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은 거짓말이다. 설이 코앞이다. 명절증후군 기사가 하나쯤 나올 때가 되었는데 웹서핑에 게을러 아직 발견을 못 했다. 명절증후군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다들 눈치를 보느라고 말을 돌려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본심을 말하지 않는다. 별수 없다. 욕을 먹어도 내가 총대를 멜밖에. 까놓고 진실을 말하자. 진실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있다. 명절이 되면 어른들이 묻는다. ‘너 언제 장가갈 거냐?’ ‘너 언제 취직할 거냐?’ ‘아기는 왜 안 낳니?’ 왜 이런 질문을 할까? 그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째려보고 있을 수도 없고. 어색하잖아. 휴대폰이라도 있는게 다행이다. 휴대폰 보는 척하며 눈을 마주치지 말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으면 완벽하다. 그런데 그럴 거면 집에는 왜 가냐? 진실을 말하자. 명절은 핑계고 본질은 권력서열의 변동사항을 확인하는 행사다. 원숭이나 개의 마운팅 행동과 같다. 왜 개는 마운팅을 하는가? 인간도 같다. 인간은 원래 서열을 중시하는 동물이다. 한국의 유교는 더하다. 여자든 남자든 스무 살을 넘기면 무의식이 정하는 서열이 같은데 서열이 다르다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호르몬으로 보면 여자가 서열상승이 빠르다. 원시 부족민은 평균수명이 짧기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조숙해서 여자는 열여섯 전후로 서열 1위가 되고, 남자는 스무 살 전후로 서열 1위가 된다. 생물학적 서열과 사회적 서열에 차이가 나므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옛날에는 명절증후군이라는 것이 없었다. 큰 며느리와 작은 며느리가 시부모에게 점수를 따려고 두 팔을 걷어붙이고 경쟁하다 보면 명절증후군은커녕 힘이 솟구친다. 남편이 설거지를 도와주지 않아서 힘들다는건 개소리다. 얼굴도 못 익힌 사람이 권력서열을 확인하려 들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거다. 말은 가족인데 무의식은 가족이 아니다. 냄새로, 페로몬으로, 추억으로, 경험으로 익숙하지 않은 시부모 앞에서 주눅이 들어서 그렇다. 주눅이 드는 이유는 서로 간에 역할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며느리는 아들 낳았다고 자랑이고, 아들은 그랜저 뽑은게 자랑이다. 그건 쌍팔년도 이야기고 지금은 명절 차례를 지낼 이유가 소멸상태다. 왜 거기에 철퍼덕 엎어져서 머리를 땅에 박고 절하고 있지? 일본인들은 5년에 한 번 정도 얼굴을 본다는데. 뭐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말이다. 유럽은 부모 장례식 때 한 번 고향에 간다는 말도. 방문해도 초대하는 쪽에서 음식을 준비하는게 맞다. 손님이 남의 부엌에 뛰어들어 요리하는 풍속은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외계인 관습이다. 부엌살림은 다 임자가 있는 건데 인도라면 아들이든 며느리든 어머니 물건에 손대면 귀싸대기 맞는다. 영화에서 본 것이다. 아들 - 설거지 도와드릴까요? 엄마 - 부엌은 내 공간이야. 썩 꺼져. 손님이 주인의 부엌에 들어가는건 굉장한 실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옛날에는 16살에 시집을 갔으므로 며느리가 귀머거리 3년, 봉사 3년, 벙어리 3년을 해도 25살이다. 스무 살 넘어가면 아무도 못 건드린다. 자식이 커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할 수 없다. 다 큰 아들이 '할매야 니 미쳤나' 하고 덤빈다. 아홉 살만 넘어가면 꼬마 신랑이 장가들던 시절이라 며느리가 스물다섯이면 손자가 상투를 틀고 갓을 쓰고 에헴 하며 시어머니를 견제한다. 자식을 여럿 낳으면 어머니가 세력을 획득하므로 아무도 못 건드리는 것이다. 지금은 30살에 시집가는데 옛날이면 손주 볼 나이잖아. 병장이 이등병 노릇하려니까 당연히 힘든 것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하고 외치는 것이다. 16살이면 한창 공부할 때다. 시어머니가 전수하는 살림 기술을 배우려는 의욕이 있다. 잔소리를 들어도 아프지 않다. 호르몬이 그렇게 나온다. 그 호르몬은 스무 살이 넘어가면서 딱 끊어지고 그때부터 태세전환이다. 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나이는 딱 스물이다. 며느리가 스무 살 이상이고 게다가 고학력인데 잔소리를 한다면 미친거다. 그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인간의 본능과 맞지 않고, 호르몬과도 맞지 않고, 무의식과도 맞지 않다. 자연법칙과 안 맞는 무리한 행동이다. 나이 스물을 넘으면 다 같은 성인인데 옛날에는 젊은이는 다섯 살까지 말을 놓았고 40살 넘어가면 열 살까지는 말을 놓았다. 성명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냥 중권아, 세화야, 준만아 하고 부른 것이다. 이름에 성을 붙이는건 일제강점기에 교사난 때문이었다. 영희야! 하고 부르면 선생님! 큰 영희 말이에요, 작은 영희 말이에요? 하고 반문이 들어온다. 김영희와 이영희를 붙여 부르니 편하다. 학년이 다르면 선배라고 말을 높이게 하는건 일본인들의 관습이 전해진 것이다. 해방된 지 언젠데 폐지해야 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은 선배에게 말을 높이지 못 하게 해야 한다. 이름을 부를 때도 성명을 부를 것이 아니라 성을 빼고 명만 불러야 한다. 특히 군대에서 존댓말을 없애야 한다. 조선 시대도 군인들은 존댓말 안 했다. 군호를 외쳐도 ‘보괴라’ ‘보거라’ 하고 반말로 하지 적군이 총을 쏘는데 거기 있는 장병님 적군입니까 아군입니까 군호를 대어 주십시오 이러다가 총 맞아 사망. 급한데 무슨 존댓말이냐? 미쳤지. 안철수 병장님 전방에서 돌 굴러오지 말입니다. 이러다가 사망. 군호는 반말로 짧게 해야 한다. 지금도 판문점에 근무하는 한국인 부대는 말을 짧게 한다는데. 하여간 다 같은 성인들끼리 위아래를 따지는건 미친 거다. 그게 인간의 타고난 서열본능이다. 문명은 본능을 극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편 인간의 본능은 남자든 여자든 스무 살이 넘으면 남의 공간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고 지시한다. 이 경우는 본능을 따르는게 맞다. 서열본능은 극복하고 탈서열본능은 존중하고. 본능과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