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이 먼저냐 숫자가 먼저냐? 구조론은 세상을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라는 다섯 가지 의사결정구조로 설명한다. 반도체와 비슷하다. 반도체는 전기가 통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조건에 따라 도체가 되기도 하고 부도체가 되기도 한다. 구조는 어떤 둘의 대칭과 축으로 이루어진다. 대칭된 둘 중에서 축은 왼쪽을 선택하기도 하고 오른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세상은 원자가 아니라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가 아니라 셈으로 이루어져 있다. 숫자가 먼저 있고 그것을 셈하는 것이 아니라 셈이 먼저 있고 그 셈의 값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숫자가 먼저냐, 셈이 먼저냐? 근본적인 발상의 차이다. 우리가 세상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세상을 관계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이 요구된다. 원자론이 세상을 고착된 숫자로 보는 관점이라면 구조론은 세상을 숫자들의 관계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정확하게는 비례다. 어떤 것이 변할 때 연동되어 변하는 것이다. 숫자는 그것을 알아보기 쉽게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이해할 때 그 대상 내부의 고유한 성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로 보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그것이 셈으로 보는 관점이다.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짠 것은 고유한 것이다. 설탕은 원래 달고 소금은 원래 짜다. 더 이상은 캐묻지 않는다. 숫자도 고유하다. 1은 언제나 1이고 2는 언제나 2다. 다 정해져 있다. 이것이 원자론적인 태도다. 일본인은 원래 근면하고 중국인은 원래 지저분하다고. 과연 그런가? 틀렸다. 인간은 주변과의 관계에 따라 근면해지기도 하고 게을러지기도 한다. 산이 뾰족한 것은 물이 산을 깎아먹었기 때문이다. 산의 형태는 물이 결정한다. 원인이 자체에 고유하지 않고 바깥에 있다. 외부에서 결정한다. 1이 변하면 2도 변한다. 그 사이에 비례가 있다. 고유한 것은 없고 주변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서 성질이 결정된다. 밝은 곳에 두면 어두워 보이고 어두운 곳에 두면 밝아 보인다. 약한 곳에 두면 강해 보이고 강한 곳에 두면 약해 보인다. 소금이 짜고 설탕이 단 것도 관계 때문이다. 관계는 외부와의 관계다. 계 내부에 집어넣고 보면 구조다. 관계는 상대적이고 구조는 절대적이다. 세상의 다양한 관계가 다섯 가지 절대적인 구조로 정리된다. 자연에 계 안에서 대칭과 축을 만들어 의사결정을 하는 방법이 다섯 가지 있으니 만유의 자궁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다섯 가지 반도체를 순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숫자 1, 2, 3, 4로 표현하지만 사실은 플러스 1, 플러스 2, 플러스 3, 플러스 4다. 셈이 먼저다. 플러스를 일일이 쓰면 문장이 길어지므로 생략하는 것이다. 파장이 칼라를 결정한다. 색깔이 숫자라면 파장은 셈이다. 색은 원자처럼 고정되어 있다. 색상표에 나온다. #FFFFFFF를 쓰면 무색이다. 색상코드를 정해놓았다. 그런데 가짜다. 사실은 빛의 파장이 있을 뿐 색상코드는 프로그래머 아저씨가 임의로 정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자연에 없다. 우리는 세상을 색상코드로 알지만 착각이다. 파장은 둘의 간격이다. 세상은 어떤 것의 집합이 아니라 어떤 둘 사이 간격의 변화다. 원자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간격이 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격을 조절해서 온갖 칼라를 연출할 수가 있다. 다양성의 자궁이 되는 하나의 절대성이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 절대성을 통제할 수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배의 키를 얻은 셈이다. 예전에는 범선에 키가 없어서 노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여러 명의 노잡이 간에 의견이 틀어져서 항해는 실패다. 동양에서 키가 전래되어 한 명이 범선의 키를 잡자 항해가 수월해졌다. 원양항해가 가능해졌다. 지리상의 발견이 일어났다. 하나의 간격을 조정해서 백만 가지 칼라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다양성을 주장하지만 그 다양성의 자궁 앞에서는 머뭇거리곤 한다. 용감하게 손을 내밀어 키를 잡아야 한다. 거침없이 항해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