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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5002 vote 0 2022.12.25 (12:2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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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강목을 쓴 순암 안정복 선생의 초상. 성호사설을 쓴 이익의 제자. 


    실학자로 분류하지만 개소리고 전형적인 주자학자다. 서학을 연구하면 바로 그게 실학이다 하고 우긴다. 실학은 학문의 내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자학이 아닌 다른 것을 검토하는 분위기를 실학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실학이라는 학문은 존재한 적이 없고 실학풍으로 썼다는 식의 유행이 있었을 뿐이다. 


    아래는 순암집 천학문답에 실린 안정복의 기독교 비판이다. 


    1. 기독교는 사람의 육체를 죄악의 근원으로 보아 원수로 간주한다. 인간의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이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2. 동신童身 곧 순결을 귀하게 여기는 교리는 부부와 인륜과 음양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도덕의 근본인 효를 모독하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묵자의 겸애설보다 더 과격하고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4. 천국, 지옥, 영혼불멸 등 불확실한 것을 교리로 삼는 것은 불합리하다. 살아있을 때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은 어찌 알겠는가? 현실세계의 관심을 벗어나서 초월적 환상에 빠지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5. 인간을 도덕으로 이끌기 위해 마귀의 기만과 유혹을 주의하라고 한다. 하지만 본 적이 없는 마귀에 대한 언급은 오히려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소홀하게 만든다. 이는 현실사회의 책임을 경시하도록 할 뿐이다.


    6. 창조설은 비합리적이다. 음양의 기운에 의해 이루어지는 천지개벽에 인격체인 조물주가 끼워질 여지가 전혀 없다.


    7. 신이 인간의 모습을 갖추었다는 주장도 틀린 것이다. 신은 우주를 구성하는 도덕적 원리와 합리적 원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8. 내세를 강조하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인간이 전력을 기울여야 할 일은 현실에서의 선행이다.


    9. 신과 구원을 현실에서의 도덕적 의무보다 상위에 두는 것은 인간공동체의 근본을 거부하는 것이다.


    10. 예수가 아담의 자손이라면 예수는 인간이며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11. 아담과 이브의 원죄는 신이 인간을 모함한 것이다.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가르쳐야지 어찌 죄악에 빠지도록 유도하고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는 말인가? 가난과 질병과 죽음이 원죄 때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가소로운 논리적 모순이다.


    12.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한 도리다. 인간의 선행은 그 윤리적 바탕이 타고난 본성 속에 들어 있다. 왜 인간이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혹은 죽은 후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행동해야 하는가? 


    13. 현실의 두려움과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의무를 버리는 일이며, 근원적으로 보면 이기적인 행위다. 구원을 바라는 이기심으로써 도덕을 행하게 하는 것은 바른 세상의 도덕적 토대를 이룰 수 없다.


    14. 세례, 죄의 고백, 공개적 기도 등의 행위는 불교와 미륵불 신앙의 아류에 불과하다.



    ###


    공자의 말과 안정복의 말이 정확히 같음을 알 수 있다. 2500년 전에 인류는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2500년 후에도 인류는 여기서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서구 문명이 기독교의 복수논리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논리가 요즘 유행하는 음모론과 구조가 같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의도, 복선, 계략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함정을 파고 덫을 놓고 사람을 유인한다. 뱀을 풀어서 죄를 저지르게 유도한 다음 약점을 잡는다. 


    이는 고대의 노예사냥꾼이 자유민을 노예로 만드는데 쓰는 기술이다. 기독교의 신과 인간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복제한 것이다. 


    기독교의 논리는 상업적 거래논리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한다는 게임의 논리다. 도덕이 구원과 바꿔먹는 거래의 대상이 되었다. 


    공자의 논리는 인간은 짐승과 달리 원래 그렇게 태어난다는 것이다.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이 자연의 법칙이라서 그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고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하여, 내세를 위하여 즉 무언가를 '위하여' 인간이 도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의 본성과 합리성을 따르면 결과적으로 도덕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즉 의하여다. 


    기독교의 원죄와 구원, 당근과 채찍은 노예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니체는 노예의 도덕을 버리고 주인의 도덕으로 갈아타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의 절반은 정신적인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세상과 맞서 싸울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 문명의 중심과 연결되는 끈이 떨어져 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자유롭게 핸들을 장악한다. 그들은 교통 흐름의 자연스러움을 따른다. 이래라저래라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한다. 에너지 흐름에 동조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운전석에 앉지 않은 사람을 운전석에 앉히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거래가 필요하다. 흥정이 필요하다. 자연의 에너지 흐름 속으로 풍덩 빠져야 한다. 


    정신적 노예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인류 문명의 운전석에 앉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한 번도 핸들을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다.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경험한 적이 없는 자연의 에너지 흐름을 두려워하는 그들을 운전석에 앉히는 데는 동기가 필요하다. 당근과 채찍이 필요하다. 


    이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적어도 백 년 안에는 종교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히틀러에게 투표한 사람, 윤석열에게 투표한 사람은 자발적 노예들이다. 노예가 자유인보다 많으면 그것이 재앙이다. 


    자유인과 노예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서로 처해 있는 입장이 다르다. 그들은 결코 대화할 수 없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오염되어 버린 노예는 어쩔 수 없고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노예의 오염을 막아야 한다. 


[레벨:30]스마일

2022.12.25 (14:13:06)

철학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종교는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흙, 물, 불에서 자연철학이 발전하여
소크라테스를 거쳐 철학이 사람을 들여다보더니 결국 철학은 죽고 신이 지배하는 세상 천년중세가 지나 과학이 대두되고 다시 자연철학의 시대가 와서 신을 죽였으나 온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자발적으로 숭배할 왕을 찾는 국힘같은 세력이 아직 남아있기때문에.
국힘은 오년에 한번씩 자신들이 복종할 왕을 찾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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