 놓아버리는 것이다. 정신차렷은 고삐를 놓고 한걸음 뒤로 물러나 소 전체를 똑바로 보는 것이다. 경례는 소와 목동이 대등한 관계로 다시 만나기다. 열중셔는 소를 풀어주고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다. 편히쉬어는 소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고 조심스레 따라가면서 늑대의 침입을 감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고삐를 잡고 있었다. 고삐는 가짜이니 놓아버리라. 소는 움직이므로 언제까지 잡고 있을수 없다. 고삐를 잡고 있을 때는 소의 전체를 몰라도 된다. 고삐를 놓아버렸으므로 목동은 자기 소의 생김새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정신차렷-재정렬의 명상법은 소에게 자유를 주고도 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소와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우리는 외부의 단서에 현혹된다. 그것은 소의 고삐다. 우리는 소를 잡고 있다고 믿지만 고삐에 매인 소는 진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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