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의 완결 민중사상이 한반도를 강타한 적이 있었다.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전면등장이다. 일단 인간이 많았다. 도처에 인간이었다. 바글바글했다. 교실에 학생이 80명씩 앉아있기도 했다. 거기에서 강한 에너지를 느껴버린 것이다. 필을 받아버린다. 흥분해 버린 거였다. 민중주의라고 하면 파퓰리즘으로 번역된다. 인민주의가 사실에 가깝겠다. 어느 쪽이든 우파들이 싫어하는 단어다. 어떤 사상을 가졌는가는 어떤 에너지에 빨대를 꽂았는가로 구분된다. 당시에 그랬다. 민중의 기운이 넘치던 시대였다. 민중의 쪽수에 빨대를 꽂는다. 국민교육과 미디어의 발달 덕분이다. 러시아 인민주의는 실패했다. 스탈린은 국제적 안목을 갖추고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 공업화를 해야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해 일부 낭만주의적인 인텔리겐챠 계급은 브 나르도 운동을 벌여 시골로 돌아가려 했다. 농민의 힘으로 짜르를 타도하고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든다. 왜? 농민이 만만했기 때문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복종하는 순박한 농민의 모습에서 에너지를 느껴버린 거였다. 인텔리겐챠가 주도하는 이상적인 농민공동체의 건설이라니 멋지잖아. 비록 짝사랑이라도. 착한 지식인의 계몽운동이 무식한 농민들의 환영을 받는다면 근사하잖아. 오르가즘 느껴주잖아. 현실은 냉정한 법. 그다음이 없다. 그래서 어쩌자고? 농민을 계몽한 다음에는? 그냥 농민 위에 군림하는 거냐? 농촌에서 출구가 없다. 제 발로 궁지로 들어간 거다. 어쨌든 그 시대에 필요한 일이었고 일정부분 성공했다. 한국에서는 625 이후 베이비붐 세대의 쪽수파워에 감격하여 신토불이를 주장하며 풍물을 치고 농활을 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는데 80년대에 꽤 잘나갔다. 인간의 희망은 몽상일 뿐. 답은 생산력이 결정한다. 이들은 산업사회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게 문제다. 국제감각이 결여되어 있었다. 급격한 이농으로 농촌이 소멸해 버려서 비빌 언덕이 없어졌다. 사실이지 그때가 통일의 적기였다.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약화되고, 김일성이 죽었을 즈음 통일을 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김영삼이 데프콘 쓰리를 발동하는 바람에 사태는 교착되어 통일도 끝장나고 영삼도 끝장났다. 중국의 발전으로 통일은 어려워졌다. 김영삼이 오판하지 않았다면 IMF는 오지 않았고 통일은 상당히 진전되었을 거다. 남북이 연결되면 일본도 밥숟가락 든다. 밥숟가락 들고 얼쩡대다가 통일이 물건너가자 일본이 손을 뺀게 IMF다. 백기완의 임무는 거기까지. 일단 군대를 모았는데 어디로 진군하라는 건지. 답을 내지 못했다. IMF가 한국의 기세를 꺾으면서 통일까지 꺾어버렸다. 민중도 꺾여버렸다. 그리고 IT의 전면등장.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친일, 친미와 싸우면서 만들어진 민족주의 세력과 통일운동 과정에 만들어진 유교가부장 사회주의 곧 주사파 세력과 급격한 이농과정에서 농촌에 대한 향수로 만들어진 인민주의 세력과 IT산업에 편승한 부르주아 386세력의 연합군이다. 결국 생산력이 답을 낸다. 낭만주의와 향수와 판타지로 한 번 군대를 모을 수는 있으나 전쟁을 이길 수는 없다. 군대가 어디로 진군해야 할지 방향을 일러줄 수 없다. 다만 그때 그 시절 아스팔트에서 만들어진 민족주의와 인민주의가 지금도 민주당을 견인하고 있다. 그때 그 시절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쳤던 386이 486 되고, 586 되고, 686까지 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 우리는 아스팔트에서 하나였다. 선두에는 언제나 백기완이 있었다. 그는 군대를 모았고 군대는 영삼의 삽질로 쓰러졌으나 IT를 만나 활로를 얻었다. 옳든 그르든 한 번 광장에 모인 군대는 흩어지지 않고 자체 동력으로 계속 가는 것이다. 백기완의 임무는 아스팔트에서 끝났으나 우리는 다음 단계로 계속 전진한다. 그때 우리는 내부를 보았으나 지금은 바깥을 보아야 한다. 에너지는 외부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
97년도에 농활갔던 충남 아산시는 KTX로 이미 아파트 단지 된지 오랩니다.
5일장 서면, 돼지 순대로 막걸리 마시고, 이장님 봉고차 타고 마을회관오던게 기억나는데....
그때, 청년회장 형님은, 땅값비리로 좀 고생을 했다고도 건너 건너 (확실치 않고) 들었네요...ㅠㅠ