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란
【 진정한 믿음 】


교통사고다. 승용차가 불타고 있는데 운전자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십여 명의 행인이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막 불길에 휩싸이려 하는 운전자를 구하려 뛰어들지 아니한다.

이때 의리의 사나이 돌쇠 등장한다.

『아아 이땅에 진정한 의인은 없는가? 왜 아무도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하려 들지 않는가 저깟 불길이 뭐가 무섭단 말인가?』

하고 뛰어들려는 찰나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비겁자 일리야 없다. 뭔가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다들 무엇을 기다리는지 일단 한걸음 뒤로 물러나서 팔짱끼고 지켜보기로 하자.』

그 사이에 삼십여 초가 그냥 지나가더니 『꽝 ~*!』 하고 자동차는 폭발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운전자를 구하느라 달려든다. 다들 자동차의 폭발을 겁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불행을 모른채 할 비겁자들은 아니었지만.

돌쇠가 지켜보고 있은 30초라면 운전자를 세 번이나 구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러나 아무도 구하지 않았다. 물론 누구도 그 자동차가 언제 폭발할지는 알지 못한다. 자동차는 영영 폭발하지 않을 수도 있고 1초 만에 폭발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대가 그러한 상황을 만났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위험을 무릅쓰고 구하겠는가? 아니면 현명하게 자동차의 폭발을 기다려야 하는가?

위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 쯤은 이런 경우를 당할 것이다. TV에 흔히 나오는 이야기다. 많은 행인들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아무도 구하려 들지 않은 냉혹한 세태를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심리는 그렇다. 아무도 뛰어들지 않으니까 혹 무슨 중대한 무슨 이유가 있나 싶어서 지레 겁먹고 못 덤비는 것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용감하게 나서주면 모두들 뛰어드는 것이 소심한 우리 이웃들이다.

생각하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같이 익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현명하게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도록』 침착해야 하는가 아니면 의협을 발휘하여 내 몸을 돌보지 않고 구조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구조해야 한다. 나의 정답은 그렇다. 그대 진리를 믿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 필요한 것도 믿음이다.

미국에서 특히 이런 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있다. 원체 위험투성이 나라여서 그런지 몰라도 의인을 영웅시 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월간 리더스 다이제스트나 긴급출동 911이 그렇다. 잡지나 TV드라마는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 이르기까지 이런 경우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근래 본 것으로 『크림슨 타이드』와 『랜섬』을 들 수 있다. 크림슨 타이드에서는 가상의 핵전쟁을 그리고 있다. 러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반군이 핵기지를 점령하여 정부군이 공격할 경우 미국을 선제 핵공격을 하겠다고 위혐한다. 미국 핵잠수함이 반군을 공격하기 위해 캄챠카반도로 출동하고 교전이 벌어진다. 사령부에서 핵을 발사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상태에서 사령부와 교신이 두절된다.

수심 500미터의 바닷속에서 함장과 부함장의 미묘한 대결이 시작된다. 함내반란과 역반란이 일어나고 영화는 인종문제와 미국 위주의 애국주의를 곁들이며 관객들에게 어려운 판단을 요구한다.

중단된 마지막 교신 내용을 선제 핵공격을 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하지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경우 부함장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판단과, 함장의 전사 특유의 직감적인 판단 중 어느쪽이 옳은가?

함장은 백전노장으로서 군인 특유의 승부사기질과 직감을 가지고 있다. 부함장은 하버드 출신의 엘리트로서 엘리트 특유의 냉철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사사로운 감정과 인종주의가 개입하면서 이야기는 꼬여들기 시작한다. 함장은 부함장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비이성적인 판단을 한다.

랜섬의 경우는 유괴범의 협박이다. 고도의 지능을 가진 유괴범이 항공사 사장 아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한다. 주인공은 몸값을 주는 대신 400만달러를 유괴범에 대한 현상금으로 걸어버린다.

영화는 영화다. 영화에서는 항상 주인공의 판단이 옳은 것으로 결론난다. 헐리우드의 미국식 애국주의는 뻔할 뻔자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한 법이다. 부함장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고 인질이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이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말한다.

『당신은 신을 믿는가?』

속임수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판단이 옳다는 것 말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얼음처럼 차갑고 이성적이다. 그 이성의 판단이 끝내 옳은가? 우리 순진하지 말자. 속지 말자.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 바깥에서 존재한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위 교통사고의 경우와 핵미사일 사건, 또 유괴사건에서 그 어떠한 판단도 온전히 옳다 혹은 그르다고 말할수 없다. 토왕성 폭포에서 조난당한 경북대 팀을 구하러 갔다가 비명횡사한 그들처럼 어리석을 수도 있고 또 의로울 수도 있다. 우리는 정녕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철학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답을 제시해야 한다. 무엇이 옳은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동차 사고의 경우다. 자동차는 곧 폭발할 것만 같다. 그러나 당신은 뛰어들어 구해야 한다. 폭발하는데 걸리는 시간 계산에는 당신의 공포가 개입하여 있으므로 정확하지 않다. 핵 미사일의 경우 최후의 결정권은 인간이 아닌 신에게 있다. 인간이 신을 대신해서 판단하려 해서는 안된다. 이 경우 인간은 최대한 신에게 결정권을 주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

유괴범의 경우 유괴범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예측이야 말로 교만이다. 진인사대천명이다. 최선을 다했는가만 중요하다.

결론을 내리자. 이런 문제는 인간 이성의 영역을 초월한다. 영화들에는 냉철한 이성이 승리한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과연 인간의 이성이 신을 이길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사회적 합의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으로 대처하는 것보다 사회적인 합의에 따른 원칙대로의 판단, 규범대로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점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어릴때부터 충분히 교육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엔 이렇게 행동하고 저런 경우에 저렇게 행동하라』하는 것이 하나의 사회규범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으로 대처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규범은 『결정은 최대한 신에게 맡기고 인간은 다만 최선을 다한다』는 형태로 정리되어야 한다.

해당 사건에서는 결국 이성적인 판단이 옳았다 할지라도 사건은 반복되는 법이다. 인간이 자기지능과 냉철함과 지식과 재주로 한건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어도 다른 사건에 영향을 주므로 전체적으로는 더 안되게 하는 법이다.

자동차 사고에서 사람들은 『자동차가 곧 폭발할 것이다』하는 알 수 없는 문제를 알려고 했다. 이렇게 불확실한 것은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신에게 맞긴다는 사회적 합의가 요구된다. 핵미사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반군이 과연 핵미사일을 발사하려 했는가 하는 고도의 판단은 인간이 개입하지 말아야 할 영역이다. 이를 논리적인 생각으로 판단하려 해서 안된다. 알 수 없는건 신에게 맞기기로 사회가 합의하자.

유괴범문제는 좀 복잡하다. 주인공은 뛰어난 두뇌로 유괴범의 심리를 간파했지만 이건 월권이다. 그런건 간파하지 말기로 사회가 합의하자.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유괴범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또 사회가 합의하기로 하자. 그래야 세상에서 유괴사건을 종식시킨다.

이런 문제는 그 단일한 사건 자체로 범위를 축소시켜 놓으면 답이 없다. 필요한 것은 사회전체의 합의로 하여 예측가능성을 높이는데 있다. 사건에서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예측이 안되는 쪽이다. 사회적 합의는 예측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범인이 가진 주도권을 빼앗는다. 신에게 맞기는 것으로 사회가 합의하는 것이다. 그 경우 범인의 행동반경은 좁아진다. 그것이 옳다.

미국식 영웅주의와 애국주의, 그들은 흔히 이성과 과학의 힘 그 힘의 논리를 찬미한다. 좀 더 배우고 똑똑한 쪽이 결국은 승리한다. 주인공들은 영리하고 막강하다. 그러한 과학과 힘, 이성에 대한 찬미는 또 범인의 악을 미화한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비중있게 묘사되고 과학자이거나 의사이며 천재다. 그래도 주인공보다는 약간 지능이 낮다.

우리는 그러한 헐리우드식에 대항하는 논리로서 사회적 합의의 유효함을 내세워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성과 과학의 힘이 아니고 규범과 합의, 인정, 협력 그리고 믿음이다. 깨달은 이 만이 진정한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오래전 부터 이 방향으로 나 자신을 훈련해 왔다.


《끝】


사막의 생명수

이런 얘기를 들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가 있었다. 쓰러지기 일초 전에 작은 샘을 발견했다. 샘은 시멘트로 봉해져 있고 수동으로 작동하는 구식펌프가 샘 위에 설치되어 있었다. 샘 주변은 황폐하고 그 펌프는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없다.

알겠지만 손잡이가 달린 구식펌프는 위에 물을 한바가지 붓고 손잡이를 저어줘야 치익치익 소리를 내며 물이 나오게 되어있다. 다행히 샘가에는 펌프에 부을 한바가지 가량의 물이 든 통이 놓여 있다. 그리고 옆에 이런 안내판이 서 있다.

『통 안에 든 물을 펌프에 부은 후 펌프질을 해서 물을 퍼올리도록 하시오. 뒤에 올 사람을 위해 물 한바가지는 채워놓고 가시오.』

목이 마르다. 그 바가지의 물을 마셔버리면 그 펌프는 사용할 수 없다. 여행자는 심한 갈증에 죽을 것만 같다. 이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그대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그 안내판이 가리키는 대로 그 한 통의 물을 펌프에 부은 후 펌프를 작동해보니 펌프가 고장나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대는 죽는다. 그래도 그대는 안내판이 지시하는대로 한 통의 물을 마시지 않고 펌프에 부을 것인가?

일단은 사람이 살고봐야 한다. 사막에 버려진 펌프가 작동한다는 보장은 없다. 우선은 그 통에 든 물을 마셔야 한다. 물론 그 물을 마셨을 경우 펌프는 작동하지 못하고 그 샘은 영영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뒤에 그 샘을 찾아올 많은 여행자를 곤란하게 한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그대라면 믿고 물을 부을 것인가? 아니면 살기 위해 일단 물을 마시고 볼 것인가?

만약 그대가 믿음있는 사람이라면 그 통에 든 물을 펌프에 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그 상황에서 도무지 무엇을 믿었다는 말인가? 그 믿음의 구체적인 대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설사 그대가 용기있게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펌프에 물을 부었다 쳐도 그대의 그러한 행동이 종교인의 허위의식이 아닌고 진정한 것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관념의 게임이었다. 그대는 정답을 찾으려 했을 뿐 진지하지 않았다. 지금부터는 실제상황이다. 그렇다면 군중심리, 고독감, 오기, 스트레스 등 다양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나는 추궁한다. 말하라. 그대는 어이할 것인가? 그대에게 그 바가지에 남겨진 물을 펌프에 부을 정도의 순진성과 믿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종교의 교리 뒤로 도피함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터라면 이런 경우는 흔하다. 내가 살면 동지가 죽고, 동지가 살면 내가 죽는다. 아니 내가 희생해도 동지가 산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용기있게 적진을 향하여 돌격하는 병사는 많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집단의 광기가 작동한다. 이건 순수하지 않다.

혼자여야 한다. 그 사막처럼 혼자여야 한다. 그대가 물을 붓지 않았다 해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격자는 없다. 전쟁터와는 본질에서 다르다. 이 때의 용기가 진정한 용기이다.

국가에 대한 희생정신, 가족에 대한 의무감, 동료들 앞에서의 체면을 배제하고 철저히 고독한 그대 자신으로 돌아가라. 『나는 아내와 자식이 있기 때문에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따위의 변명도 배제해야 한다. 그대는 순수한 혼자이다. 사막에서의 그대는 혼자이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조국도 없다. 오직 말없는 사막과 재촉해오는 죽음과 운명의 펌프가 하나 있을 뿐이다.

생각해야만 한다. 인생에 있어 이와 같은 실존적 고독의 상황을 얼마든지 당한다. 국가를 위해,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이런거 빼고, 군중심리에서 나온 병사의 만용을 빼고 철저히 혼자인 그대라면 어이할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연히 그 물을 펌프에 붓는다. 왜? 믿음 때문이 아니다. 권태이다. 나는 별로 살기가 싫다. 신이 나를 테스트한다면 나도 신을 테스트해야 하겠다. 그게 나의 이유이고 방식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은 그런 상황을 당해서 그렇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수행이 필요하다. 그것은 사전에 충분히 생각되어야만 한다. 단련되어야 한다. 지금 미리 생각해두라. 그대라면 어찌할 것인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이유는? 왜?

역사에 길이남을 위대한 영웅들이 있다. 그들이 죽음 앞에서 떳떳한 것은 그가 대단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사전에 충분히 생각해 두었기 때문이다.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실존적 고독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소크라테스가 그 한통의 물을 펌프에 부었기 때문에 뒤에 온 무수한 작은 소크라테스들이 살아났다. 예수가 그 한통의 물을 펌프에 부었기 때문에 뒤에 온 무수한 작은 예수들이 살아났다.

선한 결단은 선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충분한 권태에서 나온다. 고독이어야 한다. 그 고독의 끝까지 가보고 나서 초극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그대는 도무지 왜 이 메마른 사막을 방문하여 이곳으로 왔는가?

신이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그의 고독과 우울을 의해서 나는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다.

청명한 겨울 하늘 보고 뿌듯해 하듯,
한줄기 이는 바람에 서늘해 하듯

더 많이 체험하여야 한다.






터널 안에서 달려오는 기차를 만났을 때


20여년 전이다. 광양지나 벌교 지나 보성지나 어떤 기차터널 속을 걷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면 터널 끝이 보인다. 길어봤자 한 300미터 쯤으로 예상된다. 막상 들어가 보면 1키로도 넘는 끝없이 긴 터널이다.

터널 안은 깜깜하다. 1센티 앞도 보이지 않는다. 맞은편 터널 끝에서 눈부신 빛이 들어온다. 그 밝은 빛 때문에 주위가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그 빛을 보지 않으면 어둠에 적응되어 주위가 희미하게나마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그 빛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눈을 뜨고 그 빛을 바라보면 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어둠에 적응하려 해도 코앞도 보이지 않는다. 발의 촉감으로 더듬어 레일을 따라 걸어간다. 어둠이 단단한 벽처럼 느껴진다. 눈앞은 환하게 밝은데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까만 어둠이 얼굴에 딱딱 부딪혀온다. 나아갈 수 없다.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입구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5분이면 통과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30분 이상 걸었던거 같은 느낌이다. 터널의 2/3을 지난 지점이다. 뒤에서 기차가 덮쳐온다. 피해야 하는데 터널 안의 구조를 알지 못한다. 깜깜한 어둠에 옴쭉달싹 못하고 갇혀버린다. 순간적으로 생각한다. 이곳이야 말로 내 시체를 보이지 않고 지구에서 사라질 일생에 유일한 기회가 아닌가?

레일 사이에 엎드린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냥 서 있어보기로 결정한다. 그렇다. 이건 승부다. 기차가 눈 앞으로 다가온다. 터널 안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는 법이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두개의 강렬한 라이트가 터널 안을 비춘다. 아찔하다. 강렬한 라이트의 불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서 있어 본다. 기차가 30여미터쯤 가까와졌다. 갑자기 터널 안이 환해지고 그제서야 터널안의 구조물들이 눈에 확 들어온다.

터널 안에는 몇십미터 간격으로 대피공간이 있다. 선로 작업을 하는 보선원들이 터널 안에서 작업을 하다가 기차가 오면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이다. 1미터 앞에 그 공간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렸다. 죽어도 기차 밑에 엎드리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키는데는 성공했다. 그렇다면 승부에서 내가 이긴 거다. 아니 내가 진 거다.

기적은 있다. 그때 그 대피공간이 1미터 거리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지구에서 증발하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몇 번 더 죽음 앞에 섰다. 그러고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 터널 안에서 생각했다. 맞은편 터널 끝에서 빛이 들어온다. 빛은 너무나 밝고 눈부시다. 그런데 1센티 앞이 보이지 않는다. 터널 끝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내 손도 내 발도 내 몸도 보이지 않는다. 눈앞은 너무나 밝아서 눈이 부신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믿음을 생각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보인다면 믿을 수 있나? 그때 나는 1키로미터 앞의 빛을 바라보고 걸었다. 1센티 앞도 보이지 않는 까만 길을 끝없이 걸었다. 눈을 감은채 길을 걸어본 일이 있는가? 처음 20여미터 쯤은 성큼성큼 쉽게 나아간다. 그러나 30여미터를 나아간 어느 지점에서 갑자기 어떤 벽이 느껴진다. 앞에 무언가가 막아서는 듯 하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비틀거린다. 앞길에 아무런 방해물이 없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을 뜨게 된다.

장님들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서 잘도 걸어간다. 믿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므로 믿을 뿐이다. 우리는 볼 수 있다. 볼 수 있으므로 믿지 못한다.

그 깜깜한 터널 안에서는 1킬로 앞의 빛을 바라보고 가는 거지 눈앞의 발부리에 채이는 돌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이다. 잘 보인다면? 깜깜한 터널 안의 온갖 구조물들이 희미하게나마 보인다면 오히려 무서워서 나아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굉음, 그 불빛 그 한 순간의 내 생존본능, 그 인상적인 기억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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